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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해진 승부 무너진 스포츠맨십

거친 운동일수록 도덕성 떨어져

온갖 추태로 얼룩진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스포츠의 도덕성을 뒤돌아보게 한다. 현대 스포츠에 스포츠맨십이 과연 존재할까. 선수들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싸우며, 자신을 이긴 상대방을 축하해줄까. 또 사회에서도 일반인보다 더욱 페어플레이를 할까.

 

이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 자 1천m 결승 장면. 미국의 오 노 선수(왼쪽 앞)가 넘어지면 서 한국 안현수 선수의 진로를 방해했으나, 미국 언론은 안선 수를 비난했다.
 


이번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스포츠맨십과 거리가 먼 각양각색의 행위가 있었다.

뛰어난 경기를 펼친 팀이 실수를 저지른 팀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후 심판들의 담합 의혹이 제기되자 공동 금메달이 결정됐다. 또 경기 전 금지약물 복용으로 의심되는 혈액검사 결과를 늦게 통보 받아 출전자격이 박탈된 선수의 국가가 대회 도중 선수단 전체를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주최측에서 사과했다. 이 외에도 황당한 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특히 쇼트트랙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당한 각종 ‘테러’는 온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중국선수의 공격적 반칙으로 넘어졌지만 구제되지 못한 김동성 선수의 남자 1천m 경기나, 1위로 골인했지만 미국선수의 진로방해 판정을 유도하는 과장 제스처에 금메달을 박탈당한 김동성 선수의 남자 1천5백m 경기는 도가 지나쳤다.

근대올림픽이 시작되면서 스포츠 참여와 신체적 운동은 사람의 도덕적 성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져 왔다. 그래서 인격형성에 신체운동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회구조의 변화와 스포츠의 변형은 이 오랜 믿음을 한번 돌아보게끔 한다.


공격성 아닌 아이스하키 보디체크

공격성향은 스포츠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전쟁터를 제외하면 사람 간의 공격성이 용납되거나 심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격렬하게 응원받는 것이 바로 스포츠일 것이다. 공격성이란 특정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상대방을 해하는데 목적이 있는 호전적 공격성이다. 다른 하나는 도구적 공격성인데,상대방을 해함으로써 결국 경기에서 승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공격성과는 별도로 상대방을 해하려는 의도 없이 목적을 성취하려는 과격한 행동이 있는데, 이를 독단성이라고 한다. 럭비에서 태클을 하거나, 아이스하키에서 보디체크를 하거나 야구에서 홈으로 돌진하는 것과 같이 규칙 내에서 악의없는 행위는 독단성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규칙이 허락하는 행동이더라도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이 또한 공격성으로 본다.

관중들 또한 공격적 성향을 갖는다. 말로나 행위로나, 또는 물건을 집어던짐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공격성향을 표현한다. 응원도 마찬가지다. ‘붉은 악마’의 목이 터져라 하는 응원 또한 상대방에게는 공격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운동장은 공격성향으로 충만하다.

스포츠에서 특히 강조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경쟁이다. 경쟁에는 당연히 공격성이 뒤따른다. 또 경쟁 후에는 어떤 형태로든 보상이 있기 마련이다. 승리했을 때 쾌감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 경제적인 이득과 명예까지 얻는다. 이런 보상은 다시 공격적인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동기를 부여한다. 경쟁이 공격성을 부추긴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패자에겐 견디기 힘든 결과가 찾아온다. 패배에 대한 쓰라림을 알기에 선수들은 이기기 위해 약간의 눈감음만 있다면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갈등한다. 그래서 승리를 위한 경쟁은 때론 불합리하게 이뤄지기도 한다. 실제로 한 연구에 의하면 선수들에게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는 것을 강조하며 훈련시켰을 때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고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더 쉽게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주의냐 처벌이냐 환경에서 배워

