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뇌 전문가가 귀국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1년 일본 교토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40여년 간 미국, 캐나다, 스웨덴을 돌며 신경과학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쌓아온 김승업 교수(61세다. 교수 생활 30여년 동안 배출한 제자 수십명이 세계 유수 대학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제 김교수는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아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국내 후진 양성에 몰입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김교수가 평생 품어온 화두는 한가지. '뇌세포를 시험관에서 살리는 방법'이다. 왜 이런 일이 필요할까.
"의사들은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을 대할때 모비를 보는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살아있을 적에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모르다가 죽은 다음 산소에 가서 묘비를 읽고 그 사람을 안다는 뜻이죠. 병의 원인을 제대로 뇌조직을 검사해야 하는데, 산 사람의 뇌를 꺼내 상세히 조사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환자가 사망한 후 부검을 하고 나서야 뇌에 어떤 이상이 왔는지 알수 있습니다."
파킨슨병 수술에 12명의 뇌 필요
뇌를 꺼내지 않고 살아있는 뇌세포의 생리를 연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험관에서 기르면 된다. 알츠하이머병이 처음 발견된 1907년 미국의 해리슨 박사는 신생아의 뇌조직을 꺼내 시험관에서 키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해 파킨스병, 헌팅턴병과 같은 많은 치매성 질환은 중년이 넘어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성인의 뇌질환을 연구하려면 성인의 뇌조직이 제격이다. 태아의 뇌세포는 충분한 정보를 얻어내기에 부족함이 많다. 김교수는 이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1978년 사망한지 5시간이 지난 48세와 65세의 성인으로부터 신경세포를 떼어내 배양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세포는 두달간 건강한 상태로 자라더군요."
해결의 열쇠는 생체 내 대사과정에서 촉매 역할을 하는 효소에 있었다. 태아의 뇌세포를 시험관에서 배양할 때 여러 영양분과 함께 효소를 처리하는데, 이상하게 이 효소가 성인의 뇌조직에만 닿으면 세포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김교수는 '태아용' 효소가 성인에게는 세포막을 녹일 정도로 독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세포 표면에 상처를 적게주는 새로운 효소를 발견했다. 1972년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신경병리학교실에 자리를 잡은지 6년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러나 남은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뇌세포의 양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 문제다.
일반적으로 실험실에서 세포를 배양한다는 말은 세포를 계속 분열시켜 대량의 집단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그러나 뇌세포는 다르다. 불가사의하게도 뇌세포는 한번 만들어지면 절대 분열하지 않는다. 사람의 뇌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식 세포를 낳아볼 기회도 없이 죽어가는 운명이다. 따라서 뇌세포를 배양한다는 것은 시험관에서 뇌세포를 건강하게 살린다는 말일뿐 여러배로 수를 늘린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까지 사람의 뇌세포는 기껏해야 간질이나 뇌종양에 걸린 환자를 수술할때 일부를 얻거나, 낙태 수술을 할 때 태아의 뇌로부터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죠."
뇌세포의 부족은 비단 실험실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치매에 걸린 환자를 치료할 때 건강한 사람의 뇌를 이식하는 수술이 행해지고 있는데, 이식할 뇌세포가 부족하다보니 수술이 제대로 진행될리 없다. 한 예로 중뇌의 일부가 손상돼 운동장애를 일으키는 파킨스병의 경우, 한번 치료하는데 6~9주 자란 태아(물론 낙태된 경우다) 12명의 뇌가 필요하다. 만만치 않은 양이다.
"스웨덴에서는 한 주에 하루를 낙태일로 따로 정해 한꺼번에 태아의 뇌를 수집합니다. 그러나 불과 2~3cm 크기의 생명체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뇌세포 양은 한정돼 있죠.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3백명 이상이 이런 수술을 거쳐 운동기능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인구 10만명당 1명꼴로 파킨슨병 환자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커다란 한계가 느껴집니다."
윤리적 문제도 강하게 발생했다. 몇년 전 미국에서는 파킨스벼에 걸린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나선 딸의 얘기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아버지의 정자를 받아 인공수정을 하고 그 아기로부터 뇌를 추출해 아버지에게 이식하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치료용'으로 자신의 태아를 팔겠다는 사람도 등장했다고 한다.
김교수는 유전공학에 희망을 걸고 있다. "섬유아세포처럼 구조가 간단하고 성장이 왕성한 세포에 뇌세포 유전자를 넣어 기르면 대량으로 인공신경세포를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성공한다면 뇌질환에 시달리는 수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김교수가 연구할 중요한 주제의 하나다.
3백여편의 논문
김교수가 평생 달려온 길은 '기초중의 기초' 분야다. 병원을 개업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다른 의대 출신에 비해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다.
"가끔 집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요. 동기나 선후배는 의사로 잘나가거나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그러던데 당신은 젊은날 그렇게 고생하고 지금 뭐냐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 어떤 대답을 하냐고 묻자 김교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른 얘기를 대신 꺼냈다. "내가 하는 연구가 세계의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가장 앞선 연구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 속에서 열정이 솟구칩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기초 과학의 연구 성과가 환자에게 직접 응용되는 기간이 무척 짧아졌어요. 제 연구결과에 따라 많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더 열심히 연구해야겠다는 각오와 긴장감이 생깁니다." 바로 이런 열정 때문에 그는 지난 40여년간 '사이언스' 와 '네이처' 를 비롯해 수많은 세계 학술지에 3백편이 넘는 논문을 쏟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