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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없는 과학은 무력하다

신학의 시녀에서 즐거운 밀월관계로

흔히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갈등’이나‘전쟁’같은 부정적 단어로 묘사된다. 하지만 종교와 과학은 정말 싸움을 통해 진화해 왔을까. 서양과학이 지나온 역사를 통해 종교과 과학의 진정한 관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1869년 12월 17일 뉴욕의 쿠퍼 유니언 대학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남북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른 전쟁소식을 접해야 했다. 비록 칼 대신 펜으로 싸웠고 영토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그 치열함은 총칼이 난무하는 여느 전쟁 못지 않았다. 다름아닌 과학과 종교의 전쟁이었고, 반갑지 않는 이 소식의 메신저는 당시 코넬대의 총장이었던 37살의 역사학자 화이트였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코넬대 총장이 된 화이트는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학생과 교직원의 선발과정에 신앙검증 절차를 생략했다. 또한 고전교육을 중시하던 다른 대학과는 달리 코넬대를 과학연구의 ‘피난처’로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전쟁이 발발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이 지침이었다. 경건한 뉴욕 시민은 화이트의 선언에 적대감을 표시했고, 많은 성직자는 화이트를 무신론자로 몰아붙였다. 화이트는 이 같은 불만을 해소하고자 강연을 개최한 것이다. 그러나 강연의 내용은 뜻밖이었다. 화이트는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종교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강연내용이 어땠길래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화이트는 강연을 통해 자신의 반대자들은 근대과학을 이끈 베살리우스와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이 등을 박해한 중세의 편협한 사람들에 비유했다. 그는 역사를 통해 종교가 과학을 박해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자신은 과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라고 자청했다. 우선 그는 17세기 과학혁명기의 예로 코페르니쿠스체계에 대한 교회의 핍박을 꼽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데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출간 직후에 임종했기 때문에 겨우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또 이 체계를 신봉한 영국 과학자 브루노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고, 케플러는 신교와 가톨릭 양자 모두로부터 추적당했다. 갈릴레이는 그 유명한 종교재판을 통해 고문당하고 굴욕적인 변절을 통해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또한 16세기 최고의 해부학자였던 베살리우스는 인체해부를 감행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며, 과학에 대한 이 끈질긴 전쟁의 최후 희생자는 코넬대학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단지 과학연구의 자유를 수호하고 교파주의적 지배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목사로부터 비난받고 무신론자라고 낙인찍혔다는 주장이었다.

이때부터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갈등’이나 ‘전쟁’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학자들은 앞다투어 종교가 과학을 핍박한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고, 과학발전은 이런 박해를 헤치고 나온 인간이성의 승리로 묘사됐다.

하지만 종교는 진정 과학발전의 걸림돌이었으며,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정말 ‘투쟁의 역사’였을까.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한 최근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시녀들의 반란

서유럽 역사에서 중세시대의 과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로 잘 알려져있다. 가끔은 양자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분명 신학이 지배적이었다. 신학에 의한 과학의 지배는 아주 강력한 자연철학이 나타나 우주의 구조와 운행에 관한 대안적 해석을 제공하는 경우에만 도전받았다.

