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괴물들이 SF 영화계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방사능에 오염된 돌연변이 괴물을 다룬 영화 '고질라'가 국내에서 상영되고 있고, 국산 토종 괴물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심형래 감독 '용가리 1988'이 제작 전부터 국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괴물은 예로부터 공포를 상징하는 '어두운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사람들이 괴물을 떠올리는 심리의 밑바닥에는 평론가 브라이언 스태블포드의 말대로 막연한 죄의식이 깔려 있다. 괴물은 대개 인간의 사악한 면이 투영된 것이며, 괴물을 없앰으로써 각자 숨겨놓은 죄악을 징벌하는 효과를 얻는다는 말이다.
괴물은 지구상의 어느 문화권에서도 관찰되는 보편적인 상징이다. 20세기 이전까지는 초자연적인 기원을 가진 경우가 절대다수인데 반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SF문학과 영화가 쏟아지면서 오늘날엔 상당수가 과학적 상상력의 산물로 탈바꿈했다. 그 형태나 기원은 이루 다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양하지만, 개략적이나마 유형별로 분류하면서 SF 속의 괴물들을 살펴보자.
세계 정복 꿈구는 미친 과학자 - 프랑켄슈타인이 원조
프랑켄슈타인은 원래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만들어 낸 박사의 이름이다. 그는 의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죽은 사람의 시체와 두뇌를 짜맞춘 뒤 강력한 전기충격을 주어 되살리는 실험을 한다. 실험은 성공이어서 괴물이 살아나지만 자신의 흉칙한 외모에 놀라 도망쳐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괴물을 겁내며 없애버리려 하고 괴물은 그런 인간들에게 분노해 점점 광폭해진다. 나중에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의 약혼녀까지 괴물에게 희생되자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필연적으로 제기하는 화두, 즉 "과학의 한계는 어디까지 이며 인간은 얼마나 신의 영역을 넘볼 수 있나" 하는 예민한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원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과학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주체하지 못해 금기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이후 SF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대개 세계 정복을 꿈꾼다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의도에서 괴물을 만들어낸다.
'프랑켄슈타인'은 1931년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성공한 뒤 오늘날까지 숱한 아류작들을 낳았다. 또 이 작품에서 묘사된 고뇌하는 과학자, 또는 광기에 사로잡힌 과학자상도 이후의 SF문학과 영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친 과학자 그 자체야말로 가장 SF적인 괴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습격하는 외계생명체 - 혐오스런 동물 외모 갖춰
지구가 아닌 다른 외계나 천체에 생물이 산다는 생각은 SF적 상상력의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외계 생물과 괴물의 상상적 결합은 어찌보면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그리고 '우주전쟁'은 SF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이런 상상의 결합을 이루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의 괴물은 화성인. 단지 지구인보다 우월한 과학기술문명을 지녔다는 점과 지구를 정복하려는 의도를 지녔다는 점 때문에 끔찍한 괴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주전쟁'의 괴물은 지구인을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지구의 감기 바이러스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지구인은 대개 가벼운 감기를 앓을 뿐이지만 화성인들에겐 치명적인 괴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괴물의 퇴치 논리도 과학적이었다는 점에서 '우주전쟁'은 SF적 성격에 더욱 훌륭하게 들어맞았다. 1954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외계 괴물'이라는 SF의 하위장르를 사실상 창조하고 그 기틀을 다져놓았다.
'우주전쟁' 이후 훨씬 공포스런 외계 괴물들이 속속 등장한다. 먼저 1938년에 발표된 소설을 원작 삼아 만든 '괴물'이라는 영화가 있다. 1951년에 처음 영화화된 뒤 1982년 다시 같은 제목으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82년판에 등장하는 외계생명체는 영화사상 가장 끔찍한 괴물로 꼽힐 정도다.
북극 탐사대원들이 얼음 속에서 아주 오래된 UFO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외계인 시체 하나를 끌어낸다. 기지로 운반된 시체는 얼음이 녹으면서 사라져버리고 마는데, 놀랍게도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똑같이 탈바꿈하며 진짜 행세를 한다. 탐사대원들이 하나둘씩 괴물로 바뀌지만 아무도 누가 진짜고 누가 괴물인지 모르는 가운데, 남아있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괴물들을 처치한다. 사람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결국 최후에는 두사람만 남는다.
