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는 듯 단순해 보이기만 하는 동물들이 실제로는 수많은 속임수와 사람못지 않은 복잡한 사회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낚시꾼처럼 그럴듯한 미끼를 던져 먹이를 낚아채기도 하고,장대비를 피하기 위해 나뭇잎으로 피신처를 만들기도 한다.지난 3월 15일 열린‘영화보다 재미있는 극장식 과학강연’(동아사이언스 주관)서울대 최재천 교수의 강연을 통해, 생각하는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자.
동물도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 생각은 차치하더라도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일찍이 월리엄 어네스트 호킹은 “사람만이 유일하게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죽음이 과연 모든 것의 종말인가를 의심할 줄 안다”고 했다.
그러나 코끼리의 행동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코끼리는 다른 동물들 뼈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족의 뼈를 발견할 때면 언제나 그들의 긴 코로 뼈 냄새를 맡으며, 뼈를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오랫동안 들고다닌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늘 신선한 물과 풀을 찾아 이동하며 살지만, 그렇게 이동하는 중에도 자기 어머니의 두개골이 놓여 있는 곳을 잊지 않고 들러 한참동안 그 뼈를 굴리며 시간을 보낸다.
개나 고양이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동물도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만이 할 수 있을 법한 행동을 자기 개나 고양이도 했다는 얘기를, 마치 자기 아이는 모두 천재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처럼 자랑스레 떠들어댄다. 물론 개와 고양이, 코끼리가 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과거에 대한 추억과 미래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입증하는 일이 남아 있는 문제다. 새로운 이론이 나왔을 때 그 이론을 다른 사람이 똑같은 방법을 적용해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다른 방법으로 반박할 수 있어야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얘기들은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동물도 생각을 할까라는 주제는 아직까지 과학적 방법론이 확립돼 있지 않은 분야다. 그렇기에 앞으로 연구할 분야나 대상도 무궁히 많이 존재한다. 동물의 다양한 행동을 보며 과연 동물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할까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자.
비스킷으로 물고기 낚는 왜가리
동물의 어떤 행동을 관찰하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단순한 반복적 행동이나 본능이 아니라 복잡한 행동을 보면 동물도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하려면 기억도 하고 추리도 해야 하므로 머리가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침팬지는 나뭇가지를 이용해 ‘개미낚시’를 한다. 그것도 단순히 나뭇가지를 꾹꾹 밀어넣는게 아니라 개미굴 모양을 따라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휘어가며 밀어넣는다. 더욱 놀라운 일은 친구들과 재밌게 놀다가도 며칠 전 쑤시던 개미굴과 비슷한 모양의 나뭇가지가 보이면 그것을 들고 다시 그 개미굴로 가서 사냥을 한다. 개미굴 모양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본의 왜가리는 더욱 재밌는 모습을 보인다. 동경대 히구찌 박사가 연구한 결과를 보면, 이 새는 공원의 비스킷을 물위로 던져 물고기가 모이면 사냥을 한다. 심지어 벌레 비슷한 모양의 미끼도 이용한다. 사람못지 않은 행동이다.
동물계의 아이디어 뱅크, 박새
동물의 영리함은 자신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영국의 박새 경우를 보자. 예전에 영국 우유병의 마개는 단순히 두꺼운 종이였다. 지금의 우유는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정제기술이 좋지 못해 추운 겨울이면 우유마개 밑에 지방덩어리가 고이곤 했다. 새들에게 이 얼마나 군침 도는 먹이인가. 처음에 한 박새가 종이 뚜껑을 부리로 찢어내곤 지방덩어리를 먹기 시작하자, 곧 영국의 모든 박새가 이 행동을 따라했다. 결국 영국 우유 회사들은 마개를 더 단단한 재질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원숭이도 기발한 생각에는 이에 못지 않다. 공원의 관리원이 먹이로 줄 감자를 들고가다 그만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른 원숭이는 퉤퉤거리며 그냥 흙이 씹히는 대로 먹는데, ‘이모’라는 원숭이가 흙 묻은 감자를 물에 씻어 먹었다. 그러자 모든 원숭이들이 그것을 따라했다. 더 나은 결과를 보장하는 새로운 행동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문화아닌가. 문화가 있다는 말은 머리를 써서 생각을 한다는 증거다.