중세에는 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이 세속학문에 속했는데, 자연과학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세속학문은 언어와 수리과학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진 7개 교양학문으로 분류됐다. 언어분야는 문법, 수사학, 변증학으로 구성해 3학이라 불렀고, 수리과학 분야는 산수, 기하학, 천문, 음악을 통괄해 4학으로 지칭했다. ‘신학의 하녀’라는 개념은 파리대학의 신학교수이자 가톨릭 성자인 보나벤투라에 의해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는 교양과목들은 신학을 위한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탐구의 목적은 오직 성서해석에 도움을 주는데 있으며, 모든 학문의 목적은 결국 신앙을 공고히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영광되이 하는 것이었다. 4학 즉 과학은 더 높은 학문인 종교와 신학의 요구에 이바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들이 12세기부터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우주와 그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대한 도전이었다. 중세 초기의 자연과학은 수준이 너무 낮아 기독교 전통과 교리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백과사전적이고 일관성이 없어 혼란스럽거나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때까지 자연과학의 내용은 플라톤의 우주론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십자군시대부터 시작된 이슬람권을 통한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재유입은 그때 막 생겨나던 대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활기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돼 있다는 결정론을 부정했으며, 신에 의한 세계창조와 영혼의 존재에 회의적이었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이같은 상황은 신학 집단 내에서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다. 숀 코너리가 연기한 윌리엄 신부는 프란체스카 수도원의 연쇄살인 사건을 조사하면서 살인의 동기가 도서관 깊숙이 간직돼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저술이었음을 밝힌다. 기독교 전통과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은 철저히 유폐됐던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대학의 학자와 일부 진보적 신부들은 몰래 이를 연구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가톨릭 당국은 급기야 1270년과 1277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중 신학의 교리와 어긋나는 부분을 찾아 신학적 유죄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결국 이 유죄판결은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에 대한 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유죄 판결은 특정 입장의 과학적 사색에 대해 신학적 규제를 가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도리어 문호를 개방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영향을 받아 크게 변했다. 이같이 중세를 통해서 신학과 과학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 우위를 보였다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갔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의 그림‘아테네 학당’. 학 당에 54명의 인물이 표현돼 있으며 대부분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 자들이다. 중세에는 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이 세속학문에 속했는 데, 수준이 낮았던 자연과학 역시‘신학의 하녀’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단죄된 또다른 이유

1543년 폴란드 북부의 가톨릭교회 행정가였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밀어내 일개의 행성신분으로 되돌리는 태양중심우주론을 제안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보수적 종교세력에 의해 이런 생각은 즉각적으로 억압됐다고 설명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성서 본문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는 이와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수리천문학자를 위해 쓰여진 것이고, 따라서 이 공동체 외부에서는 거의 이해되지 못했다. 최초의 대중적 반응은 독일 비텐베르크 루터란대의 천문학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가설이 지닌 수학적 발전을 인정해 그것을 수학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구가 실제로 움직인다는 근본적 주장은 축소하거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지구운동에 반대하는 그들의 근거는 과학적이면서 신학적인 것이었다. 태양중심설은 명백하게 상식적인 물리학적 직관에 위배될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원리들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태양중심설은 1610년, 갈릴레이에 의해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갈릴레이는 태양중심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갈릴레이가 살았던 16세기말의 유럽사회는 종교의 대격변기였다. 기존의 가톨릭은 개신교의 도전에 대응해 점점 보수적, 권위적으로 변해갔다. 권력은 중앙집권화되고, 종교적 교리의 경계심은 더욱 증가했다. 가장 민감한 사항 중 하나는 성서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왜냐하면 오직 교회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가톨릭의 입장을 개신교는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집단은 정면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반란을 잠재울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레이가 태양중심설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그는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면서 그 증거로 망원경 관측결과만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유롭게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을 도입해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가 이단이라고 낙인찍힌 진정한 이유는 성서의 주장과 대립해 충돌하는 과학적 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서의 올바른 해석을 둘러싸고 가톨릭교회의 내적 논쟁을 자극한 모호한 과학적 증거였다. 갈릴레이는 지구의 운동을 확증할 만한 결정적 과학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논쟁에서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은 갈릴레이를 희생시켜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개신교에게 따끔한 ‘본보기’를 보였던 것이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 의 중심이 아니라 일개 행성에 불과하 다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했다.



신이 설계한 ‘세계라는 기계’

