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베이글의 친구, 도넛은 왜 몸에 커다란 구멍이 났을까.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TV 광고에서도 나온다. 약 150년 전 미국의 한센 그레고리는 어머니가 구워주는 도넛이 골고루 익지 않아 항상 가운데 부분을 파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구멍 뚫린 도넛을 만들어 먹었다. 그레고리는 커다란 배의 선장이 됐는데, 배를 운항하면서 도넛을 먹던 중 폭풍을 만났다. 그는 급한 대로 조타장치의 튀어나온 부분에 빵을 꽂고 폭풍을 피했다. 이때부터 구멍 뚫린 도넛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도넛 골고루 튀기려면 ‘도넛 모양’으로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달콤하고도 고소한 냄새, 도넛 전문점에서 나는 향기다. 다양한 색깔만큼 맛도 화려한 도넛, 씹을수록 쫄깃쫄깃한 도넛, 우울함이 달아날 만큼 달콤한 도넛…. 10년 전만 해도 도넛 종류가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도넛을 먹기 위해 브랜드부터 정해야 할 정도다. 달콤한 도넛부터 찹쌀떡처럼 쫄깃쫄깃한 도넛까지, 도넛 전성시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동그란 모양, 하트 모양, 네모난 모양 같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자랑하지만 역시 오리지널 도넛은 가운데가 뻥 뚫린 둥근 모양이다.
그런데 도넛이나 베이글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데에는 과학적인 이유도 있다. 도넛은 대개 베이킹파우더로 반죽을 부풀린 뒤 모양을 뜨고 즉시 튀겨 만드는데, 가장자리는 잘 익는 반면 가운데는 설익기 쉽다. 어린 그레고리가 그랬듯이, 중간에 두툼한 부분을 없애면 설익은 부분 없이 익힐 수 있다. 결국 도넛은 ‘도넛 모양’이라 빵 전체가 고르게 익는 셈이다.
베이글도 마찬가지다. 대개 빵을 만들 때는 반죽을 오븐에 넣고 높은 온도(220℃)에서 굽지만, 베이글은 반죽을 오븐에 굽기 전에 끓는 물에 한 번 데친다. 베이글도 가운데 부분이 두꺼우면 가장자리보다 설익어 빵이 완성된 뒤 맛이 떨어진다. 빵에 구멍을 뚫으면 열전도율이 높아져 골고루 익힐 수 있다.
가운데가 뻥 뚫린 모양의 덕을 톡톡히 보는 것은 도넛과 베이글뿐이 아니다. 그 중 하나가 고추장 메주다. 맛있는 전통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북 순창에서는 처서(8월 23일쯤)에 멥쌀과 콩을 섞어 고추장 메주를 만든다. 순창에서 빚는 된장 메주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덩어리지만, 고추장 메주는 특이하게도 도넛 모양이다. 된장과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된장은 메주를 발효시킨 뒤 속을 띄워야 해 두껍게 만들지만 고추장은 황국균 같은 균으로 메주를 발효시키고 말려야 하므로 두꺼울 필요가 없다. 또 고추장 메주를 빚는 시기는 온도가 높고 습기가 많아 메주를 발효시키기에 적합하지만 동시에 부패하기도 쉽다. 결국 순창에서는 고추장 메주를 재빨리 건조시켜 발효균이 잘 자라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고추장 메주를 도넛형으로 빚는다. 도넛형 메주는 긴 줄에 꿰어 처마 밑에 매달 수 있어 말리기도 편하다.
우주에 떠 있는 ‘도넛 집’, ‘인공태양’ 만드는 ‘도넛’
실제 건설된 우주정거장의 모양은 어떨까. 1973년 미국이 발사했던 스카이랩, 1986년 러시아가 발사한 미르, 미국과 러시아 등 16개국이 참여해 건설 중인 국제우주정거장(ISS)은 도넛과는 거리가 멀다. 우주정거장을 지으려면 부품을 우주선에 실어 올린 뒤 우주에서 조립해야 하는데, 현재 기술로는 도넛 형태의 구조물을 건설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크고 무거운 부품을 쉽게 우주로 운반하는 우주왕복선이 개발되고, 부품을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미래에는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이 상상했던 도넛 모양의 우주정거장이 탄생할 것이다.
