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년 동안 이뤄온 진화의 결과는 실로 대단하다. 열역학 제2법칙을 무시하는 듯,나노미터 크기의 생체분자는 정교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어떻게 생체분자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를 이용해 인간이 만든 어떤 기계보다 높은 효율로 운영할 수 있을까.인간이 이를 모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를 위해 나노와 생명이 만났다.
1999년 1월, 타임지는 ‘의학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21세기가 생명공학의 시대임을 주장하는 특별기획을 다뤘다.
“원자를 쪼개고, 실리콘으로 막강한 컴퓨터를 만든 물리학의 세기여 안녕! 이제는 생명공학의 세기를 향해 벨을 울릴 때다”라는 말머리를 던지면서….
이 말은 물리학이 더이상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공학이 가장 기초적인 수준인 개개 분자를 연구할 정도로 충분히 성숙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 무시
1897년에 이뤄졌던 전자의 발견이 20세기의 씨앗을 뿌리는 사건이었다면 21세기의 씨앗은 어떤 사건이었을까? 바로 1953년에 제임스 왓슨이 DNA 분자의 복제 코드를 형성하려면 어떻게 4개의 염기가 쌍을 이루게 되는지를 프란시스 클릭에게 불쑥 꺼냈던 일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발전의 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인간의 DNA 안에 배열된 30억쌍 염기의 정체를 거의 밝혀낸 것이다. 원자 주기율표가 20세기 과학 발전의 청사진 역할을 했듯이 인간 유전자 지도는 21세기의 항해를 인도해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닫힌 계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한다. 그러나 생물계는 흡사 이 법칙을 부인하는 듯하다. 상당히 정교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조직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높은 질서(낮은 엔트로피)를 이루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를 이용해 유용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기능은 단백질, DNA, 그리고 RNA로 구성된 생체분자로 불리는 분자기계에 의해 수행된다.
생체분자들이 해내는 일은 실로 놀랍다. 각각이 전문화돼 있고, 생화학적 반응을 10억배로 촉진시킬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상당히 밀집해 있는 세포환경에서 각 생체분자가 전문성을 유지한다.
어떻게 생체분자는 이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수십억년 동안 이뤄온 진화의 결과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과학자들은 자연이 만든 분자기계처럼 작고 효율적인 기계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며 생체분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인간 질병에 대한 더 나은 신약과 치료방법을 개발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차를 고치기 위해 차의 전체 구조, 부속기관, 작동 원리 등을 이해해야 하며 또한 이를 통해 더 나은 차가 고안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체분자의 경우는 어떨까. 생체분자는 나노미터 정도의 크기로 매우 작다. 대부분의 단백질은 10nm보다 작고 DNA, RNA의 지름도 겨우 2nm 정도다. 따라서 이를 연구하려면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다. 현재 생체분자의 구조를 원자 하나하나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도구들로는 X선 결정학과 핵자기공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이나믹하게 바뀌는 생체분자들의 구조를 실시간으로 재현시킬 수는 없다. 지난 10여년 동안 발전해온, 실시간으로 생체분자의 운동과 기능을 측정할 수 있는 나노기술이 생물학의 문제를 푸는데 이용되고 있다.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빛으로 만들어진 젓가락으로 줄다리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지하철이나 명동거리를 헤집고 나가려면, 사람을 밀어 제쳐야 한다. 세포 안의 생체분자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 생체분자는 다른 분자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연루해 있어서 서로 밀고 제쳐야 한다. 따라서 힘은 생체조직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생체분자간의 힘은 어떤 도구로 측정할 수 있을까. ‘광학집게’라고 불리는 빛을 이용하는 도구가 대표적이다. 만약 렌즈를 사용해 1미크론(10-6m)보다 작은 영역으로 빛을 집중시키면 초점 근방에 있는 물체를 잡을 수 있다. 바로 광학집게가 이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광학집게는 빛으로 만들어진 젓가락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분자 젓가락은 1986년 벨연구소의 아서 아시킨이 발명했는데, 이후 생체분자 연구에 혁명을 가져왔다.
