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생각보다 정적인 운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야구장에서 커다란 움직임이 멈춘 그때에도 은밀한 몸놀림과 불꽃튀는 두뇌활동이 일어난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사인이다. 제2의 언어 사인을 만나보자.
야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야구를 ‘느려터진’ 경기라고 비판한다. 실제 올해 상반기 국내 프로야구나 미국 메이저리그의 평균 경기시간은 3시간이 넘었다. 야구경기 자체도 농구나 아이스하키에 비하면 움직임이 느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야구경기에서 치고 달리는 활동이 멈춰 있다고 해서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구와 투구 사이에 각 팀에는 수많은 몸놀림과 두뇌회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바로 사인이다. 그들만의 언어 사인의 실체를 알아보자.
간단하면서도 복잡해야
사인은 투수와 포수 사이에 어떤 공을 던질 것인지를, 그리고 타자와 주자, 코치 사이에는 치고 달리기와 같은 작전을 어떻게 펼칠 것인지를 놓고 미리 정한 약속이다. 사인은 야구장에서 말을 대신하는 그야말로 ‘제2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언어는 사인과 같은 제스처에서 기원했다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실험결과도 발표된 적이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발성기관보다 먼저 진화했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초보적인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호모 에렉투스는 1백80만년 전에 등장했지만 현생인류에게 발성기관이 나타난 것은 불과 10만년 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스처든 발성이든 뇌에서 이를 처리하는 부분은 왼쪽뇌의 앞쪽에 위치하는 전두엽이다. 말과 수화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자가 수화를 할 때도 좌측전두엽이 말을 주고받을 때처럼 활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수비하는 팀이나 공격하는 팀에서는 두뇌, 특히 좌측전두엽이 불꽃튀도록 활동하며 은밀한 제스처를 주고받는 셈이다. 이처럼 야구경기에서 선수들이 주고받는 사인은 자기편끼리 헛갈리지 않을 만큼 간단하면서 상대편에게 쉽게 들통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해야 한다. 물론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변수가 많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진출한 투수 정민태 선수는 한국보다 훨씬 복잡한 포수 사인 체계 때문에 적응하는데 고생했다고 한다.
‘손가락 하나’라고 다같지 않다
올해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은 국내외에 많은 화제를 뿌렸다. 단연 화제의 중심에는 박찬호가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올스타전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2천6백32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는 41세의 철인 칼 립켄 주니어에게 초구에 홈런을 맞았기 때문이다. 국내외 매스컴은 곧바로 “일부러 홈런을 허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박찬호는 “변화구를 던지려 했는데 포수가 직구 사인을 내 그냥 던졌다”고 해명했다.
사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역시 투수와 포수 사이에 오가는 것이다. 먼저 사인의 기본을 알아보자. 보통은 포수가 무릎 사이에 한손을 놓고 손가락을 펴서 투수에게 사인을 보낸다. 손가락 하나는 직구, 둘은 커브, 셋은 슬라이더, 넷은 체인지업(공을 느슨하게 잡고 던져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느린 공), 그리고 다섯은 투심이나 SF볼(집게손가락만을 공 위쪽으로 놓고 던지면서 뒤로 회전을 주는 변형 직구)이라고 정한다.
이 정도가 전부라면 투수의 공은 상대편에게 쉽게 노출될 것이다. 사실 주자가 투수 뒤쪽인 2루에 나가면 포수가 아무리 쪼그려 않은 채 사타구니 사이에서 사인을 낸다 하더라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인을 복합적으로 만들게 되고, 포수가 손가락을 여러번 오므렸다 폈다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는 여러번 손가락을 폈지만 맨처음이나 맨마지막에 나온 사인이 진짜라고 정한다. 아니면 처음 펴는 손가락이 다음에 몇번째 나오는 사인이 진짜라는 의미로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포수가 손가락을 둘, 셋, 하나씩 차례로 폈다고 하자. 처음에 ‘손가락 둘’은 다음에 나오는 사인 중에서 두번째 사인이 진짜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포수가 투수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손가락 하나’인 직구를 던지라는 것이다.
LA 다저스의 기둥투수 박찬호 선수는 포수와 좀더 색다른 방법으로 사인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처음에 일단 투수가 특별한 사인 없이 직구를 던진다. 그러면 이것이 포수가 내는 사인의 규칙이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포수가 내는 사인 중에서 직구 사인 다음에 나오는 사인이 투수가 던질 다음 공이라는 식으로 미리 결정해놓는다. 예를 들어 포수가 손가락을 다섯, 하나, 둘, 셋씩 잇달아 폈다고 하자. 그러면 직구 사인인 ‘손가락 하나’ 다음의 사인인 ‘손가락 둘’이 진짜 사인이 되는 것이다. 박찬호가 다음에 던질 공은 바로 커브다.
훔치기 vs 역이용하기
야구에서 항상 골칫거리로 등장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사인 훔치기다. 올해도 어김없이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 이슈로 등장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지난 5월 해태 타이거즈가 삼성 라이온즈와 3연전에서 모두 이기자 삼성측에서 해태측이 사인을 훔쳤다는 주장을 제기했지만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좀더 심각했다.
