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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절대불가침의 영역 적십자

십자군 원정에서 기원


공포감을 일으키는 나치 문장. 십자가의 한 형태에서 발생했다고 추측된다.


중세 유럽에서 발달한 또하나의 아이콘이 있다. 집단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이다(과학동아 97년 8월호 참조). 하지만 중세의 문장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단지 귀족들만이 문장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더욱이 문장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문장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8차례에 걸쳐 벌어진 십자군 원정에서 기사의 방패에 새겨진 문장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황은 기독교인들에게 당시 이슬람교도들이 장악하던 성지 예루살렘을 재탈환해줄 것을 요청했다. 기사, 순례자, 농부를 비롯한 수천명의 유럽 기독교들은 이 요청에 부응해 서유럽에서 팔레스타인(현 이스라엘)에 이르는 험난한 길을 향해 원정을 떠났다.

이 지루하고 치열한 전쟁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표식은 바로 십자가였다. 십자군이 어느 민족 출신이냐에 따라 십자가의 모양이 약간씩 달랐을 뿐이다.

십자가의 영향은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유럽의 많은 나라 국기에 십자가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세계적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 것은 바로 ‘구호의 상징’인 적십자 마크다.

적십자가 창립된 계기는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참여한 스위스의 뒤낭이 전쟁에서 구호단체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쓴 ‘솔페리노의 회고’였다. 뒤낭은 부상을 당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국제적인 상설기관이 설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군위생부대의 보조기관으로 스위스에 국제적십자위원회를 설립하고 각국에 적십자사를 설립하자는 내용이 결정됐다. 적십자사와 소속 간호요원에게는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지위가 주어졌다.

적십자의 마크는 만국공통으로 흰 바탕에 붉은 십자 모양이다. 뒤낭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국인 스위스 국기의 배색을 뒤집은 형태다. 전장에서 천막 위에 적십자를 표시해두면 비행기는 이곳에 공습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한편 이슬람교 국가들은 적십자 마크가 기독교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불만스러워 했다. 예를 들어 터키는 1876년 적십자 대신 적신월(赤新月)을 사용하겠다고 으름짱을 놨다. 이집트,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도 여기에 동조했다. 이후 이 주장은 제네바 협약에서 받아들여졌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인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재현된 모습이다. 한편 십자가는 ‘공포’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바로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문장 때문이다.

사실 나치문장에 대한 기원은 정확치 않다. 다만 이 문장은 고대부터 사용돼 왔으며, 십자가의 한 형태로부터 변형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한 설명에 따르면, 이 문장이 백인의 원조인 아리안족이 ‘최고의 상징’으로 여긴 탓에 히틀러가 독일인이 아리안족의 적자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위대한 조상의 피를 물려받아 유럽 통일의 영광을 달성하겠다는 의미였다.


가옥 벽면에 부착된 그림 왼쪽에 물고기 형상이 있다. 예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대문에 표시한 물고기 아이콘 -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

십자가 외에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쉽게 파악한 아이콘은 예수를 상징하는 물고기였다. 그리스어로 물고기(ICHTHUS)는 묘하게도 ‘Iesous CHristos Theou HUios Solter’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의 머릿글자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대문이나 집 벽에 물고기 표시를 해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려 왔다.

물고기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와 연관성을 지닌다. 우선 예수가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를 제자로 맞을 때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또 예수가 행한 기적 중의 하나인 오병이어(五餠二魚), 즉 떡 다섯조각과 물고기 두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인 사례가 있다.

수도사가 독점한 글쓰기 - 18세기 신문 등장하면서 문맹 해소

중세에 글을 쓰는 일은 수도사들이 거의 독점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샤를마뉴 역시 문맹이었다. 그는 왕실 문서에 결재를 할 때 필경사가 마련해준 서명 자리에 십자표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수도사들은 로마의 알파벳으로 고대의 글씨를 베꼈을 뿐 스스로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다. 단지 여러가지 화려하고 다양한 글씨체를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이들이 주로 베낀 책은 성경이나 예배문 정도였다.

일반인에게 글씨가 익숙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445년 경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이래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이 등장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지나고 나서야 일반인의 문맹은 깨지기 시작했다.

199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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