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유럽은 계몽사조의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중세의 봉건적 사회 질서를 부수고 이성이 지 배하는 밝은 세계를 만들려는 개혁의 풍조였다. 철학자, 사상가, 문인이 주축을 이룬 계몽철학자들은 무지로부터 깨어나 이성과 지식에 바탕해 사고하려고 노력했다.
계몽철학자들은 특히 뉴턴 과학을 중시했다. 이들은 뉴턴이 진리를 추구한 방식이 가설이나 독단 없이 수학적, 합리적, 실험적 방법만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또 이런 방법을 통했기 때문에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계몽철학자들은 사회의 다른 모든 분야들도 뉴턴과 같은 방식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계몽철학자인 프랑스의 볼테르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거의 15년 동안 뉴턴 과학을 연구하고 소개하는데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볼테르에게 커다란 도움을 준 사람은 동거하던 애인 샤틀레(1706-1749) 후작부인이었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작가가 되기를 희망했던 볼테르는 한 귀족과의 충돌 때문에 1725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볼테르에게 영국은 프랑스와 많이 달라보였다. 과학자나 학문을 갖춘 지식인이 존경받는 사회였다. 때마침 치러진 뉴턴의 장례식은 왕의 장례식처럼 성대했다. 볼테르는 뉴턴 과학을 소개 함으로써 프랑스의 불합리한 점들을 개선하려고 마음먹었다.
볼테르의 저작 '뉴턴철학의 요소들'은 일반 지식인을 대상으로 뉴턴의 업적을 소개한 최초의 책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애인 샤틀레 부인이었다. 샤틀레 부인은 19세 때 샤틀레 후작과 결혼했는데, 세아이를 낳은 뒤 과학에 관심을 쏟았다.
볼테르가 뉴턴과학에 심취한지 얼마 안돼 두 사람은 만나 연인이 됐다. 볼테르는 샤틀레를 여러 프랑스 학자들에게 소개했다. 한 물리학자는 그녀에게 수학을 가르쳤는데 "그녀는 수학에 대한 이해가 빠른 뛰어난 학생"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샤틀레 부인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훌륭하게 번역했다. '프린키피아'는 현재까지 유일한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남아있다. 여러 세대의 프랑스인들이 이 책을 읽었는데, 내용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방대한 양의 주석을 첨부한 점이 돋보인다.
볼테르가 이 책을 읽고 뉴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또 샤틀레 부인은 볼테르가 뉴턴 철학에 관한 책을 쓸 때 수학에 대한 부분에서 막히면 볼테르에게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러나 샤틀레 부인은 비운의 말년을 맞았다. '프린키피아'번역 집필을 끝낼 무렵 그녀는 42세의 나이에 볼테르의 아이를 가졌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그녀는 산고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해 며칠 수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프랑스 지식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불후의 번역본이 발간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