광학집게로 생체분자가 내는 힘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단일 RNAP의 전사에 대한 연구에서 힘을 측정한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RNAP(RNA Polymerase)는 전사 과정에서 DNA 이중나선을 지나가면서 한가닥의 RNA를 만드는 효소다. 이때 RNAP가 RNA를 만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을 재기 위해 과학자들은 먼저 RNAP를 유리 표면에 고정시켜 놓는다. 그리고 0.5㎛ 크기의 광학집게가 잡을 수 있는 입자를 DNA의 한쪽 끝에 붙인다. 이제 RNAP와 입자는 DNA를 잡고서 줄다리기 시합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RNAP가 RNA를 만들 때 DNA에 막대한 힘을 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RNAP가 더이상 작동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광학집게가 12×10-12N보다 큰 힘을 가해야 한다. 분자 화물을 운반하는 모터 단백질들이 약 5×10-12N 힘이면 못 움직이게 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 RNAP 실험 결과는 더욱 놀랍다.
물론 현실세계의 힘을 비교하면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다. 광학집게로 측정된 힘은 단지 10-12-10-10N으로 매우 작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휴대폰의 무게가 대략 1N인 것과 비교해봐도 감이 오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세포 안에서 DNA는 다른 생체분자들과 단단하게 꼬여있어서 그 틈을 비집고 일하려면 막대한 힘을 쓸 수 있도록 자연이 RNAP를 다듬어낸 것이다.
생체분자 내부구조까지 보여줘
생체분자의 힘으로부터 과학자들은 또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동전 위에 종이 한장을 놓고, 연필로 그 위를 긁어봤을 것이다. 그러면 동전 표면 모양이 그대로 종이 위에 그려진다. 연필로 긁는 힘으로 동전 표면 모양을 알 수 있듯이,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생체분자의 영상을 얻을 수 있다. 1980년대에 소위 주사형터널링현미경(STM, Scanning Tunneling Microscope)의 후임격인 원자력현미경(AFM, Atomic Force Microscope)이라고 불리는 것에 이 방법이 적용됐다. 지레의 한쪽 끝에 달린 날카로운 침이 표본과 맞닿으면서 표면의 윤곽에 따라 위아래로 구부러진다. 이때 구부러진 정도를 지레에서 반사되는 레이저빔의 편향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표본의 윤곽에 대한 영상정보를 얻을 수 있다(그림2).
AFM은 물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 생체분자를 원래 환경에서도 연구하기에 적합한 도구다. 또한 1nm보다 작은 크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해상도가 높아서 생체분자의 내부 구조까지도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다.
과학자들은 AFM을 통해 얻은 영상으로부터 생물학계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ATP synthase라는 효소는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연료 분자인 ATP를 만든다. 이 효소는 모터처럼 돌면서 기능을 수행하는데, 모터의 터빈에 해당하는 부분이 몇개의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는지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AFM을 사용해 직접 이 모터 효소를 봄으로써 14개의 구성원이 반지모양의 터빈을 만든다는 점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는 많은 생물학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이 3의 배수가 필요하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AFM은 최상의 해상도를 자랑하면서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화학적인 특이성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 분자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분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직접 제공해주지는 않난다는 말이다.
형광분자 이용해 실시간으로 운동 관찰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실시간으로 생체분자의 내부 운동을 관찰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이 기술은 단일분자의 형광공진에너지이동(FRET, single molecule Fluorescence Resonance Energy Transfer)으로 불린다. 두개의 형광 분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관여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어떻게 FRET로 실시간 생체분자의 운동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일까. 두개의 형광 분자를 파란 전구와 빨간 전구로 비유해서 알아보자. 파란 전구와 빨간 전구를 종이를 자르는 가위의 양쪽 날 끝에 붙인다. 그리고 파란 전구에 전력을 공급한다. 이때 가위의 양쪽 날을 모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회로가 형성돼 파란 전구의 에너지가 빨간 전구로 이동한다. 따라서 빨간 전구에서 나오는 붉은빛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시 가위 날을 벌려서 두개의 전구를 떨어뜨리면, 단지 파란 전구로부터 나오는 파란빛만 볼 수 있다. 즉 가위의 양날의 모양이 변함에 따라 다른 빛깔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빛을 보면 가위 양날의 모양 변화를 알 수 있다(그림3).
