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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의 시간, 천재일우의 기회, 억만금의 재물.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면서도 과연 그것이 원래의 뜻대로 잘 이해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겁(劫)’이나 ‘재(載)’ 같은 말을 정확히 알기도 어렵거니와 십중팔구는 ‘억만금’처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의미도 실은 오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풀어보자. 숫자를 세는 단위수를 어렸을 때부터 배운다. 단, 십, 백, 천, 만, 억, 조. 예산이 80조원이라거나, 공사비가 2조원이라거나 하면서 조 단위까지는 익숙하다. 그보다 큰 수는 어떨까. 조선시대에 사용됐던 단위수를, 세종대왕도 수학 교재로 삼았다는 중국 송나라 주세걸의 ‘산학계몽’이라는 책에서 볼 수 있다.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대수까지 이른다. 이러한 수는 고대의 중국에서부터 전통적으로 써오던 단위수에 항하사, 나유타, 아승기 등과 같은 인도 불교에서의 수 관념이 겹쳐진 것이다.

억조창생은 몇명?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수의 단위를 10개로 분류했다. 억,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였다. 재는 바로 중국에서 써오던 가장 큰 수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단, 십, 백, 천, 만(${10}^{4}$), 십만, 백만, 천만, 억(${10}^{8}$), 십억, 백억, 천억, 조(${10}^{12}$), 십조, 백조, 천조, 경(${10}^{16}$) 하는 식으로 세어나가면 억, 조, 경 등이 모두 10의 4승 단위로 올라가는 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재는 10의 44승이나 되는 큰 수이다.

그런데 지금은 10의 4승 단위가 익숙해 있지만, 옛날에는 단위수를 올리는 방식이 세 가지였다. 하나는 고대부터 일상생활에서 돈이나 곡물을 셀 때 써왔던 단위수로 단, 십, 백, 천, 만, 억, 조, 경, 해 등으로 곧바로 올라가는 셈법이다. 때문에 이 법으로 하면 억은 ${10}^{5}$, 조는 ${10}^{6}$, 경은 ${10}^{7}$, 해는 ${10}^{8}$이 된다. 일반적으로 옛 문헌에서 생활과 관련돼 ‘억만금이나 되는 돈’이라고 하면 바로 이 단위법으로 쓰인 말이다.

온 나라의 백성들을 일컬어 억조창생(億兆蒼生)이라고 했다. 10의 1승씩 올라가는 이 단위법이라면 억조창생은 오늘날의 수십만-수백만 인구로 생각할 수 있다. 현재 중국의 인구는 십수억을 헤아리지만 고대에는 작은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인구도 훨씬 적었을 것이니 억조창생이라 해도 그리 많은 인구는 아니다. 만일 오늘날처럼 10의 4승 단위법으로 보면 억조는 수억(${10}^{8}$)-수조(${10}^{12}$)의 인구가 돼버리므로 수가 너무 많다. 현재의 세계 인구를 다 합해야 1백억이 못 되는데, 당시에 수억이고 수조라면 너무 많은 인구다.

큰 수를 천문학적 숫자라고 하듯이 천문학을 다룰 때는 위와 같은 10의 1승 단위법은 나타낼 수 있는 수가 너무 적어 불편하다. 그래서 10의 4승 단위법을 쓰기도 하지만, 단위가 조 이상을 넘어가면 ‘십경, 백경, 천경, 해’처럼 익숙하지가 않다. 그래서 큰 수를 일상으로 쓰는 단위인 만, 억, 조 등으로 나타내기 위해 10의 8승법이 사용됐다. 단,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10}^{8}$), 십억, 백억, 천억, 만억, 십만억, 백만억, 천만억, 조(${10}^{16}$), 십조, 백조, 천조, 만조, 십만조, 백만조, 천만조, 경(${10}^{24}$) 등으로 단위를 올린 것이다. 이런 단위법을 쓰면 조가 10의 16승이 돼 천문학적인 큰 수라도 쉽게 나타낼 수 있다.

