20세기가 ‘원자’의 시대라면 21세기는 ‘핵자’의 시대로, 과학자들은 실생활에 양자혁명이 불어닥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즉 양자이론이 지배하는, 원자핵의 구성요소(핵자)인 양성자와 중성자가 주인공으로 등극한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20세기 양자이론이 등장함으로써 원자 단위에서 전자, 원자핵, 빛을 이용하는 전기전자, 원자력, 레이저 등의 산업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덕분에 텔레비전, 컴퓨터가 개발돼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해 왔다. 또한 생명의 신비까지도 DNA의 원자구조를 통해 밝혀졌다.
21세기에는 분자와 원자 단위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용된다. 즉 NT(나노기술), BT(생명공학기술), IT(정보통신기술) 등이 발전해 실생활에 변혁을 불러올 전망이다. 이를 위해서는 분자와 원자를 관찰하고 가공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이 역할을 해주는 것이 이들보다 수십만배 이상 작은 양성자와 중성자다. 이제는 원자핵에서 중성자와 양성자를 떼어내 조작·활용하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이 기술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양성자 가속기다.
서울-부산 1초 주파하는 양성자 활용
양성자는 가속기의 능력에 따라 에너지를 키울수록 속도가 증가한다. 따라서 물질에 충돌했을 때 전달되는 에너지도 커지게 된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은 양성자의 에너지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
1천V의 전압으로 가속된 양성자는 1keV(103eV)의 에너지를 얻는다. 이 경우 양성자의 속도는 초당 5백km쯤 된다. 이 정도는 서울에서 부산을 1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속도다. 이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가 물질에 부딪치면 물질 표면에 변화가 일어난다. 즉 양성자가 표면의 분자나 원자를 떼어내는 것이다. 이 점을 이용하면 물체를 원자 낱개 단위로 조작할 수 있는 나노가공에 활용될 수 있다.
점점 에너지를 높여 1백keV 정도가 되면 양성자는 초속 5천km로 전진한다. 이 양성자가 물체와 충돌하면 물체의 여러 원자층을 뚫고 들어가 에너지를 잃으면서 어느 특정 위치에 박히고 만다. 이때 양성자의 에너지가 클수록 물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데, 물질에서는 양성자가 지나간 궤적을 따라 결정구조가 바꾸게 돼 결과적으로 새로운 물질이 생성된다.
10MeV(1MeV=${10}^{6}$eV) 이상이 되면 양성자는 초속 5만km의 속도로 이동하면서 좀더 깊은 물질 속뿐 아니라 이를 구성하는 원자 내부까지 들어가 핵과 반응한다. 이로 인해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환되는데, 이를 활용해 의료용이나 산업용으로 활용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산할 수 있다.
에너지가 1백MeV 이상이 되면 양성자는 초속 13만km의 속도에 이른다. 이 정도 에너지는 납과 같은 무거운 원소의 핵과 충돌해 핵을 부술 수 있다. 이때 핵이 부서지면서 많은 중성자와 양성자가 방출된다. 강력한 중성자원과 새로운 동위원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양성자와 함께 원자핵을 구성하는 중성자를 얻기 위해 양성자 가속기가 필요한 이유다(양성자 가속기와 중성자의 관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4번째 파트 참조).
질량 기원 찾아 빛 속도의 99.99999%로 가속
에너지가 더 높아져 1GeV(${10}^{9}$eV) 이상이 되면 양성자는 빛의 속도(초속 30만km)와 상당히 가까워진 초속 26만km에 이른다. 이 양성자가 원자핵과 충돌함으로써 핵자보다 더 작은 중간자와 중성미자 등의 소립자가 생성된다. 이를 통해 물질세계의 근원을 규명할 수 있다.
실제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2007년에 완공할 목표로 50개국이 참여하는 초대형 양성자 가속기인 거대강입자가속기(LHC)를 조립하고 있다. LHC에서 가속된 양성자는 14조eV로, 빛 속도의 99.99999%에 이른다. 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 두개를 충돌시킴으로써 질량을 만드는 것으로 추정되는 힉스입자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처럼 양성자 가속기는 에너지에 따라 기초과학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분야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산업적 활용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 양성자 가속기의 전류를 높이는 것이 관건이 되고 있다. 산업적 활용에서는 생산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류를 높인다는 말은 단위시간 당 양성자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양성자 가속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전류는 1μA(${10}^{-6}$A)에도 훨씬 못 미친다. 수십mA 이상이면 대전류 가속장치에 속한다. 전류를 높이기가 에너지를 높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데, 그 까닭은 같은 전하를 띤 양성자들 간에 서로 밀어내는 반발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NT, IT, BT, ST 등 다양한 첨단과학기술 분야에서 양성자 가속기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알아보자.
신소재 - 자외선 차단 고분자 개발
양성자 가속기의 제일 앞부분에는 수소원자로부터 전자를 떼어내 얻어진 양성자를 가속기로 쏘아주는 입사장치가 있다. 이 장치에 쓰이는 기술을 응용하면 수소 대신 질소, 아르곤, 산소 등 다른 기체나 화합물을 이온화해서 가속시킬 수 있다. 이를 이온 입사기라고 하는데, 이때 이온은 수-수백keV 정도의 에너지를 갖는다.
