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이 사용하던 도구를 관찰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왜 그런 모양인지 고민해보자.그러면서 문화재 속에 들어있는 탐구거리들에 눈을 돌려보자.민속박물관들이 살아있는 탐구교재로 다가올 것이다.
갈판과 갈돌은 어디에 사용됐던 것일까. 청자의 색이 굽기 전과 구운 다음에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주고리는 증류의 원리를 이용했다는데 그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영조척의 길이는 몇 cm나 될까.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어디선가 보고들은 듯한, 그러나 이름과 쓰임새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전시물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 중에는 과학적인 원리가 적용된 것이 많다. 따라서 전시물들이 어떻게 작동되고 왜 저런 모양으로 생겼는지를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과학탐구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와있지 않으므로 누구나 스스로 문제와 답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 말은 탐구거리가 무궁무진하게 많다는 말이다. 이제 민속박물관으로 과학탐방을 떠나보자.
과학문화탐방과 온고지신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21세기에 수백년 전, 심지어는 수천년 전 조상들이 살았던 모습이 왜 중요할까. 그것은 자신의 고유성을 전문적으로 지켜나가지 않으면, 정보의 확대 재생산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수천년 전이나 현대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로 먹을 것, 음식을 먹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기구, 추위나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집과 의복이다. 현대인들은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나 조상들은 이 모든 것을 가내수공업적으로 해결했다.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복잡하고 효율도 좋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지만 그 속에는 한반도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해 삶을 꾸려 왔던 조상들의 슬기가 묻어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오늘날의 과학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는 멋진 것이 많다. 이제 조상들이 사용하던 도구와 방법들을 잘 관찰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참뜻을 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제1전시실고려청자의 비취색과 철의 산화
제1전시실에는 한민족의 생활사와 관련해 선사시대의 생활, 삼국의 공방, 고려청자와 인쇄문화, 조선의 과학기술과 한글에 대한 전시물들이 있다. 고려의 청자문화에 대한 전시관에서는 다양한 용도의 청자뿐만 아니라 제작과정도 볼 수 있다. 고려 청자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맑은 비취색에 있다. 그러한 비취색이 만들어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고려청자 전시실에 있는 청자 만드는 과정을 보자. 유약을 바른 재벌구이 전의 청자와 재벌구이 후의 청자를 비교해보자.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고려청자의 독특한 색은 표면에 발라놓은 유약에 의해 발현된다. 유약에는 철, 구리, 코발트, 망간, 크롬 등의 금속원소가 포함돼 있다. 금속원소마다 특유의 불꽃색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비취빛의 청자색을 나타나게 하는 데는 어떤 금속원소가 가장 큰 역할을 할까. 그것은 바로 철이다. 철은 산화되면 산소가 공급되는 양에 따라 산화제일철(FeO)이나 산화제이철(${Fe}_{2}{O}_{3}$)이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철가루는 검은색이지만, 산화제일철은 푸른색, 산화제이철은 붉은색을 나타낸다. 산화제일철이 비취색의 주된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피 속에 있는 적혈구는 수백만 개의 헤모글로빈이 모인 집합체인데, 이 헤모글로빈도 철이온을 포함하고 있다. 허파에서 산소를 공급받으면 산화돼 붉은색이 되고 세포에 산소를 주면 환원돼 검붉은색을 띤다. 이것이 동맥피는 선홍색으로 보이고 정맥피는 검붉게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청자와 같이 투명한 가을 하늘색을 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유약 뿐만 아니라 산소의 양을 조절하는 방식 등 여러가지가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 오늘날 고려청자 유약의 성분을 분석했다고 해도 그 굽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색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제2전시실 소주고리와 분별증류
제2전시실에는 각종 농기구, 칠기공예, 염색, 침선구, 초가집과 기와집, 등잔과 촛대, 상차림, 김치, 유기제작과정, 각종 주방 용구 등 의식주에 관련된 여러가지가 전시돼 있다. 이중 눈길을 끄는 것은 눈사람 모양의 소주고리다. 중학교 교과서에는 에탄올과 물의 혼합물을 서서히 가열해 끓는점이 낮은 에탄올을 먼저 증류해내는 실험이 포함돼 있다. 소주고리의 역할은 분류증류에 사용하는 가지달린 시험관과 비슷하다.
