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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주도하고 있는 아래아한글과 훈민정음


기술편의주의 배제 정품 사용 운동 절실

25일 동안 국민들은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한컴(한글과 컴퓨터)과 그들이 개발해낸 ㅎ·ㄴ글(아래아한글)을 지켜냈다.

한컴이 ㅎ·ㄴ글사업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지난 6월 15일. 이날 한컴은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적과의 동침’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이크로소프트(MS) 의 투자를 받아들이고, 국내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ㅎ·ㄴ글사업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7월 20일 한컴은 국민의 뜻에 승복하고 말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를 요청한 것을 철회하고, 그동안 국민운동을 벌여온 ‘ㅎ·ㄴ글지키기운동본부’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로써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던 ‘ㅎ·ㄴ글 사건’은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ㅎ·ㄴ글을 대체할 제2의 워드프로세서를 만들겠다는 나모인터랙티브와 나눔기술도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했다. ㅎ·ㄴ글이 회생된 마당에 자칫 ㅎ·ㄴ글의 경쟁상품이 될 제2의 워드프로세서를 새로 개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ㅎ·ㄴ글은 국민 워드프로세서

우리 주위에는 워드프로세서(문서편집기)를 비롯해 PC 통신, 인터넷,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책을 만들 때 쓰이는 DTP 프로그램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 말과 글을 표현하는데 장애가 있다. 이들을 이용해 ‘또ㅁ방’, ‘찌ㅍ차’라고 쓰면 ‘또ㅁ방’, ‘찌ㅍ차’라고 표현되고, ‘ㅎ·ㄴ글’이나 ‘△ㅠㅅ’(윷)과 같은 고어는 아예 쓸 수 없다. 이런 상황은 국어교육이나 중세 문서를 정리하려는 사람들을 매우 난감케 해왔다.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글 소프트웨어는 모두 한글을 자유롭게 구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리글인 한글의 우수한 조어력(造語力)과 고어(古語)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는 유감스럽게도 ㅎ·ㄴ글 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ㅎ·ㄴ글’이라는 워드프로세서가 간직하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또 많은 프로그램들이 한글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몰랐을 것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ㅎ·ㄴ글이 단지 수많은 소프트웨어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한글 문화를 지키고 있는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한글 지키기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면 퇴출돼야 한다는 자유경쟁 시장원리와 국제적인 환경을 수용해야 한다는 기술편의주의적 발상이 판치는 상황에서 ㅎ·ㄴ글 사건은 터졌다. 우선 컴퓨터업계 사람들은 한컴이라는 회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경영을 잘못하면 망하는 것이 기업생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 ㅎ·ㄴ글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인정하지만 마케팅에 실패한 제품 역시 퇴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ㅎ·ㄴ글지키기운동’은 지난 6월 18일 벤처기업협회(회장 : 이민화)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여기에 용산전자단지 상점가진흥조합, 한국대학생벤처창업연구회 등이 동참해 ‘ㅎ·ㄴ글포기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한컴과 마이크로소프트의 계약을 막았다. 또 1만원 모금운동을 펼쳐 한컴과 ㅎ·ㄴ글을 살리겠다고 나섰다.

이 운동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는 동안 ㅎ·ㄴ글지키기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다. 6월 22일에는 ‘3대 PC통신동호회 연합’ ‘한글사랑회’ ‘한글학회’가 ㅎ·ㄴ글지키기운동에 뛰어들었고, 7월 3일에는 정선경과 이경영(영화배우), 손지창 오연수 부부(탤런트) 등 많은 연예인들이 서명운동을 벌였다.