많은 학자들은 과학과 종교의 상호작용이 가장 활발했던 예를 17세기 영국에서 찾고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많은 청교도들이 열심히 과학을 육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수도원적 금욕주의와 물질의 가치를 무시하는 풍토 때문에 자연에 대한 연구를 경멸했다. 더욱이 중세학자들은 과학을 마술과 결부된, 완전히 불합리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청교도적 기풍을 통해 과학적 연구에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자연과학을 수용할 만한 학문이라 생각했고, 과학자를 불미스러운 직업인이 아니라 건전한 직업인으로 바라봤다. 이로써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재능을 과학적 탐구를 위해 적극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향은 보일과 뉴턴같은 과학자에게서 잘 나타난다. 뉴턴을 유명하게 만든 역학, 광학, 미적분학 등의 업적은 모두 그의 20대 짧은 기간 동안 이뤄진 것이며, 뉴턴의 나머지 일생 대부분은 연금술 연구로 채워졌다. 그는 자연이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을 설명한다고 확신했고, 이런 믿음에 따라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입자를 연구했다. 뉴턴이 살던 시기에 물질세계의 규칙성을 파악하는 학문적 수단은, 현대화학의 근간이 된 연금술이었다. 따라서 그는 연금술 연구를 통해 물질이 생성되고 변하는 기본원리를 파악해 신의 섭리도 깨닫고자 했던 것이다. 뉴턴의 이같은 생각은 18세기 라플라스를 통해 더욱 정교한 형태로 나타난다. 라플라스는 기존의 신학이 갖고 있던 자연에 대한 조악한 설명을 모두 거부했다. 새롭게 밝혀지는 천문학 연구를 통해 태양계의 안정성뿐 아니라 그 기원을 기술하는 물리학적 설명들이 속속 제기됐다. 더이상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필요없었다.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는 기적을 통해서만 설명되던 많은 현상이 과학자에 의해 해명되기 시작했다. 라플라스는 모든 현상에 개입해 일일이 사건을 주관하던 신의 개념 대신, 자연을 설계한 신적 설계자로서 하나님을 규정했다. 즉 신은 원활히 운행되는 ‘세계라는 기계’(world machine)를 만든 후 그대로 방임하고 있는 ‘신적 설계자’(Divine Architect)로 생각됐다. 여기서 인간의 의무는 신이 만든 기계의 운행법칙을 찾아 신의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렇듯 17-18세기를 통해 과학은 자신의 발전을 정당화할 근거를 신학에서 찾았고, 신학은 시대의 요구에 맞게 적절히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 신학과 과학의 즐거운 ‘밀월’이 진행됐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하 는 방법을 도입했기 때문에 탄압받았다.



상생의 새지평 열어야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변모된다. 과학은 더이상 신학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변화의 출발은 지질학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초까지 지질학은 지구의 역사를 성서로써 설명했다. 그 근거가 된 학설이 ‘대홍수설’이다. 대홍수설이란 지구의 역사를 성서에 기초한 모세의 역사로 설명하며, 지질 변화 원인을 대홍수같은 격변적 사건으로 해명하려는 지질학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모세의 홍수같은 대격변을 겪었고, 이를 시간적으로 추정해 지구 나이를 계산하면 약 6천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홍수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됐다. 19세기 내내 지구 과거시대의 화석이 많이 발견됐는데, 화석의 연대를 조사한 결과 6천년보다 훨씬 오래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질학자들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균일설’이론을 도입한다. 균일설이란 지질의 변화를 지구 내부에 균일하게 작용하는 어떤 힘으로 설명하는 지질학 이론으로, 대홍수설의 많은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고생대와 중생대의 화석이 시간순으로 쌓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으며, 지구의 실제나이도 6천년보다 훨씬 오래전으로 계산했다. 당연히 신학에 기초한 대홍수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논쟁은 19세기 내내 진행됐는데, 이전처럼 과학과 종교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지 않았다. 이 논쟁에 대해 영국의 지질학자 라이엘은 ‘모세로부터 과학을 해방시키자’라는 말을 통해 신학과 분리된 과학 자체를 위한 지질학을 역설했다.

신학을 배제한 과학의 독자적 길은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면서 정점을 맞았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주장은 많은 종교인과 심지어 과학자에게도 충격을 줬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도발적 주장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기독교와 과학의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인간의 기원논쟁은 창조론과 과학의 싸움을 거쳐 20세기를 지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19세기를 거치면서 과학과 신학은 대체로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둘의 관계는 한쪽이 어느 하나를 구속하는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방향이었다.

최근에는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새롭게 재개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첨단과학의 눈으로 종교를 이해하며 종교의 윤리적 측면을 통해 현대과학의 폐해를 줄이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월 18일부터 22일까지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던 ‘과학, 신학, 그리고 동양종교들’의 워크샵은 매우 의미있는 행사였다. 강남대의 김흡영 교수가 주관한 이 행사에는 국내·외 종교학자와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존의 과학과 종교의 대립적 관계를 극복하고 상생적 관계를 모색하는 방안들을 제시했다.

어쩌면 과학과 종교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종교 없는 자연과학은 무력하고, 자연과학 없는 종교는 눈먼’것 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해 밝혀졌듯이 현대의 과학과 종교도 대립과 갈등 넘어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행복한 만남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2002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대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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