올해 초 미국에서는 50년만에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가 브루클린 다저스(현 LA)를 꺾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에 오른 것이 사인 훔치기의 결과라는 사실이 밝혀져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자이언츠 불펜포수(경기장 밖인 불펜에서 연습하는 포수, 현재 메이저리그 불펜은 외야석과 내야석 사이의 통로에 위치하지만 전에는 펜스 근처에 있었다)였던 살 이바스에 따르면 자이언츠가 외야 중앙에 고성능 망원경을 설치해 상대포수의 사인을 훔치고 이를 전기 버저로 덕아웃에 신호를 보낸 뒤, 다시 불펜포수에 중계해 타자에게 공의 구질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일본에서는 긴테스 버팔로즈가 기록원과 짜고 사인을 훔쳤다고 해서 징계를 받기도 했다.
사인 훔치기. 실력 이외의 요소로 상대편을 이기려는 행동은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을만하다. 그렇다면 사인 훔치기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상대편이 사인을 안다는 사실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투수가 자기편의 사인이 상대편에게 간파당한다고 느낀다면 포수와 주고받은 사인과 다른 공을 던진다. 예를 들어 타자가 다음 공으로 커브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자. 하지만 실제로 들어온 공이 몸쪽 직구라면 꼼짝없이 서서 당할 것이다.
사인을 매 이닝, 또는 매 투구마다 바꿀 수 있고, 미리 몇개의 공을 정해놓고 던질 수도 있다. 아니면 상대편에게 사인을 바꾼다고 시위해놓고 실제로는 바꾸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투수가 적절한 제스처를 덧붙여 상대편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투수가 포수의 어떤 사인을 보고 싫다는 의미로 계속 머리를 흔든다면 타자는 간파한 사인과 다른 구질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투수는 그냥 머리를 흔든 것이고 사인대로 공을 던진다면 타자를 비롯한 상대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양발 벌렸을 때만 유효하다
타자와 주자는 주로 코치와 사인을 교환한다(중요한 시점이라면 벤치에 앉아 있는 감독이 직접 사인을 내기도 한다). 타자는 공을 칠 것인지, 또는 번트를 댈 것인지를, 주자는 뛸 것인지를 사인으로 판단한다. 물론 돌아온 바람의 아들 이종범 선수처럼 발이 빠르고 판단이 정확하다면 사인 없이 1루에서 2루로 바람처럼 뛸 수도 있다.
보통 이런 사인은 간단한 제스처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코를 만지면 공을 치지 말고 기다리라는 사인으로 정할 수 있다. 아니면 맨살끼리 만나는 경우를 기다리라는 사인으로 정할 수도 있다. 이때에는 손으로 코를 만지거나 손뼉을 쳐도 이 사인이 나온 것이다. 사인이 너무 단순하다면 사인을 좀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이른바 사인의 예비동작을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발을 벌렸을 때 내는 사인만 유효하다고 미리 약속했다면 양발을 모았을 때 나온 사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러면 상대편이 사인의 패턴을 쉽게 알지 못한다.
사인을 받는 선수의 행동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노아웃에 1루에 주자가 있다고 하자. 이때 공격하는 팀에서는 1루 주자를 2루에 보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타자에게 번트를 대거나 치고 달리기를 하든지, 아니면 주자에게 도루를 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루 주자가 평소보다 지나치게 코치를 오래 쳐다보고 있다면, 이 순간 상대편은 사인의 내용을 정확히 몰라도 뭔가 작전이 떨어졌다고 간파하고 적당히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선수는 사인이 나오지 않았을 때나 나왔을 때나 똑같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평상시 1루 주자로 나가면 열심히 1루수와 떠들던 선수라면 사인이 나왔을 때라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면 안된다.
선수가 사인을 잘못 알거나 취소사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팀은 큰 낭패에 빠진다. 박찬호 선수가 포수와 약속한 사인을 잘못 알고서 연속으로 폭투를 범한 적이 있다. 포수는 사인과 다른 공이 들어오면 대처하기 쉽지 않고, 더욱이 스트라이크존에서 많이 벗어나는 공이라면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번트사인이 났는데 갑자기 상대편 수비위치가 바뀌어 취소사인을 다시 냈다고 하자. 1루 주자는 취소사인을 제대로 보고 전혀 뛸 생각을 안했는데 타자가 번트를 댄다면 1루 주자는 허겁지겁 2루로 뛰어가야 하고 잘못하면 비명횡사할 수 있다.
사인을 제대로 전달받기 위해서는 끝까지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가끔 중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무언의 사인보다 대화로 다음에 해야 할 일을 확인한다. 예를 들어 감독이 타자를 불러서 귓속말을 하기도 하고, 점수를 내줄 위기상황이라면 수비수가 모여 어떻게 수비할지를 재차 이야기한다.
사인과 관련된 또하나는 콜플레이다. 가끔 높이 뜬 공을 수비수가 서로 잡겠다고 하다가 부딪쳐 결국 공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내가 잡겠다’는 말을 하는 콜플레이다. 하지만 관중이 많아 시끄러운 경우라면‘내가 잡겠다’는 말이‘네가 잡아’라는 말과 구별될리 없다. 따라서 무조건 어떤 소리를 지르는 선수가 끝까지 책임진다고 미리 약속한다면 혼란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