억세게 좋은 기회, 천재일우

천재일우(千載一遇)는 10의 4승 단위법으로 센 것인데, 재가 10의 44승이므로 천재는 10의 47승이 된다. 천재일우의 기회는 10의 47승분의 1의 확률로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니, 엄청나게 희박한 기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억겁은 어떠한가. 겁은 공식적인 단위수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의미를 갖는 시간 단위다. 불교에서 정의하는 겁은 거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이다. 달구지로 한나절 걸리는 거리(약 14km)를 한 변으로 하는 정육면체의 바위를 선녀의 옷자락으로 1백년에 한번씩 스쳐 바위가 다 닳아 없어져도 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그 바위 만한 크기의 그릇에 겨자씨를 채워 1백년에 한 알씩 꺼내 다 없어질 때까지다. 그러니 겁이 억 개나 있는 억겁은 상상조차 어려운 오랜 시간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은 바로 영원의 의미가 된다.

옛날 중국 한나라의 무제 때 동방삭이라는 사람은 황제에게 바치기로 돼 있던 천도복숭아를 훔쳐먹고 신선이 돼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한다. 동방삭의 이야기는 장수를 이야기할 때는 어김없이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이때의 삼천갑자가 얼마나 되는 시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우선 1갑자(甲子)는 10간12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60단위를 일컫는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등등으로 조합해나가 60개의 간지가 생긴다. 해마다 그 해의 간지를 정묘년, 무진년 등으로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회갑과 환갑은 1갑자(60년)가 지나 자신이 태어난 해의 간지가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다. 동방삭이 살았다는 삼천갑자는 그러므로 1만8천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방삭은 실존인물이라 1만8천년이라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뜻인데, 이것은 너무 허황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삼천의 천을 ‘일천 천’(千)이 아닌 ‘옮길 천’(遷)으로 해석하고, ‘갑자를 세 번 옮겼다’ 해서 1백80년으로 생각한다. 세계 여러 곳에 1백30세를 넘는 장수자들이 있듯이 1백80년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과장이다.

천 단위와 만 단위, 동양과 서양

여기 돈이 31,500,030,000원 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돈을 만지는 직업에 있는 사람 빼고 이것을 금방 3백15억3만원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답은 서양식 단위수를 올리는 방법이 우리의 방식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방식은 만(${10}^{4}$), 억(${10}^{8}$), 조(${10}^{12}$)가 모두 10의 4승 단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영어의 thousand(${10}^{3}$), million(${10}^{6}$), billion(${10}^{9}$), trillion(${10}^{12}$)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식은 10의 3승 단위로 올라간다. 때문에 31,500,030,000의 세자리마다 찍은 콤마는 서양식 표기이다. 세자리마다 콤마를 찍어두면 서양사람은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읽기 쉽게 하려면 차라리 네자리마다 콤마를 찍어야 만, 억, 조를 금방 알 수 있다. 과학사학자 박성래 교수(외국어대)는 일찍부터 네자리 콤마법을 써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서기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해서 온 세계가 흥분하고 있다. 천년왕국인 밀레니엄은 10의 3승 단위를 쓰는 서양문화에서 만들어진 의미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만년왕국이 돼야 할 것이다. 오래도록 녹지 않는 히말라야의 눈을 만년설이라 하고, 멀고먼 미래를 ‘자손만대’라고 하듯이 우리는 만 단위에 의미를 부여해왔다. 서양에서 1천이라는 숫자가 무엇의 끝이거나 다시 시작하는 단절과 분절을 의미한다면 동양의 만(萬)은 거의 변하지 않는 영원을 상징한다. 새 천년을 기다리면서 불의 심판이니 세상의 종말이니 하면서 온갖 허황한 참설들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끝이 없는 만년왕국을 상상할 수 있을까.

199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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