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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중 환자 사망하면 의사 손 잘라

고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네곳을 4대 문명이라 부른다. 그 중 중국과 인도 문명은 자칭 세계사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서양인에게 남의 문명일 뿐이었으며, 비교적 거리가 가까웠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그들에게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현재 중동지방이라 부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주변으로 문명이 발전했다. 기원전 약 4천년경에는 수메르 중심의 도시문명이 발전하면서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바빌론을 중심으로 발전한 문명은 기록을 위해 이집트의 파피루스보다 보존이 더 용이한 점토판을 사용했기에 오늘날에도 당시의 의술을 짐작할 수 있다.

질병은 신이 내린 벌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명성을 날리게 된 이유는 신의 영역에 속했던 의학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즉 질병은 신에 의한 벌이 아니라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불균형과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의 이상으로 발생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바빌론 문명은 히포크라테스가 살던 시대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으므로 ‘질병은 신이 내린 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바빌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었던 마르두크의 아들 나부가 의학을 포함한 모든 기예를 관장했다. 이 신은 그리스 신화의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가 사용했던 지팡이를 감고 있는 뱀 문양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바빌론의 의사들은 질병을 가져다 주는 악마들 중 부주의함을 일으키는 일곱 악마를 특히 두려워해 7로 나누어지는 날에는 진료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증상을 관찰하기는 했으나 점성술에 의존해 진료했고, 참회, 기도, 종교적 의식 등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고자 했다.

식물, 광물, 동물 분비물 등을 약제로 사용했으나 그 효과는 불분명하며, 외과 수술 도구에 대한 기록이나 수술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칼이 발굴되기도 했다. 의술을 담당한 사람들은 주로 성직자였으며 진단을 담당하는 사람, 마귀를 쫓는 사람, 약물요법과 수술을 시행하는 사람 등 세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나부의 신전을 중심으로 발전한 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질병에 걸린 사람은 악마의 눈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격리시키기도 했다. 또한 환자를 접촉하는 것도 금지됐는데 당시 전염병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비교적 타당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현존하는 법전 중 가장 오래된 함무라비 법전에는 의료사고를 일으킨 의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기록이 여러가지 남아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가 계급 사회였던 까닭에 신분에 따라 의사가 책임져야 하는 정도가 달랐다.

즉 의사가 중병 치료를 위해 칼로 수술하던 중 환자를 죽게 하거나 시력을 잃게 하면 의사의 손을 잘랐으며, 그 환자가 노예인 경우에는 노예값의 절반을 물어주어야 했다. 또 노예를 치료하다 사망에 이르게 하면 자신의 노예를 제공해야 했다(당시 의사 역할을 수행한 성직자, 마법사 등은 모두 귀족계급에 속했으므로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귀족의 눈을 멀게 하면 그의 눈도 멀게 했고, 이를 부러뜨리면 그의 이를 부러뜨렸다. 귀족이 평민의 이를 부러뜨리면 은 1/3미나를 지불해야 했다. 이런 규정으로 보아 당시에는 법의 밑바탕에 ‘보복’이라는 사고가 깔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에 바빌론 의사들은 많은 수술을 행했으며, 함무라비 법전에는 치료가 잘못됐을 때의 처벌 외에 치료가 성공했을 때 얼마를 지불할 것인가에 대한 기록도 여러가지 기술돼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론 의학에 대해‘그 시대에는 의사가 없어서 환자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에 데려가 환자를 눕혀 놓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그 병에 걸린 경험이 있으면 치료법을 가르쳐줘야 했다’라고 말했지만 근거가 희박한 기록이다.
 

2001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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