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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뒤에는 숲이 있었다.

숲은 인류가 성취한 문명 발달의 견인차였다. 지난 수 천년 동안 인류의 문명발달과정을 되돌아보면, 건축재나 연료원으로, 그리고 정보의 축적(종이)에 사용된 나무나 숲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문명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숲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오늘날 향유하고 있는 문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숲은 흔히 인류가 성취해낸 문명 발달의 숨은 공로자로 불린다.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 뒤에도 어김없이 존재했던 숲의 숨은 공로를 조선백자에서 찾을 수 있다.

“17세기 초 조선시대 백자 철용문 항아리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상가를 훨씬 웃도는 7백65만달러(약 1백억원)에 팔렸다”(동아일보 96년 11월 1일자)는 기사 내용처럼 조선백자는 세계가 주목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산이다. 이름 없는 장인들의 손으로 빚어진 도자기들은 조상들이 누렸던 삶에 투영돼 하나의 예술품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들 귀중한 문화유산을 돈으로 따지는 것 자체가 선조들의 심미안과 장인들의 예술혼에 누를 끼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처럼 물질 중심의 가치관이 판치는 세상에는 오히려 우리 것의 소중함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오늘날 이렇게 세계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조선백자나 고려청자가 기실 이 땅의 숲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6-17세기에 제작된 조선백자


재생 가능한 자원

산림을 재생가능한 자원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생장량 만큼만 매년 베어 쓰면 영구히 계속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은행에 예치해 둔 원금은 손대지 않고, 이자만 찾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산림으로부터 수확을 해마다 균등하게 그리고 영구히 계속되도록 경영하는 것이 산림을 소유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경영원칙이다. 이를 보속(保續)원칙이라 한다.

보속개념은 18세기 독일의 여러 산림학자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됐다. 오늘날 독일이 가장 앞선 임업기술을 보유한 나라로 각광 받는 이유도 숲을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보속개념을 숲에 실제로 적용해 왔기 때문이다. 보속개념은 더욱 정제돼 항속림(恒續林: 산림이 포용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항상 건전하고 조화롭게 결합돼 있을 때 산림도 건전하게 발육한다는 개념)이나 법정림(法定林: 엄정하게 보속적으로 목재 수확을 할 수 있는 상태의 숲) 사상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속가능한 양식으로 산림자원을 경영해야 한다는 보속원칙은 임업경영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있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도 임업경영 지도원칙의 하나로 여전히 중시되고 있다.
 

백자를 굽는데는 소나무를 연료로 사용했다.


자기 땔감 공급처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임업선진국 독일이 근대임업을 시작한 18세기 이후 임업경영의 중심 개념으로 채택했던 보속원칙을 독일보다 1백년 앞서 이미 조선시대에 시행하고 있었다. 비록 오늘날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17세기 1백여년 동안 지속된 보속원칙의 현장을 분원시장절수처(分院柴場折受處)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산림이용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흥미 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분원시장절수처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분원이란 왕실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해서 사옹원에서 경기도 광주군에 설치한 관요(官窯)를 말한다. 분원시장절수처란 관요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왕실에서 광주군 6개면의 산림을 딴 관청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도록 절수처로 지정해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땔감으로만 사용하게 했던 연료림이다. 10년에 한번 꼴로 나무가 많은 다른 절수처로 관요를 옮겨가면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땔감을 계속해서 확보할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인조 3년 8월 3일)에는 왕실에서 사용할 도자기를 생산하던 광주분원에 6-7개소의 분원시장절수처를 두었고, 10년에 한번 꼴로 장소를 옮겼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광주군은 조선초기부터 왕실에서 필요한 어용자기를 구워왔던 곳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1592) 이후에는 왕실의 반찬과 수라상을 관장하는 사옹원의 감관이 주체가 돼 광주분원을 본격적으로 경영해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광주분원이 땔감을 확보하기 위해 매 10년마다 새로운 절수처로 관요를 옮긴 내용을 요약하면 오른쪽 (표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630년대부터 1721년까지 약 90여년 동안 분원의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땔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9곳의 절수처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이미 17세기 초에 선조들은 산림이 지닌 재생가능한 자원의 특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러한 특성을 실제로 광주군에 설치된 관요에 직접 활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지속가능한 양식으로 산림자원을 이용하고자 했던 하나의 사례로 숲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활용의 과학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예이다.