이같은 방법으로 생체분자의 운동을 관찰한다. 바로 가위를 생체분자로 생각하면 된다. 만약 두개의 형광분자를 각각 생체분자에 붙여놓으면, 생체분자의 운동은 두개의 형광분자의 형광정도를 변화시킨다. 가위의 양날 모양이 변화에 따라 전구의 불빛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현재 단일분자 FRET를 통해 생체분자가 실시간으로 기능하는 동안 일어나는 구조적인 변화를 측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왜 그럴까. 이를 통해 어떤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 DNA 이중나선을 푸는 효소인 helicase 연구에 적용된 예를 살펴보자. helicase는 DNA 신진대사에 매우 중요하다. 이 효소는 연료 분자인 ATP를 사용해 DNA를 따라 움직이며 이중나선을 풀어주므로 역시 모터 분자로 분류된다. 모든 모터 분자들에 공통된 성질은 ATP를 소모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기계적인 일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는 ATP 소모와 관련된 모터분자의 모양 변화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으로 여겨지나 아직 정확히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일어나는지는 미스터리다. 그러므로 helicase 같은 생체 분자의 모양 변화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매우 중요하다.
FRET를 이용해서 과학자들은 실시간으로 단일 helicase의 모양의 변화와 그 기능을 관찰할 수 있게 됐다. helicase가 DNA에 붙은 후 일어나는 반복적인 모양의 변화를 FRET 신호의 변화로 관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이전에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helicase의 모양을 찾아내고 여러 모양들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반응률도 직접 잴 수 있었다. 모터 분자들이 어떻게 화학 에너지를 사용해서 작동하는지를 밝혀내는데 이 단일 분자 FRET가 큰 역할을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100% 효율 자랑하는 모터분자
많은 모터 분자들은 화학에너지를 매우 효율적으로 기계적인 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종종 그 효율이 1백%를 달성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든 기계인 자동차가 효율이 단지 3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과 비교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생체분자는 매우 작다. 그리고 필요한 즉시,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돼 있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생체분자 발동기에 기초한 나노기계를 만드는 연구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코넬대의 연구팀이 생체분자의 응용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ATPase에 기초한 나노프로펠러를 만든 것이다. ATPase는 모터처럼 돌면서 기능을 수행하는 모터분자다. 즉 ATP의 화학 에너지를 이용해 기계적 일을 한다. 코넬대 연구팀이 개발한 나노프로펠러는 ATPase의 모터분자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그들은 ATPase를 작은 기둥 위에 놓고, 나노공정 기술을 이용해 여기에 작은 프로펠러를 달았다. 그리고 ATP가 공급됐을 때 ATPase의 모터분자가 돌면서 달려있는 프로펠러도 회전하는 것이었다.
연구팀이 개발한 이 나노엔진은 아직 특정 기능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생체분자를 이용해서 매우 작은 기기로 만들 수 있다는 나노기술의 미래를 향한 첫번째 발걸음을 옮겼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제는 우리 몸 속에서 외과 처치를 할 수 있을 만큼 작은 기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단지 공상과학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나노기술과 생물학의 결합을 목격하고 있다. 21세기가 얼마나 많은 놀라운 발전을 준비하고 있는지 기대가 크다. 이같은 첨단 연구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와 공학자가 학문적 경계를 극복하고 서로 공동 연구하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또한 젊은 과학자들이 적합한 배경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