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에 인터넷 게임열풍을 몰고온 김택진 사장. 게임 속에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담겠다는 포부와 과학기술자로서 기업을 이끌어가는 경영철학을 알아본다.
아톰과 마징가 제트에 빠진 한 아이가 있었다. 커서 로봇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그 아이는 어느날 라디오 조립 키트를 받았다. 한참을 뚝딱거린 뒤 드디어 라디오를 완성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얼굴은 밝지가 않다. 로봇에 비해 라디오가 초라했던 것일까.
과학 선택은 재미 때문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라디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원리였지 땜질하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라디오 키트를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지 못한 적이 없을 정도였지만 원리는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 게임열풍의 주역인 엔씨소프트 김택진(35) 사장은 초등학교 1-2학년 무렵의 일을 꺼내며 왜 과학을 공부하게 됐는지를 이야기했다.
라디오 키트에 실망한 김사장이 주위 어른들에게 어떻게 원리를 알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대학에 가라는 것이었다. 김사장은 원리를 배울 수 있는 이공계 대학에 가는 것으로 꿈을 수정했다.
“과학은 너무 재미있는 분야입니다. 저 혼자만 숨겨놓고 즐기기엔 너무 아까워서 청소년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 것을 권하는 것이지, 사회적 혜택이나 가능성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과학이든 인문학, 사회과학이든 어느 분야든 그곳에서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과학을 권하는 것은 어느 분야보다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또 인간적인 치열함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교시절 의대, 법대 진학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물리와 수학이 또 너무 ‘재미’있어 공대로 마음을 굳혔다. 그때 선택한 전자공학은 자신이 새롭게 이룰 것이 너무 많아 보이는 분야였다. 정말 재미있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초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것은 제대로 공부하려면 유학을 가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자공학을 선택한 데에는 좋아하던 물리학에 가장 가까운 공학분야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한다.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김사장은 컴퓨터 연구회 활동 중 1989년 이찬진, 김형집 등과 함께 ‘아래아 한글’을 개발했다.
철학자도 과학 공부해야
“과학은 공학적 성과나 물리학적 현상만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우주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늘날 과학만큼 많은 해답을 주는 분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도 과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사장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떻게 해소하느냐는 질문에 책을 읽는다고 답할 정도로 독서광이다. 어린 시절 단골 동네 책방에서 새로운 책이 오는 대로 모두 섭렵했다. 그래서 한때 커서 서점주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김사장은 독서취향이 매우 광범위해 과학에서 역사, 철학, 시집에 이르기까지 한달에 10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출장중에는 비행기가 주된 독서실이다.
“요즘 독파하려고 생각중인 책은 스티븐 윌프럼의 ‘A New Kind of Science’입니다. 이 책은 DNA나 유전자를 정보라 칭할 때 정보의 의미로 과학을 전부 다시 해석한 책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과학을 공부중이다. 그가 보기에 과학이나 철학, 경영학의 차이는 영어나 한국어의 차이일 뿐이며,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진짜 진리, 즉 패턴을 터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과학은 이러한 근본적 패턴에 가장 근접해있는 분야다.
대학원 시절 이렇게 광범위한 독서를 바탕으로 과학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말대로라면 글재주가 없어 대신 게임을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선택했다.
김사장은 과학을 이야기할 때면 늘 철학, 역사와 연결시킨다.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분야들이지만 엔씨소프트가 개발한 온라인 게임 ‘리니지’가 중세 유럽을 무대로 주인공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왕권을 찾는 신일숙씨의 동명 만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그에게 게임은 과학으로 신화와 철학, 역사를 인터넷 공간에 구현한 것이기 때문.
그가 개발한 리니지는 처음엔 다른 게임들처럼 단순히 서로 투쟁하는 것으로 출발했지만 곧 이용자들이 서로 협동하는 일종의 연합체를 구성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김사장은 이것을 자본주의가 시작된 네덜란드의 초기 주식회사 형태와 흡사하다고 본다. 이렇게 게임이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발전시키면 게임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류의 문화와 역사, 철학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자는 누구나 흥미 있어 하는 신화가 될 전망이다. 엔씨소프는 1-2년 내에 게임에 신화를 대폭 삽입할 계획이다. 김사장은 10-20년 이내 대학입시를 위한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게임이 교육의 주된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상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
1997년 설립된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1천2백47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최근 대만에서 리니지가 ‘천당(天堂)’이란 이름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등과 가정용 게임기용 리니지 개발 협상을 벌이는 등 세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액면가 5백원짜리 주식이 26만원까지 올랐다. 덕분에 김사장은 보유 주식으로 최근 ‘2002년 한국의 1백대 부호’ 21위를 차지했다. 벤처기업가로는 최고 부자다.