그러나 이들 역시 서로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비단 시각적인 공포뿐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실존의 공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공포 SF'의 고전으로 높이 평가되는 걸작이다.
이처럼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불려나가는 외계괴물의 설정은 또다른 SF의 고전 '바디스내쳐'에서도 채택됐다.
원래는 잭 피니의 장편소설이며 1956년과 1978년, 1993년 에 세차례나 영화화됐다. 이 중 78년판은 '우주의 침입자'로, 93년판은 '바디 에일리언'으로 국내에 서 비디오로 소개됐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로 날아와 사람들을 하나씩 없애버리면서 가짜로 변해 버린다는 얘기다. 이 작품들에는 SF사상 가장 섬뜩한 '실존의 공포'를 주는 외계 괴물들이 등장한다.
괴물의 계보를 잇는 가장 유명한 외계인은 뭐니뭐니 해도 '에일리언'일 것이다. 1979년에 처음 영화로 등장한 뒤 현재까지 4편이나 이어지는 시리즈물이 됐고 외국에서는 소설이나 게임의 캐릭터로도 인기가 높다.
'에일리언'의 모티브가 된 외계인은 1939년에 발표된 반 보그트의 소설 '주홍색의 불협화음'에 처음 등장한다. 지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생물학적, 물리학적으로도 전지전능에 가까운 존재다. 반면에 '에일리언'은 지적인 존재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행동양태를 보인다. 강산성의 혈액을 지녀 금속을 녹이기도 하고 이질적인 생명체의 몸 안에 알을 낳아 번식하는 등 오늘날 SF사상 가장 대표적인 괴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1930년대만 해도 서구에서 나오는 싸구려 SF잡지들은 BEM(Bug-Eyed Monster), 즉 '퉁방울 눈이 달린 괴물'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곤 했다. 이것이 당시의 전형적인 외계인 괴물 모습이었다. 그러나 50년대에 '괴물'이 공포 SF영화의 붐을 일으킨 이후 외계 괴물의 형태도 매우 다양해져서 오늘날엔 BEM같은 구태의연한 외계인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독자나 관객들의 정서가 고급화돼 좀더 과학적으로 설득력과 사실감이 있는 괴물이라야 관심을 끌 수 있게 된 탓이다. 그래서 요즘의 외계 괴물은 지구의 혐오스런 동물 외모를 닮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스타십 트루퍼스' 의 여러 곤충형 외계생명체나 TV연속극 'V'의 파충류 외계인 등이 있다.
핵실험이 낳은 거대 괴수 고질라 - '왕마귀' '용가리' 등 한국 영화 출시
이 작품은 바깥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태평양의 신 비스런 섬에 킹콩을 비롯해 공룡이나 여러 거대 동물들이 살고 있다는 상황을 설정했다. 영화흥행 업자가 킹콩을 뉴욕으로 끌고와서 돈벌이에 이용하지만, 킹콩은 탈출해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거대 괴수 영화의 신기원은 1954년 일본에서 나왔다. 2차대전 당시 핵폭탄에 맞은 악몽을 괴물로 형상화시킨 영화 '고지라'다. '고릴라'와 일본말 '쿠지라(고래)'의 합성어인 '고지라'는 키가 1백 20m가 넘으며 입에서는 불을 뿜는 공룡 모양의 괴수다. 사실 이 정도 덩치의 동물이 체중을 지탱 하며 두발로 서서 돌아다니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관중들은 괴수가 주는 스릴과 공포를 만끽했다. 2년 뒤인 1956년에는 '괴물의 왕 고지라'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도 개봉됐으며,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려 20편이 훨씬 넘게 후속편이 이어지는 세계 최장의 SF영화시리 즈물로 자리잡았다.
올해 새롭게 개봉된 미국 헐리우드판 '고질라'는 바로 '고지라'의 리메이크작이다. 1954년 당시엔 실제로 태평양 비키니환초에서 미군이 수소폭탄 실험을 한 뒤 영화 '고지라'가 나왔다. 98년판 '고 질라'는 프랑스의 핵실험이 낳은 돌연변이 괴물로 등장한다.
