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는 다른 원소들과 어울려 서로의 효용을 증가시키는 지혜를 가진 원소이다. 태양에서 핵융합을 일으켜 생명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도 수소이고, 수소결합을 이용해 물을 액체상태로 붙잡아두고 세포활동을 위한 용매로 활용하는 것도 수소이다.
자연계의 원소 분포를 탐구해보면 자연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별들의 원소 성분도 지구와 별로 다를 게 없으리라 생각됐다. 그러나 지금은 우주 전체에는 수소와 헬륨이 3:1 정도의 질량비로 섞여 있고, 다른 모든 원소의 합은 1%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밤하늘의 별이나 태양은 수소가 헬륨으로 바뀌는 핵융합반응에 의해 빛을 내는데, 이들 항성에서 수소와 헬륨의 질량비가 거의 3:1이다. 별들은 원소 분포의 관점에서 우주의 축소판인 셈이다.
수소의 우주와 산소의 지구
우주의 원소분포는 지구와 다르고, 우주에 제일 많은 원소는 수소라는 사실은 한 무명의 대학원생에 의해 밝혀졌다. 1920년대 하버드대학 천문학과에 유학하고 있던 영국인 여학생 세실리아 페인은 수많은 별로부터 나오는 빛을 조사하다가 모든 별은 수소의 흡수 스펙트럼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산소, 철 등 무거운 원소의 스펙트럼은 수소에 비해 거의 1백만분의 1 정도로 약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시선을 지구로 돌려보면 우리 주위에는 수소보다는 산소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삶의 터전인 대지의 대부분이 실리콘과 알루미늄의 산화물이다. 또 산소는 오대양에 가득한 물의 질량의 90% 정도를 차지한다. 대기의 20% 정도도 산소이고, 동식물이나 미생물을 살펴보아도 생태계의 대부분의 화합물에는 빠짐없이 산소가 들어있다. 그렇게 보면 지구는 우주에서 아주 특이한 화학적 환경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입장에서 볼 때 1백여 가지의 원소 중 어떤 원소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뜻 생각하면 생체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은 유기화합물이고, 유기화합물은 한마디로 탄소의 화합물이니까 탄소가 제일 중요한 원소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 산소가 풍부한 지구의 특수 상황을 생각하면 생명에서 산소가 제일 중요한 원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 주저함이 없이 수소를 생명의 원소로 꼽겠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자.
모든 원소의 어버이
우주에 수소가 많듯이 우리 몸에도 수소가 많다. 우리 몸무게의 약 70%는 물이다. 물분자 하나에는 산소 원자 1개와 수소 원자 2개가 들어있다. 나머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질에도 탄소나 산소보다 많은 수의 수소가 들어있다. 따라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하나씩 볼 수 있다면 대부분의 원자는 수소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생체 분자를 구성하는 탄소, 산소, 질소, 인, 황뿐 아니라 철, 구리, 코발트, 아연 등 필수 미량 금속 원소들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수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다른 종류의 원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원자핵에는 어김없이 수소의 원자핵인 양성자가 들어있는 것이다. 사실 원소의 종류가 다르다는 말은 원자핵에 들어있는 양성자의 수가 다르다는 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모든 원소는 결국 기본 원소인 수소가 여러개 모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세기 천문학과 물리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주의 기원인 빅뱅의 순간 0.00001초 이내에 만들어진 양성자(수소의 원자핵)와 중성자로부터 약 3분 이내에 헬륨 원자핵이 만들어졌다. 수소와 헬륨은 수억년 후 우주 공간에서 별과 은하계를 만들면서 다시 만난다. 이들은 수십억년에 걸쳐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을 하고 에너지를 생성하면서 더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어냈다. 이렇듯 어렵게 생겨난 무거운 원소들은 초신성 폭발을 통해서 우주 공간으로 퍼져나갔다가 어떤 인연인지 은하계의 일부인 태양계, 또 그의 일부인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몸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원소들의 오딧세이는 수소로부터 시작됐으니 수소는 모든 원소의 조상이자, 원소계의 아담이다. 또한 수소는 생명에너지의 근원이기도 하다.
생명체는 어디에서 에너지를 얻어서 생명 활동을 영위해 나갈까? 태양을 포함해서 우주의 대부분 별에서는 수소가 헬륨으로 바뀌는 핵융합 과정에서 일부의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면서 빛과 열이 나온다. 별들은 냉혹한 우주 공간에서 여기 저기 타오르는 모닥불인 것이다. 별들 중 하나인 태양으로부터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동물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어서 에너지를 취하는데 반해, 식물은 자체적으로 태양 에너지를 활용하는 광합성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결국 지상의 모든 생물을 먹여 살리는 에너지는 식물이 엽록소라는 세포를 통해 태양에너지로부터 변환한 생명에너지인 것이다. 태양에너지는 또한 궁극적으로 수소가 자기 몸의 일부를 희생해서 내는 것이므로 지구 생명체의 에너지의 근원도 결국 수소가 아닌가.
물의 가치는 수소결합 때문
음식을 안 먹고 단식을 해도 며칠씩 견딜 수 있지만, 물은 꼭 마셔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물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질, 핵산같이 특수한 생리적 기능을 가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생명활동에 중요할까.