“소프트웨어가 처음 나올 때 아무도 여기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게임이 문화와 결합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문화적 경험을 파는 CT(문화콘텐츠기술)산업이 주도할 것입니다. 게임산업은 바로 CT의 주역입니다.”
김사장은 엔씨소프트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경험을 파는 회사”라고 답한다. 이러한 경험은 즉흥적 재미나 혼자만이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형태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올바른 내용을 담아야 하며 이를 통해 게임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사장이 항상 게임의 사회적 의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모님이 해주신 “떳떳할 수 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항상 마음에 새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씨소프트는 특히 투명경영이나 과장되지 않은 정직한 홍보를 강조한다. 또 그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말도 ‘권선징악’이다.
“인간사회란 여섯명만 거치면 다 아는 사람이라는 ‘small world theory’처럼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잠시 세상을 속일 수 있지 영원히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못한 것에 벌을 받지 않으면 내 자식이든, 아니면 사회 ‘동포’든 누군가 피해를 입게 마련이란 말이다.
가십 활성화돼야 배려 생겨난다
엔씨소프트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있다. 문과에서 이과까지 전공도 다양하며 심지어 체계적 교육을 부정하며 독학을 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조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일이다. 김사장이 볼 때 집단이 효율적이려면 우선 소속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부합될 때 생성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것. 특이하게도 김사장은 배려는 가십(gossip, 쑥덕공론)이 활성화될 때 생긴다고 본다. “흔히 연예인이 뭔가를 잘못했을 때 처음엔 나쁘게 이야기하다가 차츰 아주 다양한 이야기, 즉 가십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점점 동정심이 생기고 다시 배려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엔 경제지의 75%, 전문지의 45%가 누가 무슨 일을 했다, 누구는 어떻다는 식의 가십으로 채워져 있다고 봅니다.” 가십을 통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진정한 배려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연말에 ‘수학여행’을 갔다. 직원들 모두 영화 ‘친구’의 제작사에서 교복을 빌려 입고 학창시절 수학여행처럼 기차를 타고 바닷가에 갔다. 모두들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추억의 불량식품을 사오기도 하고, 모범생이었던 사람은 일부러 불량스런 복장을 해보는 등 이야기 거리가 풍성해졌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모르던 면을 알게 되면서 정말 격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당시 반장을 맡았던 김사장은 “지난 연말, 올해 초는 회사가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 들어야 후회 없어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이런 분위기의 회사에 들어가 김사장처럼 되는 꿈을 꾸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김사장은 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한다. 남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듣는 일이란 것이다. 그래야 대학 진학이든, 취업이든 선택에 후회가 없게 된다. 김사장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가슴속에서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잘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학교가 다 감당할 수 없으며, 부모가 스스로 생각하고 내면을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최근 9살, 7살 된 두 아들에게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설명하다가 생명의 역사, 최초의 인간에서부터 과학기술의 발달 등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고 한다. 대화 끝에 놀랍게도 아이들은 “사람이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이를 낳아왔구나. 그렇다면 아버지가 자신들을 낳은 것은 그렇게 또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라는 뜻이고, 그래서 공부를 해야 되는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부모가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진지하게 대해주면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김사장은 먼 훗날 회사를 그만두면 가락국숫집을 하면서 동네 할아버지로 살아가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싶다고 소망한다. 가락국숫집에서 동네 꼬마들에게 과학책을 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할아버지를 만날 날을 기다려본다.
김택진 사장이 걸어온 길
1967년 서울 출생
1985년 대일고 졸업, 서울대 공과대 전자공학과 입학
1985-89년 서울대 컴퓨터연구회 활동. 아래아 한글 공동개발, 한메소프트 설립
1991년 현대전자 인터넷서비스 아미넷 개발팀장
1997년 엔씨소프트 설립
2001년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의 ‘아시아의 스타 50인’, 홍콩의 경제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변화를 주도한 인물 20인’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