이 이온을 각종 재료에 충돌시키면 표면 가공이나 개질이 이뤄져 신소재 개발이 가능하다. 이온빔 장치들은 이미 반도체 제조의 불순물 도핑, 금속 재료의 내구성 향상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고분자 재료에 이온을 주입하면, 광학적 성질이 변하고 전기전도도가 향상된다. 이 특성을 활용하면 플라스틱의 전도성을 높여 정전기를 방지하는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경도 향상, 자외선 차단 등에 응용된다.
NT - 양성자빔으로 나노미터 두께 웨이퍼 제작
양성자 가속기는 NT에서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양성자 빔을 사용해 극소 물체의 측정과 분석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표면의 원자를 떼어냄으로써 나노가공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나노가공의 예로는 반도체 웨이퍼 제작에 활용되는 스마트절단기술이 있다. 태양전지나 전력소자 등의 기판으로 활용돼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절연체 실리콘박막(Silicon On Insulator, SOI) 웨이퍼는 수백nm(나노미터, 1nm=${10}^{-9}$m) 두께를 요구한다. 이 정도 두께의 웨이퍼를 제작하기 위해서 종전에는 이보다 수천배 두꺼운 6백50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 단위의 웨이퍼 두장을 절연막 사이에 두고 맞붙인 후 원하는 두께가 될 때까지 갈아내는 방법이 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 경우 6백50μm 웨이퍼 두장을 이용해 고작 수백nm 두께의 SOI 웨이퍼 1장을 얻을 수 있어 재료의 손실이 컸을 뿐만 아니라 연마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도 적지 않았다.
1996년 프랑스의 정부연구기관인 CEA와 SOITECH사는 이를 극복하는 스마트절단기술을 개발했다. 스마트절기술은 실리콘 웨이퍼 내에 수백keV의 양성자빔을 균일하게 조사한 후 열처리를 하면 표면의 입자들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원하는 두께의 웨이퍼를 만들어낼 수 있다.
IT - 전력반도체 소자의 에너지 손실 최소화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각종 전기전자 제품의 전기회로에는 수백V의 전압과 수십A의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전력반도체 소자가 포함돼 있다. 현재 이 소자와 관련된 연구에서는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문제가 관건이 되고 있다. 이 문제는 스위칭 속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더욱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양성자 빔이 활용된다. 수MeV 정도의 양성자 빔을 전력반도체 소자에 입사시켜주면 그 안에 (+)전하를 띤 양성자가 박히게 된다. 이 양성자는 마치 시냇가의 돌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전자가 소자 내부를 한번에 점핑하지 않고 양성자라는 돌다리를 통해 좀더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 전력 손실이 줄어들면서 전류가 원활하게 흐를 수 있다.
BT - 신종 유전자원 개발과 안정한 품종개량
자연환경에서 돌연변이는 이론상 20만년에 1종이 생성될 정도로 극히 더디다. 때문에 연구현장에서는 방사선과 같은 인위적인 환경 조건을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유전적 변화의 빈도를 높였다.
특히 최근에는 돌연변이를 위해 종전에 사용돼 왔던 감마선 외에도 양성자와 같은 입자들을 이용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양성자 빔은 감마선과는 달리 생물체에 조사하면 에너지를 선택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단위선량 당 유전자변이 빈도를 감마선보다 훨씬 높일 수 있어, 기대하는 유용유전자원의 개발과 상용화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식물에 양성자 빔을 가하면 자신의 유전자가 변형됨으로써 새로운 유전형질을 가진 돌연변이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런 돌연변이들 가운데 일부가 자연환경에서 선택돼 새로운 품종이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GMO(유전자 변형작물,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는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태계 교란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원료로 제조된 식품 역시 안정성에 논란이 있다. 양성자 빔에 의한 품종개량은 원하는 유전형질을 손쉽게 만들면서도 이것이 품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은 철저히 자연에 맡겨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ST - 항공우주소재·부품 내방사선 평가
우주공간에 내보내는 모든 장치들은 우주에 수없이 많이 떠돌아다니는 작은 입자들을 포함한 우주방사선을 맞아도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또한 인간이 우주여행을 하려면 우주방사선을 견뎌내고 막아주는 재료가 필요하다. 이처럼 인공위성과 우주선의 소자는 방사선을 이겨낼 신뢰도와 수명이 지상보다 향상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주와 유사한 조건에서 운전 실험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주공간에서 전자 부품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방사선 중 제일 중요하게 고려되는 입자는 태양으로부터 방출되는 수십-수백MeV의 양성자다. 지상에서 이 정도의 양성자를 얻으려면 가속기가 필요하다. 실제로 우주환경 재현 실험은 세계적으로도 소수의 대형 양성자 가속기를 보유하고 있는 연구기관들에서만 가능하다.
국방 - 폭발물·지뢰·마약 탐지
지금까지 개발된 대부분의 폭발물 탐지기술은 금속을 탐지하거나 매립된 물체의 형상을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정확한 폭발물의 탐지는 결국 그 내부의 폭약을 탐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지만, 현재는 외관의 금속물질을 탐지하는 수준인 것이다.
양성자 가속기를 활용하면 실제로 폭약에 다량으로 포함돼 있는 질소성분을 탐지하는 기술이 가능하다. 질소의 원자핵은 특정 에너지(9.17MeV)의 감마선과 반응하면서 이를 흡수한 다음, 다시 내보낸다. 이때 반사되는 감마선을 탐지하면 폭발물의 크기와 위치를 알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특정 감마선을 다량으로 얻기 위해 양성자 가속기가 동원된다. 가속기를 통해 얻은 1.75MeV의 양성자를 탄소-13 표적에 때리면 9.17MeV의 감마선이 다량으로 방출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