핵융합 장치인 토카막에도 ‘도넛’이 들어 있다. 핵융합은 원자핵 몇 개가 합쳐지면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을 말한다. 태양은 내부에서 수소핵들이 융합해 헬륨핵이 될 때 방대한 에너지를 내놓아 활활 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핵융합 장치를 ‘인공태양’이라고도 부른다.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려면 1억℃ 이상으로 뜨거운 플라스마(이온핵과 자유전자로 이뤄진 상태)를 토카막 안에 가둬야 한다. 토카막은 자기장을 도넛 모양으로 만들어 플라스마를 이 속에서 빙글빙글 돌려 가둔다. 2007년 건설된 ‘한국형 차세대 초전도 핵융합 실험장치(KSTAR)’도 도넛형 토카막을 사용한다. KSTAR는 2년여 동안의 시험 가동을 마치고 지난 9월 핵융합 발전을 향한 첫 실험에 착수했다.
산소 싣는 적혈구, 윙크하는 근육도 도넛 닮아
날 때부터 도넛 모양인 것들도 있다. 우리 몸속에도 도넛처럼 생긴 세포, 근육, 그리고 뼈가 있다. 물론 특별한 모양 덕분에 각자 역할을 효율적으로 한다.
혈액을 이뤄 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을 다니는 적혈구는 ‘가운데가 막힌 도넛’이다. 구멍은 뚫려 있지 않지만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적혈구가 일반 세포처럼 둥근 공 모양이 아닌 이유는 핵이 없어서다. 도넛 모양인 적혈구는 산소를 싣는 부분의 표면적이 넓어져, 산소를 ‘퀵서비스’ 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적혈구는 폐에서 산소를 싣고 온몸 곳곳을 다니며 세포에 산소를 주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실어 폐로 돌아온다. 산소를 운반하면서 적혈구는 커다란 통로인 동맥과 정맥을 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좁은 모세혈관을 지나간다. 그런데 모세혈관의 지름은 적혈구의 지름인 7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보다 작아서 공처럼 통통한 모양으로는 통과하기 어렵다. 결국 적혈구는 도넛 모양인 덕에 산소를 효율적으로 운반할 뿐 아니라 빈대떡처럼 유연하게 찌그러지면서 좁은 혈관도 쑥쑥 지나간다.
적혈구는 뼛속에 가득 찬 부드러운 조직인 골수에서 조혈모세포로 태어난다. 조혈모세포는 적혈구로 분화하면서 핵이 사라지고 가운데가 움푹 팬다. 그런데 100개 중 1~2개꼴로 핵이 사라지지 않은 적혈구(미성숙한 적혈구)가 탄생한다. 미성숙한 적혈구는 골수 밖에서 돌아다니다가 스스로 핵이 없어지는 분화과정을 거친다. 전문가들은 미성숙한 적혈구가 전체의 1~2%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질환을 진단하기도 한다. 혈액 속에 미성숙한 적혈구가 1~2%보다 많을 경우, 빈혈이나 염증, 백혈병 등으로 적혈구가 적게 생성됐거나 파괴돼 부족한 양을 채우기 위해 몸이 적혈구를 많이 만들었다고 추측한다.
‘도넛’은 뼈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기다란 척추에서 맨 위에 있는 뼈, 즉 목 바로 뒤에 있는 제1 척추 ‘아틀라스’다. 다른 척추 뼈들은 자기 위에 있는 척추를 지지하는 역할을 하며, 등 쪽으로 튀어나온 부분(가시돌기)이 있어 등 근육이 붙는다. 아틀라스는 지지해야 할 척추 뼈가 없는 대신 머리뼈를 지탱해야 하므로 머리 운동과 관련된 근육이 와서 붙는다. 그래서 가시돌기가 없고 둥글다. 도넛처럼 생긴 덕에 머리 무게는 아틀라스 전체에 골고루 분산된다. 아틀라스가 제2 척추에 꽂혀 있어 사람은 머리를 숙이거나 회전시킬 수 있다. 막대기에 걸린 도넛처럼 앞뒤, 좌우로 비틀비틀 움직이거나 빙글빙글 돌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