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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슐린을 추출하고 그 임상적 효과를 검증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프레더릭 밴팅은 1891년 11월 14일 캐나다의 온타리오주 앨리스톤에서 태어났다. 25세 때인 191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는 곧 캐나다 군의관으로 육군에 입대,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전선에서 종군했다.

밴팅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면서도 전상자를 헌신적으로 치료해 1919년 전쟁공로 십자훈장을 받았다. 밴팅은 전쟁이 끝난 뒤 잠시 개업 활동을 하다가 캐나다의 한 병원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훈련을 받았다.

최연소 수상 기록

그러나 밴팅은 의사보다 연구자가 되기를 원해 1920년 서온타리오대학교 의대에서 생리학 조교로 근무했다. 밴팅이 당뇨병에 깊이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밴팅은 당뇨병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1922년 토론토 대학교로부터 가장 큰 영예인 금메달과 함께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온타리오주 의회로부터 1만달러의 보조를 얻어 토론토 대학교에 밴팅-베스트 의학연구강좌를 개설했다. 법학과 이학의 명예박사학위도 얻었다.

그러나 밴팅의 생애에서 절정은 19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일이다. 당시로서는 가장 어린 나이(32세)에 노벨상을 받는 기록이었다. 밴팅이 개인 사정으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치 못해 노벨상 수상 강연은 2년 뒤인 1925년 9월 15일 행해졌다. 강연 제목은 ‘당뇨병과 인슐린’이었다.

하지만 밴팅의 여생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의학자로서 별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생애도 길지 못했다. 일찍 피는 꽃이 그만큼 일찍 지는 것일까?

밴팅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종군해 영국과의 연락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1941년 2월 21일 뉴펀들랜드에서 비행기 사고로 생애를 마쳤다. 만 50세가 채 안된 때다.

한편 밴팅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맥클리어드는 1876년 9월 6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듄겔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2세 때인 1898년 애버딘 의과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맥클리어드는 장학금을 얻어 1년 동안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유학해 생리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런던 대학교에서 저명한 힐 교수 밑에서 조교로 일했고 1902년 그곳에서 생화학 강사로 임명됐다.

그는 1903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클리브랜드에 있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의 생리학 교수로 임명된 후 15년 동안 재직했으며, 1918년에는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교에 생리학 교수로 부임해 생리학연구소 소장과 의과대학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맥클리어드의 연구 분야는 근육세포의 인(燐) 함량, 호흡생리학, 항공병, 전기 쇼크 등 매우 다양했으며 발표논문은 2백여편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탄수화물의 대사에 관심이 컸다. 별로 경력이 없던 밴팅의 성공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본 것은 그가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연구를 했으며, 이 가운데서도 당뇨병과 관련이 있는 탄수화물 대사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맥클리어드 역시 밴팅처럼 개인 사정으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해 그의 노벨상 강연은 1925년 5월 26일에 진행됐다. 제목은 ‘인슐린의 생리학과 동물체에 있어서 그 생산원’이었다.

모교에 금의환향

노벨상을 수상하기 이전인 1919년 이미 캐나다 왕립학사회 회원이 된 맥클리어드는 노벨상을 받은 뒤로 더욱 많은 영광을 누렸다. 1923년 영국학사원 회원, 1930년 런던왕립의사회 특별회원, 1932년 에딘버런 왕립학사원 특별회원으로 활동했다. 또 토론토대학교를 시작으로 케임브리지, 애버딘, 펜실베이니아,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제퍼슨 의과대학 등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밖에 로마의학회, 볼로냐외과학회, 로마외과학외, 독일학사원의 명예회원이 되기도 했다. 1928년 모교인 애버딘 대학교의 생리학 교수로 금의환향한 맥클리어드는 5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구실을 지켰다.
 

199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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