소주고리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솥과 대접을 이용하는 것이다. 솥의 가운데 대접을 놓고 술밑(누룩을 섞어 버무린 밥으로 술의 원료)을 그 주변에 넣은 다음 솥뚜껑을 뒤집어 덮는다. 그리고 서서히 가열하면 물보다 먼저 기화된 에탄올이 찬 솥뚜껑에 술이 돼 맺힌다. 솥두껑에 맺힌 술은 솥뚜껑의 손잡이를 따라 대접으로 모인다.
두번째 유형의 소주고리는 대롱을 이용한 것이다. 솥에 술밑을 넣고 좁은 구멍이 뚫린 나무 뚜껑을 덮은 다음 그 구멍에 대롱을 꽂아 기체 에탄올을 바깥에 있는 다른 그릇으로 모은다.
세번째 유형은 전시관에 있는 눈사람 모양의 소주고리다. 이 소주고리의 위, 아래, 중간에는 모두 기체 에탄올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구멍이 있는 판이 있다. 허리부분에는 증류된 에탄올이 나올 수 있도록 긴 코 모양의 대롱이 달려있다. 이 소주고리의 위에는 뒤집힌 솥뚜껑이 덮여있다. 술밑을 솥에 넣고 그 솥 위에 시루처럼 이 소주고리를 얹어 놓고 가열한다. 기체 에탄올이 솥뚜껑에 작은 액체방울로 맺히기 시작할 쯤 솥뚜껑 위에 찬물을 부으면 액체 에탄올이 벽을 타고 흘러내려 허리 부분의 대롱을 통해 흘러나온다.
제3전시실황종척과 어림
제3전시실에는 전통놀이, 문방구, 관혼례, 화폐, 도량형, 봉수, 천문학, 의학, 전통 악기 등이 전시돼 있다. 이중 도량형 전시관에서는 옛날과 오늘날의 척도를 비교하고, 그 실제 크기를 어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도량형에서 ‘도’(度)는 길이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길이의 단위에는 황종척, 주척, 영조척, 포백척 등이 있다. 오늘날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레이저를 이용해 빛이 진공에서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경로를 1m로 나타내 국가표준으로 관리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주척은 중국 주나라의 주공이 열 손가락의 폭을 지척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주척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해 정확한 표준이 없었다. 쓰임새에 따라 그 기준과 용어도 달랐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척도기준이 되며, 도로의 거리, 측우기의 강수량 측정 등 과학기기의 표준 잣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황종척은 도량형의 중요성을 인식한 세종대왕이 도량형을 정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세종 7년, 박연이 황해도 해주에서 생산되는 기장(좁쌀보다 조금 큰 낟알) 중에서 중간 크기인 것을 골라, 1백알을 나란히 늘어놓고 그 길이를 황종척 1척으로 정했다. 길이가 30.3cm인 황종척은 실제로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여러가지 척도의 기준이 됐다. 특히 악기의 음을 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과학동아4월호 참고). 주척은 황종척의 약 0.6배에 해당한다.
영조척은 세종 28년(1446)에 황종척의 길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영조척 한자가 황종척의 약 0.9배, 주척의 약 1.5배다. 영조척은 그 길이가 변하지 않고 지켜져 다른 척도체계의 기준이 됐다. 특히 건축이나 도로, 그리고 기타 물건 등을 만드는 표준 잣대라는 점에서 지금도 당시 건축물의 복원 사업 등에 참고되고 있다.
포백척은 바느질이나 옷감을 잴 때 사용했다. 상인들이 쓰던 포백척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1.5cm정도인 5푼이나 짧았다. 그 차이 때문에 상인들은 일반인들과 거래할 때, 부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포백척의 길이는 이후 경제적인 사정에 따라 쉽게 변했고 구체적인 용도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이제 전시된 영조척이 몇 cm인지 어림해보자. 주척과 같이 사람의 신체 부위를 사용한 것보다 기장 1백알을 사용하면 좋은 점이 무엇인가. 오늘날 길이의 기준은 무엇일까.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짧을수록 좋을까, 길수록 좋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와 현재를 과학으로 연결해보자.
국립민속박물관은 서울시 세종로 경복궁 내에 있으며, 서울을 벗어난 곳에서는 온양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안동시립민속박물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을 이용할 수 있다. 민속 유물을 관람하면서 선조들의 슬기를 과학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은 1시간의 과학 수업에서 얻는 것보다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