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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매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추천 의뢰서에 대한 답장을 받아서 5인의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연구 검토 후에 다수결로 심사위원회의 추천자를 정한다. 그런 다음 아카데미 물리학 분과의 투표와 전체 아카데미의 투표를 거치는데, 이 3차례의 투표결과가 꼭 일치할 필요는 없다.
 

아인슈타인


단골 후보 아인슈타인

최종 수상자는 전체 아카데미의 투표로 결정된다. 따라서 수상자 선정에는 스웨덴 학계의 분위기가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노벨 자신이 유언에서 '발명', '발견', '개선'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20세기 초 스웨덴 물리학계는 실험을 강조했기 때문에 한동안 이론 물리학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10년부터 1922년까지 1911년과 1915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노벨상 추천을 받았다. 1913년까지는 특수상대성이론을 이유로 추천을 받았지만 심사위원회는 계속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실험적 확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08년 무렵부터 상당수의 물리학자들이 특수 상대성이론의 수식들을 널리 사용했지만 심사위원회는 거의 절대적인 확증을 요구했던 것이다.

1914년부터는 통계역학과 중력이론(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한다) 등 아인슈타인의 여러 가지 다른 업적들도 그가 노벨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1917년의 심사위원회 보고서는 실험증거가 불층분하다는 이유를 되풀이 하면서 아인슈타인을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수상위원회는 이론물리학을 싫어해

그러는 사이 아인슈타인에 대한 추천이 계속 증가하고 추천자들의 비중도 점점 더 높아갔다. 1919년에는 심사위원회에서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1905년 브라운 운동 논문(분자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최초의 직접적 증명이었다) 등 통계역학에서의 업적으로 상을 주자는 논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 학계에서 막강한 영항력을 지니고 있었던 아레니우스(1903년 노벨 화학상 수상)가 "아인슈타인이 그의 다른 주요 논문들 때문이 아니라 통계역학을 이유로 노벨상을 받는다면 ... 괴이하게 보일 터이니 아인슈타인의 다른 업적들이 실험적으로 확증되기를 기다리자"고 결론내렸다.

1919년 중력 때문에 빛의 경로가 휜다는 영국 과학자들의 관측 결과 발표도 1920년 심사위원회를 설득하기에는 부족했다. 1921년에는 12명의 추천을 받은 아인슈타인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대한 심사위원회 보고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1915년에 미국의 밀리칸(192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의해 확실히 실험적으로 확증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법칙이 선정 이유로 거론됐다.

그러나 아레니우스는 광전효과 법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론가인 플랑크(1919년에 1918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상을 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론가에게 상을 주기도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해 노벨 물리학상은 수상자를 발표하지 못한채 지나버렸다.
 

막스 플랑크


유명세에 굴복한 위원들

드디어 1922년에는 저명한 과학자들이 16명이나 아인슈타인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뉴턴 이래 최대의 업적이라는 평가도 많았고, 어떤 이는 "만일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없다면 50년쯤 후 여론이 어떨는지 상상해보라"고까지 할 정도로 압력이 거셌다.

그 와중에 심사위원회는 다시 상대성이론과 광전효과 법칙을 아인슈타인의 업적으로 심사했다. 이 해에도 상대성이론에 대한 보고서는 '몰이해'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였지만, 이 때 광전효과 법칙에 관한 보고서를 맡은 스웨덴 물리학자 오젠의 보고서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비로소 아인슈타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결정됐다.

하지만 심사위원장 아레니우스는 수상식에서 행한 수상 업적 소개 연설에서 "아마도 살아있는 물리학자 중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유명한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도 "대개의 논의는 그의 상대성이론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식론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철학계에서 활발한 토론의 대상이 돼 왔다"며 여전히 상대성이론을 평가절하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줘야 한다는 거센 여론 앞에서 노벨 물리학상 심사위원회는, 신중하다 못해 완고할 정도로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어쩌지 못해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줄 근거로 찾아낸 것이 광전효과 법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닐스 보어


상대성이론에 버금가는 불후의 업적

그렇다면 과연 광전효과 법칙은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었을까? 답은 간단히 '받고도 남는다'다.

노벨상 위원회가 간단히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이라고 부른 업적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 3월에 쓴 논문(브라운 운동 논문은 5월,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은 6월)을 가리키는데, 이 논문이 싹이 돼 비로소 양자역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의 앞 부분에서 흑체복사에 관한 통계학적 논의를 통해서 빛을 입자로도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그런 바탕에서 그때까지는 수수께끼였던, 광전효과를 지배하는 정량적 수식을 간단하게 유도하고, 그 수식에 플랑크가 1900년에 제시한 상수(지금은 이 상수를 플랑크상수라고 부른다)가 필연적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지적했다.

양자역학은 자연계의 상호작용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일어나고, 그 불연속적인 상호작용의 간격은 플랑크 상수에 의해 좌우된다고 본다. 그래서 흔히들 플랑크가 플랑크 상수를 제시한 1900년에 양자역학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물론 플랑크 자신도 자기의 1900년 논문이 "자연계의 상호작용이 불연속적이다"고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닿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이 자연계의 상호작용이 불연속적으로 일어난다고 분명하게 지적한 셈이었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이어받아 보어가 그 유명한 '보어의 원자 모형'을 만들어냈다.

양자역학 혁명의 시발점

한편 빛을 입자로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 상황으로는 너무나 혁명적이었다. 보어를 비롯해 불연속성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여러 물리학자들도 이점만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따르는 견해가 점점 세력을 넓혀갔고, 결국 1922년 미국의 콤프턴(192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빛이 입자(즉 물질)의 성질을 분명히 갖고 있다는 점을 실험적으로 확증했다.

또한 이런 생각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1924년 프랑스의 드 브로이(192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가 물질을 파동으로 볼 수도 있음을 제안했고, 그의 제안, 즉 물질파의 존재가 1927년 미국의 데이비슨과 영국의 G. P. 톰슨(전자 발견자인 J. J. 톰슨의 아들)에 의해 실험적으로 확인됐다(데이비슨과 G. P. 톰슨은 1937년 노벨 물리학상 공동수상).

1905년 논문에서 등장한 상호작용의 불연속성과 빛과 물질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생각은 본격적인 양자역학을 낳은 보른(195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파울리(194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슈뢰딩어(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디랙(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등의 업적으로 이어졌다.

즉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논문은 그의 상대성이론들이 낳은 혁명에 못지 않은,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더 거대하다고 평가하는 양자역학 혁명을 낳은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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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이관수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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