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1차 대전의 승리가 연합군 측으로 기울던 1918년 스웨덴의 노벨상 위원회는 공기 중의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데 성공한 독일의 프릿츠 하버를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노벨 화학상은 전쟁으로 인해 1916, 17년 연속해서 수상자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3년만에 맞는 경사였다.
 

암모니아 합성에 성공한 하버의 연구 덕택으로 독일은 1차대전 중 화약원료인 질산을 자급할 수 있었다.


전범으로 비난 받은 하버

그러나 노벨상 위원회는 커다란 반발에 부딪혔다. 영국과 미국의 과학자들은 항의 편지를 보냈으며, 전쟁이 끝난 다음 1920년 6월에 열린 시상식에는 이례적으로 스웨덴 왕족이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인 노벨상 수상자는 하버가 참석한다는 소식에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버는 전쟁 전까지만 해도 화학반응에 대한 열역학적 연구로 세계의 화학자들로부터 주목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화학결합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루이스는 하버의 연구를 정확성과 통찰력의 모델이라고 칭찬했다. 또한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은 식량 부족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됐다.

하버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에 대해 당시의 과학자들이 그토록 반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버가 독일 제국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하버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 소장으로서 연구소의 화학자들을 동원해 최초로 독가스 제조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개발하고 바스프(BASF)사를 통해 상업화시킨 암모니아 합성공정은 연합군의 해양 봉쇄로 칠레 초석의 수입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화약의 제조에 필수적인 질산을 자급할 수 있게 해줬다. 이 점에서 영국과 미국의 화학자들은 하버 때문에 전쟁이 길어졌다고 그를 격렬하게 비난했던 것이다.

기아 해결을 위한 귀중한 연구

전쟁으로 인해 하버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암모니아의 합성은 과학, 산업 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연구였다. 과학적인 면에서 보면 하버의 연구는 물리화학적인 방법의 유용성을 잘 보여준 것이었다. 반응의 열역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반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러한 반응의 최적 조건을 찾았던 것이다.

또 바스프사의 보슈를 중심으로 한 기술자들의 노력과 하버의 연구가 결합돼 실험실의 화학연구가 상업적 규모로 확대되는 과정은 정유, 석유화학, 천연가스 등과 같은 미래의 거대산업에 기본적인 모델이 됐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버는 기근으로 연결될 비료 부족을 해결한 셈이었다. 실제로 하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전쟁 중의 금수조치로 인해 굶어죽는 독일인의 수가 훨씬 늘어났을 것은 물론, 지금과 같은 식량증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세기 유럽 사회가 직면한 어려움의 하나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는 문제였다. 1898년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장인 크룩스는 지금까지 비료를 생산하는 원료로 사용된 칠레 초석이 20-30년 후에는 고갈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가능한 빨리 대기중의 질소를 고정하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04년 하버는 칼스루헤 공과대학에서 조수와 함께 30기압에서 반응하는 암모니아 합성 장치를 설계해 실험하면서 철 이외의 다른 촉매가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계속된 연구에서 2백기압, 5백℃ 라는 합성 반응의 조건을 찾는데 성공했다.

1909년 바스프(BASF)사는 이 공정의 특허권을 사서, 이를 실용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보슈의 지휘하에 기술자들은 값싼 촉매를 찾고, 암모니아의 수율을 높이기 위해 2천5백여 가지 화학 물질을 6천5백번에 걸쳐 실험을 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고온과 고압이라는 하버가 찾아낸 초기의 반응조건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하버의 공정을 상업화하는 데는 성공했다.

독일을 위해 봉사한 유태인 애국자

이것은 독일 군부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독일 군부는 단기전을 생각하고 칠레 초석을 많이 비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독일은 이 공장의 규모를 확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연간 질산 생산량이 6만t 규모가 됐고, 화약 제조에 필요한 질산을 자급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바스프 공장의 암모니아 합성 공정을 알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하버의 공정보다 비효율적이었던 시안 아미드 공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영국은 승전국으로서 바스프사의 문서를 조사해 공정의 비밀을 알아냈고, 이후 하버-보슈 공정은 영국과 미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버는 독일제국의 전쟁을 지원하는 업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했다. 하버는 유태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자신이 헌신적인 독일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고 자타가 인정했던 애국적인 독일 화학자였다. 베를린에 있는 그의 집 책상 위에는 빌헬름 2세가 직접 서명한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있었으며, 그가 독가스 제조에 참여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동료 화학자였던 부인과 이혼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버는 독일이 전쟁에 패한 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이 노력을 덜해서 조국이 패배했다고 여기며 자신을 학대했다. 하버는 독일이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치를 능력이 없다는 점을 알자,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며 연구소의 인원과 시설을 동원해 바닷물에 녹아 있는 금을 얻어내려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바닷물에 녹아있는 금의 함량에 관한 데이터가 부정확해 실패하고 말았다.

1933년 하버는 폴라니와 함께 나치의 정책에 반발해 연구소 소장직을 사임했다. 그해 4월에 제정된 법은 유태인의 공직 취임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버는 이 법에서도 예외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독일을 떠나 런던으로 갔다.

그는 런던에서 시온주의자이며 위대한 화학자였던 바이스만을 만나 이스라엘에 연구소를 건설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바이스만은 하버에게 연구소의 고위직을 제의했지만, 하버는 이듬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도중 스위스의 바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98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유지영 강사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역사·고고학
  • 정치외교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