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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열풍이 갈수록 거세게 불고 있다. 진학이나 취업 등 우리사회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했을 때 어쩔 수 없는 현상인 듯 싶다. 그러나 영어에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외국인처럼 유창한 수준에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영어를 힘들게 공부하다 보면 두뇌가 굳었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시작했으면 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 생각 때문에 영어 열풍은 점점 나이가 어린층으로 번져가고 있다. 우리말도 서툰 나이에 영어유치원에 다니거나 영어과외를 받고, 해외연수까지 다녀오는 일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나이가 들어서는 새로운 언어를 모국어처럼 배울 수 없는 것일까.

두뇌 통신망은 12살이면 완성

두뇌와 언어의 관계는 아직 상당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언어 습득 과정을 직접 실험하기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사례가 있다.

13세기 십자군 전쟁을 이끈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갓난아이를 밀실에 가둬 10년 넘게 키웠다. 그는 어떤 언어도 접하지 않고 성장하면 신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말할 것이라는 믿었는데, 실제 밀실에서 꺼내진 소년은 언어라 할 수 있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비슷한 예로 늑대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797년 프랑스 아베롱 지방 숲속에서 12살 정도의 나이로 추정되는 소년이 발견됐다. 사람들은 소년에게 빅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말을 가르쳐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빅터는 마흔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기까지 단지 두서너마디의 말밖에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예들은 언어 능력을 발달시켜야 하는 시기가 존재하며, 그 시기를 지나면 결코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theory)이라 한다. 현재 결정적 시기 가설에서는 언어 능력이 생성되는 나이를 6세 전후로 보고 있는데, 이 나이를 지나도록 두뇌가 언어를 접하지 않으면 결코 학습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뇌를 살펴보자(그림).

인간의 뇌는 1.4kg 정도로 자기 몸무게의 2.5%밖에 안 되지만, 전체 에너지의 20% 이상을 사용하는 신경계의 최고 중추다. 인간의 복잡한 사고는 대뇌 피질에서 이뤄지는데, 언어 능력 역시 마찬가지다. 대뇌는 좌우반구로 나눠져 있는데, 오른손잡이의 약 95%와 왼손잡이의 약 70%의 왼쪽 뇌에 언어를 관장하는 언어중추가 있다. 실제 오른쪽 뇌는 공간적 감각에, 왼쪽 뇌는 언어능력에 더 뛰어난 기능을 보인다.

대뇌 피질의 측면을 측두엽이라 하는데, 그 중 브로카 영역이라는 부분이 손상되면 말이 느려지고, 발음이 부정확해진다. 한편 베르니케 영역 부분이 손상되면 유창하게 말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브르카 영역은 언어구사에 필요한 근육조절을, 베르니케 영역은 청각과 관련해 언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결정적 시기 가설은 대뇌의 발달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뇌를 구성하는 1천억개에 이르는 뇌세포를 모두 갖고 태어난다. 이 뇌세포들은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 정보를 교환하는 접속망이 생기고 사라지기도 하는 발달 과정을 거친다. 두뇌의 발달이란 정보를 효율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통신망을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6세 이전에는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의 앞쪽 부분인 전두엽이, 6-12세에는 언어능력을 담당하는 측두엽이 발달한다. 늑대소년이나 청각장애의 경우처럼 언어를 접하지 못하면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뇌부분이 시각이나 촉각으로 용도가 변경돼 버린다. 인간의 뇌는 대략 12세가 지나면 발달을 멈춰 더이상 새로운 통신망이 깔아지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정적 시기 가설은 인간이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특정 시기에 언어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의 조기영어교육 문제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즉 결정적 시기에 우리말뿐 아니라 영어를 함께 배워야 하는가 하는 이중언어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시기 가설을 제창한 미국의 신경생물학자인 에릭 레너버그 박사는 이중언어를 위해서도 역시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6세 전후에는 영어를 배우면 영어 전용망이, 독일어를 배우면 독일어 전용망이 생긴다면서, 이 시기를 놓치면 이런 전용 신경망이 두뇌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코 새로 배운 말을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림) 대뇌의 언어중추^대뇌의 측두엽에 위치한 브로카 영역은 언어구사에 필요한 근육조절을 담당하고, 베르니케 영역은 언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즉 귀를 통해 들어간 말소리는 베르니케 영역에서 해석된 후, 브로카 영역을 거쳐 입으로 표현된다.
 

결정적 시기보다 환경이 중요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2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앙겔라 프리데리치 박사는 나이 들어 배운 언어도 원래 쓰던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프리데리치 박사는 성인 실험자를 대상으로 ‘BRONCANTO’라는 언어를 가르친 후 어떻게 처리되는지 두뇌의 전기적 활동을 관찰했다. BRONCANTO는 공정하게 실험하기 위해 만든 독자적인 문법체계를 갖춘 인공언어다.

연구결과 BRONCANTO를 처리할 때 두뇌는 모국어를 처리할 때와 똑같은 패턴을 보였다. 이중언어에 대한 결정적 시기 가설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뒤엎는다. 프리데리치 박사는 나중에 배운 언어도 원래 알고 있던 언어와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연습에 의해 똑같이 유창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가족이 똑같이 이민을 가더라도 나이든 부모가 어린 자식에 비해 언어를 깨우치는 시간이 늦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 일까. 미국 뉴욕시립대 지셀라 시아 교수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주요사용언어 교체 가설’을 내놓았다. 아이들이 영어를 더 빨리 배우는 것은 어른들이 모국어를 사용하는 동안 학교처럼 상대적으로 영어만 써야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즉 두뇌의 문제라기보다는 주요사용언어가 교체될 수 있는 환경을 가졌는지가 습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걸리는 시간이 다른 이유에 대해 단서를 제공하는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다. 캐나다 맥길대 라셸 메이베리 박사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능력은 뇌의 초기 형성 시기에 어떤 형태의 언어이든지 간에 얼마나 노출됐는지와 상관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네이처’ 5월 2일자에 발표했다.

메이베리 박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어가 아닌 모국어를 들으면서 배운 그룹과 청각장애로 기호 언어를 배운 그룹, 그리고 앞의 두 그룹보다 뒤늦게 언어를 접한 그룹 사이에서 영어를 배우는 능력의 차이를 조사했다. 그런데 앞의 두 그룹은 영어 습득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뒤늦게 언어를 접한 그룹은 그보다 능력이 떨어졌다.

메이베리 박사는 초기 언어 경험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언어와 접촉하게 된 시기가 다른 언어를 배우는 능력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아기 때 우리말을 많이 들려주는 일이,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영어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간의 두뇌발달을 고려했을 때 측두엽이 집중 발달하는 6-12세 사이에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배우는 것은 유리할 수도 있다. 언어와 관련된 뇌세포의 신경망이 좀더 정교하게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이 시기를 지나 영어를 배운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인들이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릴 때 우리말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주 사용해 능숙하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6세 이전의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조기영어교육의 경우는 오히려 위험성이 제기되고 있다. 두뇌에 언어기능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별효과를 거둘 수 없을 뿐 아니라 무리한 교육은 오히려두뇌의 정상적인 발달을 방해한다.

2002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홍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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