1년에 땔감 5천t 필요

선조들은 도자기 생산을 위해 다량의 땔감을 채취하면 산림이 결딴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 가마는 전국 각처에 존재했다. 그리고 10여년 정도 계속해 한 곳의 연료림를 도자기 생산에 사용하면 산림이 바닥남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땔감용으로 지정된 산림을 10년만에 차례로 옮기고, 6-70여년이 지난 후 다시 처음의 산림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광주군에서는 오래 전부터 수공업으로 도자기를 생산했던 흔적은 옛 가마터의 발굴로 알 수 있다. 특히 선동리 가마터에서는 10년만에 돌아오는 간지(干支)가 새겨진 도자편이 발견돼 10년에 한번씩 수목이 무성한 곳(절수처)으로 분원을 옮긴 기록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광주분원의 관요에 필요한 연료량은 얼마나 됐을까? 기록에는 장작 8천거가 분원의 관요에 필요했음을 밝히고 있다. 장작 1거는 5-6태를 말하며, 1태는 2짐에 해당하는 분량이고, 장작 1짐은 약 50kg의 무게다. 즉 백자 1천5백입(개)을 생산하는 한 단위요는 약 50짐의 장작이 필요했고, 연간 2천 가마에서 약 3백만입의 각급 백자를 구워내는 데 소요되는 양이 바로 장작 8천거에 해당하는 분량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성기의 광주 분원의 관요에서는 1년에 대략 5천t(10만짐=5만태=8천거×6태)의 땔감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4백여년 전 절수처의 위치나 면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지리지의 광주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절수처의 규모와 땔감 생산량을 추정해 볼 뿐이다. “호수는 1천4백36호, 인구는 3천1백10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22명이요, 선군(船軍)이 2백 63명이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 되며, 개간한 밭이 1만6천2백69결(結)이다.” 즉 1천 4백여호에 달하는 농업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산림을 생각하면, 오직 넓지 않은 면적의 산림을 절수처로 지정해 공사의 사용을 제한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산림은 조선왕조가 내세운 산림이념처럼 자유스럽게 이용하게 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지방관청은 물론이고 거주민들의 의식주에 필요한 땔감이나 목재는 모두 인근의 산에서 해결했을 테니 말이다.

오늘날 광주군의 산림면적은 약 3만ha로 ha당 45㎥의 산림축적을 가지고 있다(광주군 김학영 식수계장). 만일 당시의 산림이 오늘날보다 울창해 산림축적이 약 1백㎥에 달했으면 각각 1천㏊, 모두 6천㏊의 산림이 시장절수처로 지정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표1) 광주분원 도자기 땔감 공급처


문화 뒤에는 숲이 있었다.

선조들은 소나무로 뒤덮힌 우리의 산림이 60여년이 지나면 복원됨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10년마다 시장절수처를 옮겨서 도자기를 구워냈고, 또 베어먹은 숲도 60여년이 지나면 새롭게 복구돼 다시 시장절수처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보속의 싹은 더 이상 자랄 수 없었을까? 두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산림이 생산해 내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소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번 벌채된 산림을 화전으로 개간해 경작지로 만든 농민들의 관행 때문으로 유추할 수 있다.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벌채된 산림이 화전으로 변하고, 종국에는 경작지로 변한 과정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조선 후기에 급격하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경작지가 필요했을 터이고, 그러한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벌채된 산림이 우선적인 대상지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조선백자도 기실 따져보면 숲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문화유산의 뒤에는 숲이 있었음을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래서 숲을 문명 발달의 숨은 영웅 또는 숨은 공로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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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전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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