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원소 주기율표'를 만들어 근대 화학의 수준을 한단계 높인 과학자 멘델레프. 그가 위대한 화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최초의 계기는 '죽음을 불사'하고 아들의 교육에 열을 올린 어머니의 노력이었다.
멘델레프는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16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하고 독학에 몰두한 '신세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누구 못지 않은 뛰어난 학식을 갖추었으며, 자식들에게 항상 "육체만을 위해 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강조했다.
멘델레프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이었는데, 멘델레프가 태어나자마자 심한 눈병을 앓아 실명하고 결국 직장을 떠났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연금이 나왔지만 대가족이 생활하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대가족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녀는 멘델레프의 외할아버지가 이전에 만들어둔 유리공장을 인수해 성공적으로 사업체를 끌고 나갔다.
그러나 멘델레프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불행한 일들이 이어지면서 집안은 풍지박산났다.
어머니는 마지막 희망을 자식에 걸었다. 그녀는 멘델레프를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해 고향을 버리 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7세. 눈보라 속에서 우랄 산맥을 넘고 볼가강을 건너 는 험난한 도보여행이었다. 오로지 목적은 하나, 즉 막내 아들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모스크바 대학의 입장은 '입학 불가'였다. 이전까지 멘델레예프가 받은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멘델레예프는 당시 어머니의 낙담한 얼굴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선택한 차선책은 아버지의 모교 성페데르스부르크 대학의 의학부였다. 입학은 무난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해부학 수업 시간에 시체를 보고 놀라 그만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의학생의 자격이 박탈됐다.
다음해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가 다닌 교육학부에 멘델레프를 입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학생 시위 때문에 그 해에는 모든 과의 신입생 모집이 중지된 상태였다. 어머니는 아 버지와 동창인 학장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어머니의 필사적인 애원에 감동한 학장은 예외적으로 원서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멘델레프는 수리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기나긴 실패의 과정 끝에 본격적인 학문탐구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멘델레예프가 가족에게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어머니가 멘델레예프가 입학한지 며칠 후 사망한 것이다(1850년). 자식 교육에 너무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당시 멘델레예프 나이는 16세. 어린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깊이 간직하며 도시의 낯선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학업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