작전명 ‘장대비를 피하라’
또한 서로의 머리를 모아 인간 못지않은 협동성을 보이는 동물이 많다. 예를 들어, 열대에 사는 과일 박쥐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쏟아지는 장대비를 피하기 위해 큰 나뭇잎을 변형해 이른바 ‘텐트’를 만든다. 혼두라스 흰 박쥐는 바나나 잎맥을 물어뜯어 잎들이 땅쪽으로 쳐지면 그 밑에 자신만의 피신처를 만든다. 피터스 박쥐는 코코보라 잎을 이용해 기왓장을 포개 놓은 모양의 텐트를 만들고, 파머스 과일 박쥐는 고깔 모양의 안식처를 만든다.
그런데 종마다 선택하는 나뭇잎이 다르고 텐트를 만드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심지어 파머스 박쥐는 잎 종류에 따라 다른 모양의 텐트를 만든다. 텐트의 모양과 규모를 보면 며칠씩 걸려 서로 도와가며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제까지의 일을 기억하고 동료와 대화를 통해 집의 전체적인 모양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사람의 협동작업 못지 않다. 적당한 나뭇잎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이파리의 모양을 어떻게 변형시켜 원하는 텐트를 만드는가에 이르기까지 기발한 행동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욕심 채우려 거짓말도 척척
한편 혹독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속임수에 능한 동물도 적지 않다. 네살밖에 안된 아이가 지나치게 거짓말을 잘한다고 찾아온 어머니에게 아이가 그만큼 머리가 좋다는 증거니 기뻐하라고 말하는 아동심리학자가 있다.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일단 상황 판단을 끝내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침팬지와 함께 한 제인 구달 박사는 다음과 같은 재밌는 실험을 했다. 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침팬지 한마리를 따로 불러 한번에 다 먹어치울 수 없을 양의 바나나를 안겨주었다. 그러자 그 침팬지는 바나나를 자기만 아는 곳에 몰래 숨겨놓고 조금씩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친구들이 나타나 바나나가 어디에 있느냐고 아우성을 치자 그는 손가락으로 정반대쪽을 가리키곤, 그들이 모두 그 쪽으로 사라지자 재빨리 숨겨놓은 바나나를 또 꺼내 먹기 시작했다.
물떼새는 오스카 여우주연감?
물떼새 중에는 새끼를 구하기 위해 위험한 거짓말을 하는 어미들이 있다. 둥지에서 새끼들을 품고 있다가 여우같은 포식동물이 접근하면 처음에는 새끼들을 더욱 부둥켜안고 몸을 숨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일단 들켰다고 생각되면 물떼새의 행동은 바뀐다. 둥지에서 저만치 날아가 갑자기 날개가 부러져 잘 날지 못하는 흉내를 낸다. 별 어려움 없이 먹이를 구했다고 생각한 여우가 가까이 다가와야 어미새는 비로서 갑자기 날아오르며 몸을 피한다.
흥미롭게도 물떼새의 속임수는 침입자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육식동물인 여우에게 효과 있던 상처입은 행동은 초식동물인 소나 말에겐 통하지 않는다. 이 경우 물떼새는 둥지위에 두발로 꼿꼿이 서서 날개짓을 하며 ‘나 여기 있소!’라고 한눈에 확 띄게 행동하든지 아니면 이들을 향해 돌진한다. 침입자가 누군가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절한 속임수를 구사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새대가리’란 말이 있다. 그러나 물떼새의 행동을 보면 이 말은 그 의미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여름밤의 요부, 반딧불이
때로는 주린 배를 채우기위해 수컷을 거짓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수컷 반딧불이는 밤이면 암컷을 찾아 날아다닌다. 이들은 종마다 특유의 불빛 무늬가 있어 서로를 식별하고 짝짓기를 한다. 어떤 종의 수컷은 짧은 빛을 여러번 반복하는 무늬를 만드는가 하면, 또 어떤 종은 빛을 길게 끌며 날아 절묘한 곡선무늬를 만들기도 한다.
종에 따라 다르긴 해도 암컷은 아예 날개가 없거나 있어도 날아다니며 불빛을 비추지 않는다. 암컷은 대개 풀잎 끝에 앉아 독특한 무늬를 그리며 날아다니는 수컷의 춤을 감상한다. 마음에 드는 수컷이 가까이 오면 종 특유의 불빛 신호를 보내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이어 연속적으로 몇번에 걸쳐 서로 바삐 신호를 주고받은 뒤 수컷이 암컷 곁으로 내려앉아 교미를 한다.
