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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1회 탐사로 밝혀진 절반의 이력서 수성

낮과 밤의 온도차 6백℃ 태양계 최고

수성은 단 1회의 탐사를 통해 전체표면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정보를 얻었다. 수십회의 우주탐사를 통해 90% 이상의 상세한 지도를 가진 금성이나 화성에 비하면 초라한 결과다. 하지만 그전 수세기 동안 지상에서 수집한 정보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수성은 수메르시대부터 존재가 알려진듯 하나 눈부신 태양에 가려 관측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처음으로 기록을 남긴 이는 슈로에테(1745-1816)다. 그는 표면에 관한 스케치도 남겼지만 그림이 명확하지 않다. 비교적 분명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스키아파렐리와 퍼시벌 로웰이다. 이들은 화성 표면에서 ‘운하’를 목격한 것으로 유명한데, 역시 수성 표면에서도 운하 같은 것을 목격했다.

특히 스키아파렐리는 열악한 관측을 바탕으로 수성이 달처럼 자전과 공전의 주기가 같은 행성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선탠할 기회가 없이 영구한 어둠으로 덮인 반대쪽은 태양계에서 가장 차가운 곳일지도 모른다고 천문학자들은 여겼다. 전파망원경이 만들어지자 1961년 수성을 향해 안테나를 맞췄다. 그런데 태양계에서 가장 차가울 것으로 예상된 수성의 밤 부분에서 금성에서 나오는 것 같은 뜨거운 전파잡음이 포착됐다. 열기를 가진 수성의 밤은 그때까지의 생각을 뒤엎는 것이었다.

이 미스터리의 해답은 곧 밝혀졌다. 1965년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거대한 아레시보 전파망원경을 이용해 자전시간을 측정했다. 수성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자전하고 있었다. 측정된 주기는 59일. 수성은 태양에 의해 고르게 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상에서 밝힐 수 있는 수성에 관한 모든 것이었다. 더이상의 정보를 얻기에 수성은 태양에 너무 가깝고 매우 작은 행성이었다. 수성은 우주탐사가 필요한 행성이었다.
 

수성의 궤도에 진입해 본격적인 수성탐사를 펼칠 예정인 메신 저 탐사선.



최초로 행성 중력 이용한 탐사선

수성은 태양에 너무 가까워 탐사선을 보내기에도 까다로웠다. ‘논스톱 수성행 탐사선’을 보내려면 비싼 타이탄급의 로켓이 필요했다. 유인달탐험과 화성탐사에 대부분의 예산을 책정했던 미항공우주국에게 수성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러시아 또한 까다로운 이 행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의 경우 저비용의 탐사방법이 있다면 고려해볼 참이었다.

해답은 LA소재 캘리포니아대(UCLA)의 졸업생 미카엘 미노비치로부터 나왔다. 행성궤도를 조사하던 그는 1970년이나 1973년 금성까지만 탐사선을 보낸다면 10년에 한번 이뤄지는 금성과 수성의 절묘한 배치에서 금성의 중력을 이용해 공짜로 수성과 조우할 수 있다고 계산해낸 것.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금성으로부터 원하는 지점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탐사선은 수성에서 엄청나게 빗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례 없이 정확한 항해가 요구됐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두 행성을 더블 데이트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우주 역사상 가장 경제적인 프로젝트가 이뤄지는 것이다.

1968년 미국은 금성·화성탐사선 마리너를 개조해 금성과 수성을 탐사하는 ‘MVM 73’ 계획을 수립했다. 발사연도는 1973년이며 예산 절감을 이유로 단 한대의 탐사선만을 발사하기로 했다. 대안은 없었고 한번에 완벽히 성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탐사선은 수성 공전주기의 두배인 1백76일 주기로 태양궤도를 돌게 돼 수성을 계속 방문할 수 있었다. 마리너 10호로 명명된 수성탐사선은 달의 10배나 되는 태양방사능과 열기로부터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우산형 방어막을 장착했다. 2대의 TV용 카메라도 새로이 개발됐다.