또 1954년 실험 당시 방사능 낙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병에 걸려 고통받던 일본 참치잡이어선 제5류우큐우마루호의 선원들도 98년 판 '고질라'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됐다. 고질라의 습격을 받아 어선이 통째로 파괴된 탓에 오 로지 한명의 생존자만 남는다. 그는 조사단원에게 겁먹은 얼굴로 연신 "고지라…고지라…"를 되뇌 인다.
'고지라'는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작품을 낳았다. 전통적인 괴물 이미지를 형상화시킨 '대괴수 용가리'가 바로 그것이다. 1967년에 김기덕 감독(현 서울예술전문대 학장)이 연출한 이 영화는 당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 시장에까지 진출했다. 현재도 미국에는 비디오나 레이저디스크로 출시돼 있을 정도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해에 '우주괴인 왕마귀'라는 외계괴물 영화도 발표 됐다.
'고질라'가 리메이크된 것처럼 '대괴수 용가리'도 심형래 감독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올 겨울 개봉 예정인 '용가리 1998'은 제작 전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해외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거두고 있다.
'킹콩'이나 '고질라' '용가리' 등은 과학적 논리는 떨어지지만 인간의 심층에 잠재해 있는 거대한 것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한 것이어서 꾸준히 인기를 끈다는 분석이 있다. 혹자는 원시 인류가 공룡과 공존하던 시절의 기억이 흔적으로 남은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같은 거대 괴수들은 모두 '자연파괴에 대한 대가'라던가 '비뚤어진 과학기술의 산물'이라는 식으로 인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현재의 추세대로 문명이 계속 발달하는 한 이런 거대 괴수들의 인기 도 식지 않을 것 같다.
과학기술이 낳은 악몽, 로봇 - 탄생 후 창조자인 인간 제거
SF가 낳은, 전통적인 괴물의 이미지와는 가장 동떨어진 공포의 형태는 바로 로봇(컴퓨터)일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대표되는 로봇 괴물들은 특유의 무자비한 냉혹성과 강력한 물리력 때문에 박력있는 공포를 던져준다.
'터미네이터'도 따지고보면 인간의 뒤틀린 과학기술이 낳은 악몽이다. 컴퓨터에게 세계의 안전보장을 맡기자 그들은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즉 인간을 원초적으로 제거해버리는 작업에 들어 간다. 그 결과 21세기는 터미네이터가 판을 치는 인간 지옥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괴물 컴퓨터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로는 1977년작 '악마의 씨앗'을 들 수 있다. 주인공 과학자가 전 지전능한 인공지능 컴퓨터 프로테우스를 만들지만 컴퓨터는 탄생 직후부터 신으로 군림한다. 그는 과학자의 아내를 집에 가두고 생식을 시도해 세상을 지배할 인간 아기를 얻는다.
로봇이나 컴퓨터 괴물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즉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공지능체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인공지능체들은 자신의 불완전한 창조자인 인간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의 밑바닥에는 과학기술 발달이라는 진보를 결코 포기할 수 없으면서도 운명적으로 그 한계를 늘 염려해야 하는 인류의 고뇌가 담겨있는 셈이다.
가장 무서운 괴물은 인간? - 무의식에 감춰진 적대감
1956년에 발표된 영화 '금지된 행성'은 SF영화사상 손꼽히는 고전 걸작일 뿐만 아니라 평론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킨 기념비적 작품이기도 하다. 바로 '이드(무의식)로부터의 괴물'이라는 말을 낳은 작품이다.
지구의 순찰우주선 한대가 외계 행성에 도착한다. 이들은 연구차 와있던 지구인 과학자들이 모두 죽고 오로지 한명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정체불명의 괴물이 우주선을 파괴하고 승무원들을 하나둘씩 처참하게 죽이는 사건이 계속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 행성에 원래 살던 외계 문명이 멸망한 원인을 알아보다가, 이들이 마음 속에 담긴 생각을 물질로 형상화시키는 장치를 개발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숨겨진 적대감과 증오가 괴물을 만들어내 서로를 죽인 끝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혼자 남은 과학자도 그런 식으로 동료들을 모두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