결국 7월 중순 ㅎ·ㄴ글지키기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1만3천여명에 이르렀다. 모금액도 2억원에 달했다. 또 무한창업투자 등 3개 창투사가 7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를 방관한 곳은 IMF 상황에서 외국기업의 투자가 위축될까 우려해 발을 빼고 있던 정부요, 한컴과 ㅎ·ㄴ글 문제를 강건너 불 구경했던 대기업들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전제조건인 자금 마련이 쉽지 않고, 설령 모금과 정부의 지원으로 자금이 마련돼도 그 주체가 국민적인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기엔 부적당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컴의 이찬진 사장이 허리띠를 같이 졸라매겠다고 나섰다. 언제 망할지 모르지만 국민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결단이었다.

“한컴은 어려운 국내경제와 열악한 소프트웨어산업 환경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유일한 타개책으로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투자를 받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ㅎ·ㄴ글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범국민적인 운동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 그는 ㅎ·ㄴ글지키기운동이 당장 한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ㅎ·ㄴ글이 지닌 사회경제적 의미를 지켜야 한다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ㅎ·ㄴ글 부활이 남긴 숙제

이찬진 사장의 결단은 정말 의외였다. 모두가 ㅎ·ㄴ글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한컴에 투자를 하든 안하든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한컴에 투자할 경우 자사 상품인 ‘워드’를 내세우기 위해 ㅎ·ㄴ글을 사장시킬 것이고, 마이크로소프트가 한컴에 투자하지 않을 경우 한컴은 부도를 막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컴이 ㅎ·ㄴ글지키기운동과 환상적으로 결합하면서 ㅎ·ㄴ글 사건은 제2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ㅎ·ㄴ글이 사라지더라도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현재 ㅎ·ㄴ글을 쓰지 않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 삼성의 훈민정음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가 더 편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사원은 “삼성에서 개발한 훈민정음이나 MS가 개발한 ‘워드’를 써보기 전에는 이들 프로그램이 ㅎ·ㄴ글보다 못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나 워드를 쓰다보니 프로그램이 안정적이고, 데이터베이스나 워크시트, 통신 등을 이용하는데 편리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비록 우리 말과 글을 표현하는 능력은 다소 ㅎ·ㄴ글에 뒤지지만, 다른 기능면에서 이들 프로그램이 앞서 있다는 평이다.

한편 삼성과 MS는 각각 훈민정음과 워드에 유니코드와 고어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니코드를 도입하면 1만1천1백72자의 한글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 ㅎ·ㄴ글과의 경쟁력도 갖추게 된다. 이는 분명 ㅎ·ㄴ글지키기운동에 물타기를 하는 것이지만,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ㅎ·ㄴ글의 기술력이 한수 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ㅎ·ㄴ글은 한글을 가나다순으로 정렬하는 소팅기능이 우수하고, 세로 방식으로 블록을 지정할 수 있다. 또 그동안 ㅎ·ㄴ글 사용자에게 상당한 매력을 줬던 단축키가 발달돼 있고, 1만6천자의 한자(워드 97은 4천8백88자)를 지원한다. 하지만 이 점만으로 ㅎ·ㄴ글이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ㅎ·ㄴ글도 새로운 기술 개발에 힘써야 한다. ㅎ·ㄴ글이 국민운동으로 부활한 만큼 제품의 질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시급한 것은 재원 마련이다. ㅎ·ㄴ글지키기운동과 한컴이 결합한 것은 의지일 뿐 자금마련 등의 숙제는 계속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지원이나 에인젤(벤처기업 투자가)이 필요하다.

정부가 나서 한컴과 ㅎ·ㄴ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장원리에 맞지 않다고 비판이 있어 왔다. 하지만 한컴과 ㅎ·ㄴ글이 지닌 상징성은 남다르다. 우선 ㅎ·ㄴ글은 국민이 합의해 부활시킨 소프트웨어이고, 문화상품이라는 점이다. 또 한컴은 한국의 대표적인 벤처기업이다. 그동안 정부는 입버릇처럼 벤처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게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면 한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컴의 경영이 문제일 수는 있지만, 한컴과 ㅎ·ㄴ글의 기술력마저 사장시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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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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