물의 중요성은 모든 생체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점에 있다. 세포 내의 생체 분자들이 굳은 시멘트에 붙잡힌 자갈같이 꼼짝 못한다면 생명현상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생명 현상의 핵심인 대사, 항상성 유지, 유전, 진화는 모두 화학 변화에 의해 일어나며, 화학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원자, 분자간의 접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물은 대부분의 생체 분자들을 녹여서, 이들이 서로 만나고 상호작용을 해 화학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동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구 이외 행성에서의 생명 존재 가능성을 조사할 때는 먼저 물을 찾는다. 화성에 다량의 물이 존재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 예전에 이곳에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흥분으로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물이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메탄이나 암모니아처럼 상온에서 기체로 날아가 버리지 않고 액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이 상온에서 액체를 유지하는 이유는 물분자들이 제각기 개인 행동을 하지 않고, 하나의 물분자의 수소가 이웃 물분자의 산소와 ‘수소결합’을 통해 친밀한 상호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분자 내에서의 산소와 수소는 공유결합이라는 아주 강한 결합으로 묶여 있다. 이들은 신체 내에서 팔다리가 강하게 연결돼 있는 것처럼 아주 단단해서 좀처럼 떼어내기 힘들다. 반면 수소 결합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화합을 다짐하는 정도의 약한 결합이다. 물을 끓여 수증기 기체로 만드는 것은 이 약한 수소결합을 열로 깨뜨리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약하지만 꼭 필요한 수소 결합이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물은 수증기로 증발하고 말 것이다. 한 분자 내에서 수소와 산소가 아무리 강하게 결합해 있더라도 다른 분자와 수소결합으로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물분자들은 단숨에 뿔뿔이 흩어져 기체로 날아 가버릴 것이다.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였다
생명 현상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생체 고분자를 든다면 DNA와 단백질을 빼어 놓을 수 없다. DNA는 염기 서열을 통해 온몸의 유전 정보를 저장하고, 이 정보는 필요에 따라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로 번역돼 다양한 단백질의 기능을 가능하게 해준다.
DNA의 두가닥 사슬은 마주보는 염기들이 손에 손을 잡는 정도로 비교적 약한 수소 결합에 의해 이중나선 구조를 유지한다. 만일 두 개의 나선이 두 개의 통나무 사이에 나사를 끼운 것 같은 공유 결합으로 단단히 결합돼 있다면 DNA를 복제해서 자식 세포에게 물려줄 때나, DNA의 유전 정보를 RNA로 전사하기 위해 이중 나선의 어떤 부분을 두 개의 가닥으로 벌릴 때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다행히도 수소 결합의 세기는 공유 결합의 세기의 약 10분의 1밖에 안되기 때문에 나사를 푸는 대신 벨크로(일명 찍찍이)를 떼는 정도의 에너지로 중요한 세포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소결합은 단백질이 각기 맡은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백질의 기능은 수백개에 이르는 구성단백질의 아미노산들이 3차원으로 꼬이고 겹치는 3차 구조가 중요한데, 수소결합은 바로 아미노산들을 서로 가볍게 얽어매 주어 유용한 3차 구조를 만들어준다.
물, DNA, 단백질 등에서 보듯이 수소 결합은 적당한 세기의 벨크로 역할을 맡고 있다. 모든 생체 화합물의 구조가 나사못으로 이어진 것처럼 견고하기만 하다면 생명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세포막 구조 지탱
처음으로 지구상에 원시 생명체가 등장한 것은 지금부터 약 36억년 전이라고 한다. 태양계와 지구가 생긴지 약 10억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때 원시 바다에 떠다니던 생명의 기본 물질들을 가두어 두는 자루가 개발됐다. 생명의 기본 단위로서 세포가 출현한 것이다. 세포 안의 소우주와 세포 밖의 전체 우주를 구분하는 세포막은 인지질 이중막이라는 특수한 구조를 가진다. 세포의 내부나 외부나 모두 대부분이 물이기 때문에 세포막은 안과 밖이 모두 친수성을 가진다. 그러나 막 전체가 친수성 물질로 돼있다면 물에 녹아서 막의 구조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중막 각각의 안쪽은 물과 섞이지 않는 소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막의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이 소수성 부분은 대체로 긴 탄화수소의 꼬리 모양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탄화수소인 휘발유가 물과 섞이지 않듯이 이중막의 탄화수소 꼬리가 소수성인 이유는 긴 탄소의 사슬에 ‘수소’가 결합돼 있다는 데 있다. 수소와 탄소의 전기음성도(전자를 끌어들이는 정도)가 비슷하기 때문에 수소와 탄소 사이의 결합 극성이 아주 낮아서 극성이 높은 물과 서로 잘 섞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포막에는 어느 정도의 유동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필요에 따라 세포막의 크기와 구조를 바꿀 수도 있고, 물질을 통과시키는데 필요한 단백질을 끼워 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름 종류 물질로부터 알 수 있듯이 탄화수소는 모두 유동성을 가진 물질이다.
함께 번영하는 지혜
이렇게 살펴보면 수소의 특수한 역할을 떠나서는 생명을 생각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수소처럼 흔한 원소가 아니라 다른 희귀한 원소가 이렇게 다방면으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면 생명이 생겨날 확률은 훨씬 작아졌을 것이다.
수소 자체는 가볍고 끓는점이 아주 낮은 기체이다. 따라서 수소를 생명의 기본 원소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수소를 지구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 자연은 물이라는 간단한 화합물을 통해서 고향을 찾아 우주 공간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수소를 붙잡아 둔다. 그리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소 결합이라는 방법으로 수소를 이용해서 물을 액체 상태로 붙잡아 두고 세포 활동을 위한 용매로 활용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탄소가 수소를 붙잡아서 다양한 유기화합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보면 수소는 다른 원소들과 어울려서 서로의 효용을 증가시키는 지혜를 가진 원소인 셈이다. 우주에 가장 많은 원소인 수소가 이처럼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생명의 원리는 참으로 아름답고 놀라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