본질적으로 공격성은 사회환경적 배경을 통해 배운다. 시합에서 선수들은 상대방에게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런 피해가 결국에는 승리라는 보상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선수들의 공격적 행위가 용납되고 한술 더 떠서 보상까지 받는다면 선수들은 다시 공격성을 나타낼 것이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이 배우고 익힌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승리가 보장되는 것을 배운다. 반대로 다른 선수들이 특정 행위로 인해 제약받는다면 섣불리 공격적 행위를 보이지 않는다. 승리에 대한 선수들의 가치규정과 변화는 철저하게 주위 환경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야구에서 투수가 타자에게 위험한 공인 빈볼을 던진다. 약간 위험한 빈볼에 주심이 그냥 넘어간다. 투수는 다시 빈볼을 던진다. 아슬아슬하게 타자에게 맞을 뻔한다. 이번엔 주심이 두가지 중 하나의 결정을 내린다. 하나는 주의만 줄 뿐 이렇다 할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수를 바로 퇴장시키는 것이다. 주의만으로는 이 투수는 물론이고 다른 투수들까지 빈볼에 대한 여유로움을 갖게 된다. 필요하다면 빈볼성 투구를 던짐으로써 타자를 위협할 수 있는 소지가 남는 것이다. 퇴장이라는 결정으로 엄중한 처벌을 한다면 웬만해서 투수들은 빈볼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행위에 대한 엄중한 질책은 선수들의 공격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팀 정신도 마찬가지다. 코치나 환경이 팀을 어떻게 이끄는가에 따라 팀의 성격도 달라진다. 냉전주의 시대에서는 이런 팀 정신의 극단을 볼 수 있었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 동구권의 국가들은 다른 국가에 비해 팀과 국가라는 모토를 중요하게 여겼다. 개인의 가치보다는 전체의 가치를 중시했다. 전체를 위해서는 개인의 욕심까지 억눌러야 했다. 그래서 분출하고 싶은 개인의 욕심까지도 팀이라는 창구를 통해 폭발력있게 터뜨렸던 것이다.

선수의 성향은 지도자와 심판, 그리고 관중의 반응과 제재가 중요하다. 불공정한 언행으로 경기에서 이기려는 시도를 주위 환경에서 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하석주 선수가 퇴장 명령을 받는 모습.



청소년기 스포츠 경험 중요

스포츠에는 다양한 형태의 경쟁이 존재한다. 개인경기, 팀 경기, 기록경기가 있는가 하면, 상대방과의 접촉을 통해 상대적 우월성을 겨루는 경기도 있다. 그렇다면 종목에 따라 선수들의 도덕성과 사회성이 다를까. 충분히 그렇다. 예를 들어 사격이나 양궁선수들은 시간 제한과 규칙 준수에 철저하다. 조금이라도 선을 넘거나 시간을 초과하면 바로 실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목의 선수들은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한다.

축구나 농구를 보자. 심판에 따라 주관적인 평가가 가능하고, 공격성의 위험수위를 다르게 판단하며, 그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선수들은 상황에 맞춰 공격성의 수위를 조절한다. 그리고 선수들은 습관적으로 이런 상황을 판단한다. 습관적인 상황판단은 특히 어릴 때의 경험에 많이 의존하는데, 그래서 청소년기는 사회적 경험과 스포츠 경험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시기다. 종목에 따라 선수의 가치관 설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스포츠와 도덕성의 발달에 대한 연구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몇 연구들은 주목할 만하다. 코치들에게 자신이 가르치는 선수들에 대해 평가를 맡긴 다음 조사했더니, 운동중에 공격성이 높게 평가된 선수들은 그렇지 않은 선수들에 비해 도덕성이 높지 않았다. 반면 높은 도덕성을 가진 어린 선수일수록 더 독단적이지만 공격성은 떨어졌다. 또한 접촉이 많은, 즉 격렬한 몸싸움이 필요한 운동을 하는 어린 선수들일수록 도덕적 사고가 상대적으로 낮으면서 공격적 경향을 보였다.

또다른 실험을 보면, 어린 선수들에게 스포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몇몇 위험한 장면의 슬라이드를 보여줬는데, 도덕성이 낮은 어린 선수일수록 이를 정당하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남자선수들이 여자선수들에 비해 더욱 공격적이었다고 한다.


선수의 행위는 모두의 책임

스포츠는 사회의 거울과 같다. 공격적 행위의 강도나 빈도는 바로 그 사회를 대변한다. 선수들이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해 승리를 꾀한다면, 그리고 그런 선수들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그 사회의 잘못된 분위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스포츠가 도덕성과 사회성을 키우는 수단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말은 옛말이 됐는지도 모른다. 이젠 스포츠활동 자체가 목적이 됐다. 이기고, 잘하고, 자신의 가치를 잘 관리해야 많은 돈을 모을 수 있고 그것이 다시 좋은 선수의 조건이라는 관념으로 모든 선수들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최초의 올림픽 수영시합은 어땠을까. 배를 타고 나가 바다 한가운데서 선수들을 떨어뜨리고 일정 지점까지 누가 먼저 헤엄쳐오는가 하는 좀 우스꽝스러운 방법으로 치러졌다. 물론 정밀도를 요하는 기록 측정도 하지 않았다. 뭘 몰라서도 그랬겠지만, 그만큼 미세한 차이로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백분의 1초, 심지어 1천분의 1초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지금과는 천양지차다.

현대의 스포츠를 돌아보면 점점 더 규칙과 규정이 복잡해지고 그만큼 말도 많아지고 있다.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기려는 선수들과 이런 행위를 막아보려는 소위 주최측(물론 정직한 경우)과는 항상 실랑이가 벌어진다. 점점 더 격해지는 선수들의 공격성과 비윤리적인 행위가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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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이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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