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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인간게놈 무상공개' 발언의 의미

선진국에 도움 줄 뿐 한국에게 이득없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성과물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미국 정부와 기업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지난 3월 15일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 블레어 수상은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인간의 유전 정보를 모든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프로젝트가 시작되던 1990년부터 유전 정보를 무료로 공개할 계획이었다. 이 정보는 그 누구의 소유물이 아닌 인류 공동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공학회사의 입장은 다르다. 정부와는 별도로 프로젝트를 진행시켜 온 세계의 유수한 생명공학회사들은, 일반적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공개하되 상세한 내용은 제약회사와 대학 연구기관들에게 돈을 받고 팔 계획이다.

30억개 염기서열 자체는 무용지물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 블레어 수상은 인간게놈프로젝트로부터 얻은 정보를 무료로 모든 과학자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의 발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클린턴과 블레어의 발표가 나온 후 미국 생명공학회사의 주식가격은 급격히 하락했다. 투자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회사가 독점하던 유전 정보가 일반에게 공개되면 그만큼 회사의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셀레라나 인사이트와 같은 대표적인 생명공학회사들이 무상공개 요구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입장을 밝힌 것은 당연하다.

이에 비해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양국 지도자의 발언이 우리 생명공학회사에게는 득이 되지 않겠느냐”며 낙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자료가 모두 공개되면 우리는 공짜로 그 정보를 마음껏 사용하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간게놈프로젝트는 단지 인체 설계도의 ‘초안’을 작성하는데 불과하다. 인간의 유전자에 존재하는 30억개 염기서열을 밝히는 작업일 뿐이다. 즉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의 4가지 염기가 어떤 순서로 배열돼 있는지에 대한 자료다.

이 기초자료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려면 염기서열에 따라 어떤 단백질이 만들어지는지를 밝혀야 한다. 혈당을 조절하는 호르몬인 인슐린, 적혈구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주체인 헤모글로빈 등 인체의 온갖 생리현상을 조절하는 주역이 바로 단백질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인체의 단백질은 10만여개다. 30억개의 염기 가운데 10만여개의 단백질을 만드는 부위(유전자)는 전체의 2%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인체 생리현상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알짜 정보’다. 특히 암과 같은 난치병이 발생했을 때 어떤 유전자에 이상이 생긴 것인지 밝히는 경우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정상 유전자와 발병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비교해 차이점을 알아내면 병이 발생하는 원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결과를 이용해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음은 물론이다.

현재 유전자의 구조, 즉 단백질을 만드는 염기서열이 밝혀진 것은 9천여개에 불과하다. 나머지 9만개가 넘는 유전자의 구조를 규명하는 일은 인간게놈프로젝트와는 별도의 새로운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미국의 생명공학회사들은 바로 10만여개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고 그 결과를 특허로 신청하는 일에 혈안이다. 30억개 염기서열 전체를 단순히 나열한 정보보다 훨씬 ‘값진’ 자료이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나 병원의 연구소에서 이 정보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유전자 정보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고, 이 ‘고객’들을 대상으로 정보 사용료를 지불하게 하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클린턴과 블레어가 무상공개를 요구한 대상은 30억개 염기 전체의 서열이다. 당연히 그 자체로는 당장 써먹을 수 없는 기초자료일 뿐이다. 이 원석을 다이아몬드와 같은 비싼 보석으로 가공하려면 고도의 전산분석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는 막대한 전문인력과 컴퓨터 장비가 필요하다. 미국을 비롯한 일부 선진국에서나 실현이 가능한 일이다. 한국을 포함해 게놈에 대한 연구경험이 미진한 대부분 국가의 과학자에게 제아무리 자료가 무상으로 제공된다 해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탓에 선진국의 연구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두 지도자의 선언은 어찌보면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 않을까.
 

유전정보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DNA


유전자 특허 여전히 인정

더욱이 클린턴과 블레어는 “유전자 정보를 이용한 발명품에 대해서는 여전히 특허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생명공학회사들의 특허 신청 추세에 대해 ‘인정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만여개 유전자의 정보가 밝혀지고, 그 상당 부분에 대한 특허권이 선진국 기업에 부여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난치병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치료책을 찾는 유전자 차원의 연구가 진행될 때 일일이 특허료를 물어야 할 상황이 눈앞에 닥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2월 29일 클린턴은 “두달 안에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완성시키겠다”고 장담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전에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완료시점인 2003년보다 3년이나 시기가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 끝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다. 생명의 ‘알짜’ 설계도가 일부 선진국에 의해 독점된다면, 인간게놈프로젝트로부터 파생되는 혜택이 일반인에게 골고루 전달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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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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