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은 어떤 관계인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상반되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것을 수행하는 사고적 측면에서는 매우 유사하다. 논리성과 객관성이 유사함의 한축이고, 상상력과 자유로움이 유사함의 또다른 한축일 것이다. 문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학과 철학을 관통하는 사고의 이 두가지 유사성이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17세기 베이컨(F. Bacon)에서 출발했던 경험주의와 귀납주의로부터 20세기 초반 비엔나 학파(Vienna circle)의 실증주의와 포퍼(K. Popper)의 반증주의는 모두 철저하게 철학적 논리성에 기초해 이른바 ‘과학적 방법론’을 찾고자 했던 노력의 과정이었다.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도전
눈부신 과학 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과학은 왜 다른 학문보다 우월한가. 과학자들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방법론은 무엇인가. 그들이 사용한다고 믿고 있는 방법론은 철학적으로 타당한가. 과학적 발견으로 이끄는 특별한 과정은 존재하는가. 그러한 과정이 있다면, 어떻게 습득할 수 있는가. 이런 주제가 20세기 전반까지 과학철학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문제였다. 과학의 특징을 다분히 논리성과 객관성의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가장 파괴적인 철학적 도전을 제기하였던 인물이 바로 페이어아벤트(P. Feyerabend)였으며, 그의 이러한 ‘파격적인’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 1975년 출간된 ‘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방법에의 도전: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정병훈 옮김, 도서출판 한겨레, 1987년)의 제목으로 번역·출간된 바 있다.
원래 이 책은 저자가 런던정경대(LSE)에서 행한 강의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강의가 진행된 당시, ‘연구프로그램 이론’이라는 과학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던 동료 교수 라카토스(I. Lakatos)는 거의 빠짐 없이 이 강의에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라카토스는 강의 중간 중간에 수많은 질문을 퍼붓곤 했으며, 이들 두사람간의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페이어아벤트는 합리주의자의 입장을 공격하고, 라카토스는 그것에 반격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토론 결과를 책으로 엮는 일을 계획했다.
하지만 라카토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 책에서는 페이어아벤트 혼자만의 입장을 개진하게 됐다. 그러한 이유에서 저자는 이 책을 동료 라카토스에게 헌정하고 있다.
치열한 논쟁을 이끌기 위한 글이었던 관계로, 이 책은 특별한 제목이 붙여지지 않은 총 18개의 편지와 에세이 형식의 글로 이뤄져 있으며, 글의 문구와 표현은 다분히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측면이 있다.
페이어아벤트가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전통적 과학철학에서 말하는 ‘과학적 합리성’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는 과학철학자들이 추구했던 과학에 대한 방법론적 규칙들은 과학 지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정한 과학의 발전은 과학자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상과 정형화될 수 없는 사고 과정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과학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규범론적 방법론의 규칙은 과학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과학의 방법 ‘무엇이라도 좋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모든 방법론은 그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진보를 방해한다.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도 좋다!’라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책 첫머리에 남겼다.
‘인식론적 무정부주의자’라는 그에 대한 평가에 걸맞게, 그는 과학의 비합리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전통적 관점은 그 자체가 과학의 본성과 발전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는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그의 평가일지 모른다.
그래서 페이어아벤트는 과학 연구의 훈련 과정에서 인간 개개인의 개성과 자유의지가 무시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학훈련의 과정이 지극히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말살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기존의 과학교육은 중국의 전족(纏足) 습관과 유사하다고 혹평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교육은 … 과학에 참여하는 사람을 단순화함으로써 과학을 단순화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 가령 개인의 종교적 믿음이나 형이상학적 관점 또는 유머 감각 등은 그의 과학적 활동과 최소한의 연관도 갖지 못하게 한다. 상상력은 제한되고 스스로의 독특한 언어는 제재를 받는다. … 마치 중국에서 여자의 발을 압박하듯이 …”
페이어아벤트는 과학이 국가로부터 부과되는 교육과정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학습자 개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하며, 성숙한 시민이란 그러한 선택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여년 간 그의 과학철학적 아이디어의 핵심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별 불가능성, 관찰의 이론 의존성, 통약 불가능성 등 그의 새로운 과학철학관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이러한 아이디어는 쿤(T. S. Kuhn)을 비롯한 많은 현대 과학철학자들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사실 ‘무엇이라도 좋다!’로 대표되는 그의 아이디어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면이 없지 않다. 구체적인 철학적 대안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그의 과학관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무력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혹자들은 이러한 페이어아벤트의 입장을 비판해 그를 ‘과학에 대한 최악의 적’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지나칠 정도의 파격성과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예컨대, 스파르타식 훈련과 속성 학습으로 특징지워지는 우리의 과학영재교육, 한두 가지의 과학적 탐구 방식에 집중하는 과학지도, 음악이나 문학 등의 예술과는 담을 쌓고 진행되는 엘리트 과학자의 양성, 엉뚱함과 삐딱함, 그리고 게으름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 살벌한 실험실 분위기 등등. 과연 이러한 것들이 과학의 발전에 진정 도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