1973년 11월 발사된 마리너 10호는 1974년 2월 무사히 금성의 도움을 받아 1974년 3월 처음으로 최종 목표지인 수성에 7백3km까지 근접해 사진을 보내왔다. 6개월 후에는 태양을 돌아 1974년 9월 4만8천km까지 접근했다. 탐사선은 메모리장치와 조정장치 고장 등으로 임무를 포기할 정도의 중환자였지만 1975년 3월에는 3번째로 3백27km까지 근접하는데 성공해 고해상도 사진과 자기장 정보를 보내왔다. 그후 자세 조정용 추진제가 완전히 소모돼 통신이 두절됐다. 하지만 그 동안 보내온 수성의 독사진은 무려 8천여장.


1백76일이나 되는 하루

마리너 10호가 보내온 정보는 과학자들에게 놀라움과 함께 다소 실망감을 가져다줬다. 수성의 모습은 예상치 못한 것이기는 했지만 익히 봐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보내온 사진은 달의 지형과 판박이였다. 수성은 크레이터(운석충돌구덩이)로 뒤덮인 황량한 달의 모습이었다. 그곳은 지구에서보다 2.5배나 큰 모습의 태양으로부터 뿜어지는 열기로 낮에는 4백67℃나 됐다. 반면 밤에는 -1백83℃에 이르렀다. 온도차는 무려 6백℃ 이상이다. 태양계 최고의 온도차다. 느린 수성의 자전속도(58.65일) 때문에 수성에서 해가 뜨고 지는 ‘하루’를 기다리려면 1백76일이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수성에서 ‘하루 생존하기’는 아마 미래에 ‘태양계 기네스’가 생긴다면 단연 돋보이는 종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외모로 수성을 판단한다면 금물. 수성의 내면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부는 달보다 지구에 가까웠다. 내부에는 달 크기 만한 거대한 철-니켈 핵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달에는 없는 자기장이 발견됐다. 물론 그 세기는 지구 자기장의 겨우 1%에 불과하다. 그럼 위성도 있을까. 1974년 4월 1일 마리너 10호로부터 온 자료에서 위성을 발견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해프닝에 불과했고 위성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언론은 이 사건을 ‘마리너의 만우절 조크’로 불렀다.
 

1920년대 천문학자 안토니아디(1870-1944)가 당시 최고 성능 의 망원경으로 관측한 수성 표면. 그후 50년 간이나 사용된 가 장 뚜렷한 수성 지도였지만, 광학적인 허상에 불과했다.


탐사로 새롭게 발견된 수많은 크레이터에는 이름이 필요했다. 수성은 달이나 화성의 경우와는 달리 아무도 표면을 본 적이 없어 작명이 쉬울 것 같았으나 논란은 있었다. 과학자나 천문학자의 이름은 이미 다른 행성에 사용됐기 때문에 도시에서부터 새의 이름까지 새로운 명명법이 제시됐다. 국제천문연맹(IAU)의 수성지형명명위원회는 1년이 넘는 격론 끝에 인류의 문명발전에 기여한 예술가들의 이름으로 낙점했다. 어울리진 않지만 반 고흐, 베토벤 등의 이름이 뜨거운 수성의 세계에 새겨졌다.

단 1회의 탐사로서 밝혀진 수성의 이력서에는 아직 빈칸이 많다. 비록 3회의 방문이었지만 마리너 10호는 수성의 40% 밖에 관측하지 못했다. 나머지를 알기 위해서는 수성의 궤도를도는 탐사선이 필요하다. 2004년에는 메신저(MESSENGER)라는 조사원이 30년 만에 다시 파견될 계획이다. 메신저는 마리너 10호처럼 금성 중력의 도움을 받아 수성을 2회 방문한 후 2009년부터는 완전히 수성의 궤도에 진입할 예정이다. 메신저는 지구시간으로 12개월 정도 수성 최초의 위성으로 있으면서 우리가 모르는 나머지 절반의 이력서를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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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정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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