그런데 미국 동부에 사는 몇몇 종의 반딧불이 암컷은 다른 종의 수컷이 보내는 신호를 읽을 줄 아는 것은 물론 그 종의 암컷이 보내는 응답 신호를 흉내낼 줄도 안다. 몸집도 비교적 큰 이 암컷은 속임 신호인 줄도 모르고 벅찬 정사의 꿈을 안고 내려앉은 다른 종의 수컷으로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룻밤에도 여러종의 신호를 흉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 작은 곤충이 쌀알보다도 작은 뇌 속에 그 많은 정보를 간직하고 있으며 각각의 종에 맞게 적절한 속임 신호를 보낼 수 있는지는 현재 여러 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동맹 맺어 거사 도모
동물 세계를 관찰할 때 또한번 감탄하는 것은 인간처럼 고도의 정치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다. 인간만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도 그들만의 방식과 원칙으로 복잡한 사회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원활히 하려면 이것저것 신경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인간과 유전자를 거의 99%를 공유하는 침팬지 사회에서는 힘과 나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른바 ‘인맥’도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우두머리와 친한 침팬지는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큰 동료앞에서 큰 소리칠 수도 있으며, 몸집이 약한 침팬지들은 서로 동맹을 맺어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도 한다. 침팬지 행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미국 에모리대의 프란스 드발 교수는 “침팬지 사회에서는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까지 말한다.
돌고래도 복잡하고 지능적인 사회관계를 한다. 돌고래 수컷은 암컷을 유인해 짝짓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여간 만만치 않다. 혼자서 암컷을 한곳으로 몰기에 바다는 너무 넓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고래는 무리를 지어 암컷을 한곳으로 몰아붙여, 암컷이 지치면 무리중의 수컷 한마리가 짝짓기를 한다. 이런 식으로 무리중의 수컷들은 차례로 교미를 하는데, 그 순서가 바뀐다든가 중복되는 경우는 없다. 또한 다른 수컷무리들과 동맹을 맺어 서로 어렵고 곤란한 처지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도움을 주고받는다. 이 얼마나 지능적이고 복잡한 사회생활인가.
언어는 인간만의 특권인가
동물이 이 정도로 똑똑하다면 당연히 인간처럼 그들만의 언어를 갖춘 것은 아닐까.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바짓가랑이를 휘감으며 멍멍거릴 때면 거의 대부분 배가 고프다는 얘기다. 분명히 우리와 다른 동물이지만 우리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강아지가 언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언어를 정의하는 최소한의 기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정보를 상징적인 부호를 사용해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지금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리는 행위는 언어라 할 수 없다.
벌들은 춤을 상징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해 얘기를 나눈다. 정찰벌은 꿀을 찾고 돌아와서 춤을 추며 동료들에게 꿀 있는 곳을 알려준다. 그들은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과 같은 모습의 이른바 ‘꼬리춤’을 춘다. 몸통을 좌우로 부르르 떨며 짧은 직선거리를 움직인 다음 반원을 그리며 원점으로 되돌아와선, 또 몸통을 흔들며 직진한 후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춤이다. 이때 직선 춤 방향과 수직 방향과의 각도는 태양과 꿀이 있는 곳 사이의 각도를 의미한다. 이 ‘꼬리춤’에는 방향 정보만 있는 게 아니다. 춤을 추는 속도에는 꿀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정보가 포함돼 있다. 예를 들어 천천히 추는 춤은 그만큼 한참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꿀벌의 춤언어가 얼마나 정확하고 객관적인지 인간인 우리도 그들의 춤을 읽고 정찰벌이 꿀을 발견한 장소를 찾아갈 수 있다. 심지어 꿀벌에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 수도 있다.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진은 몇년 전 작은 꿀벌 로봇을 만들어 벌통 안에 넣고 컴퓨터로 조정해 춤을 추게 했다. 그리곤 춤으로 알려준 장소에 가서 기다렸더니 벌들이 그곳으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꿀벌에게 말을 건 것이다. 꿀벌이 우리가 그들과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대꾸하기 시작하면 드디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 실제로 벌어질지도 모른다.
결정적 차이는 언어중추
영장류인 고릴라와 침팬지는 다수의 언어를 가지고 그들끼리 정보를 교환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제인 구달 박사는 침팬지의 여러소리를 흉내내 그들과 의사소통까지 한다. 그러나 동물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왜 인간의 언어와 동물이 얘기하는 것은 다를까.
그 비밀은 뇌에 있다.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는 거의 99%가 일치한다. 유전자의 역사로 계산하면 인간과 침팬지가 나뉘어진 때는 약 6백만년 전이다. 지구의 역사가 46억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가까운 사촌지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영장류의 언어중추는 중뇌 안쪽의 변연계에 위치하고 있다. 언어중추가 사고를 주관하는 대뇌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인간은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기막힌 도약을 한 셈이다.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한다’는 결정적 차이가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점이다.
뇌과학이나 행동생태학 분야의 많은 과학자는 동물언어를 연구해 이 과제를 풀려고 노력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