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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계의 노벨상 필즈메달

4년에 한번 시상

노벨상에는 수학이 없다. 그래서 노벨상은 과학상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왜 노벨상에는 수학이 빠졌을까. 또 수학자들이 수학 발전을 위해 만든 필즈상은 무엇인지를 알아본다.(이 원고는 지난 2월27일-28일 서울대에서 개최된 제4회 자연과학 공개강연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필즈상(Fields Medal)은 흔히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노벨상 못지 않은 영예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현대 수학의 발전에 이정표를 마련한 필즈상은 1936년 이후 지금까지 38명의 수상자를 냈다.

많은 사람들은 노벨상에 왜 수학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매우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노벨이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수학자인 미타그레플러와 삼각관계에 있었다는데서 찾는다. 이러한 연적설 이외에도 수학이 실용과학이 아니라는 점과 노벨이 수학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점도 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노벨상에서 수학이 빠진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노벨의 사생활과 유언을 둘러싼 여러 자료 등을 모아 알아보려고 한다. 또한 필즈상이 만들어지게 된 동기와 지금까지의 발전 경로를 알아봄으로써 현대 수학사를 재조명하려고 한다. 아울러 가장 최근(1994년)에 필즈상을 수상한 4인의 업적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노벨상에 수학이 빠진 이유 노벨 삼각관계설은 신빙성 없어

수학은 논리적인 사고와 사물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중시해 온 학문이다. 이 때문에 종종 과학보다는 철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수학은 다른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이론적인 학문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은 물리나 화학만큼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물리, 화학, 의학 등의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한 과학자에게 주는 노벨상에서도 제외됐다.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스웨덴 출신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를 위시해 유럽 내의 외국에서 보냈다. 따라서 노벨의 사생활이나 유언에 대한 해석도 그가 살았던 나라에 따라 차이가 많다.

프랑스인과 미국인들은 노벨의 유언에 '노벨 수학상'을 포함되지 않는 것은 노벨이 미타그레플러(1846-1927)라는 유명한 수학자와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웨덴인들은 만일 노벨 수학상이 있었다면 스웨덴 출신인 미타그레플러가 자기를 첫 수상자로 선정하도록 한림원에 압력을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안 노벨이 수학을 유언에서 제외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웨덴인들은 만일 노벨 수학상이 있었다면 스웨덴 출신인 미타그레플러가 자기를 첫 수상자로 선정하도록 한림원에 압력을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안 노벨이 수학을 유언에서 제외했다고 주자한다. 그리고 노벨이 미타그레플러가 첫 수상자가 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 이유는 자신의 연적(戀適)이어서가 아니라, 그 때문에 보다 우수한 다른 수학자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미타그레플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스웨덴 최고의 수학자다. 그는 왕성한 학회활동으로 스웨덴은 물론 유럽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코발레프스카야라는 유명한 러시아 출신의 여성 수학자를 길러냈으며, 지금의 스톡홀름대학으로 발전한 스톡홀름 호그스콜라(Stockholm's Hogskola)의 원장을 지냈다.

그렇지만 만일 노벨 수학상이 만들어졌다면 미타그레플러가 과연 첫 수상자로 지목될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럽에는 학문적으로 그를 앞선 프랑스의 푸엥카레(1854-1912)와 독일의 힐베르트(1862-1943)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타그레플러가 스웨덴 학계에 로비를 한다면 수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노벨상의 취지에 위배된다. 아마도 노벨이 미타그레플러를 의식했다면 이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한편 수학이 노벨상에서 제외된 것은 노벨이 수학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노벨의 유언을 집행하고 후에 노벨재단의 책임자가 된 레그나 솔맨이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해석이다.

노벨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사람에게 매년 그의 유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큰 상금과 함께 상을 주도록 유언했다. 그 상은 물리, 화학, 의학, 문학, 그리고 평화 등의 다섯 분야로 한정됐다. 이것들은 모두 노벨이 생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분야다. 물리와 화학은 노벨 자신의 직업과 연관이 있다. 문학은 평소 노벨의 문학에 대한 조예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상은 그의 이상주의와 '무기를 버려라'(Lay Down Your Arms!)라는 책을 쓴 베르타 폰 슈트너와의 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발명가이자 기술자였던 노벨은 과학상은 반드시 '발명이나 발견'을 통해 '실질적인 인류 복지'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당시 학문의 성격상 수학을 실용 분야가 아닌 것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물리만 보더라도 이론보다 실험 분야에서 휠씬 많은 수상자를 배출해 왔다.

이밖에도 노벨과 미타그레플러의 관계가 노벨 수학상의 부재와 무관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설명들이 있다. 노벨은 스웨덴 한림원의 멤버였지만 스웨덴의 학계와는 별로 교류가 없었다. 그는 성 페테르스부르그에서 학교를 다녔고, 1863년 이후로는 거의 스웨덴을 떠나 있었다. 1870년대 중반 그는 파리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타그레플러와 접촉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둘 사이에 어떠한 적대 감정이 존재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미타그레플러는 노벨이 사망하기 전 노벨 재산의 상당 몫을 호그스콜라의 기금으로 유치하려고 힘썼다. 만일 두 사람 사이에 응어리가 있었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노벨은 유언장을 두번 작성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작성된 첫번째 유언에는 호그스콜라가 다른 대상들과 함께 상속에 포함돼 있었다. 이는 미타그레플러의 노력의 결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두번째 유언에서 노벨의 유산은 전부 노벨상에 기증돼 그의 노력은 무산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타그레플러는 노벨상에 수학이 제외된 것과 관련해 수학계의 비난을 샀다. 더 많은 수학자들이 노벨 수학상이 없다는데 불만을 품었고, 그때마다 노벨과 미타그레플러의 관계가 이야기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수학의 역사를 볼 때 미타그레플러는 필즈상을 만든 존 찰스 필즈(1863-1932)와 다년 간의 우정을 통해 이러한 수학계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엄청난 유산을 털어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도 노벨.


지금까지 38명 필즈상 수상 노벨상보다 더 까다로워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필즈상은 4년마다 한번씩 개최되는 국제수학자총회(ICM)에서 지난 4년간 수학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수학자에게 수여된다. 필즈상의 수상자는 4명 이내로 국한되며 수상자의 나이도 40세를 넘을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다. 이 때문에 필즈상은 노벨상보다 더 까다로운 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필즈상을 만든 필즈는 캐나다 출신으로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학자다. 그는 유럽에 건너가 당대의 유명 수학자들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일생 동안 절친한 친구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미타그레플러를 만난 것도 이때다. 필즈는 1902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온 후 30년 동안 토론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학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수학자로서 여러가지 명예상을 받았으며 캐나다의 학사원 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24년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개최된 국제수학자총회 추진위원회가 회장을 맡았던 필즈는 우수한 업적을 성취한 두명의 수학자에게 4년마다 열리는 총회때 금메달을 주자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곧 의결됐다. 필즈는 국제수학자총회를 위한 모금에 크게 성공해 금메달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또한 자기 재산도 이 기금에 보탰다. 필즈상은 현재, 특히 미래의 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할 수학자에게 금메달이 수여되기를 바라는 필즈의 뜻에 따라 수상자의 연령을 40세 이하로 제한했다.

그동안 피땀으로 준비하던 필즈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인 1936년에 첫 금메달이 수여됐다. 그때부터 수학 분야의 금메달 이름을 '필즈상'이라고 붙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금메달에 새겨진 상은 필즈가 아니고 고대 희랍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라는 점이다.

1936년 노르웨이 수도인 오슬로에서 개최된 국제수학자총회에서 첫 필즈상을 받은 사람은 하버드대학의 알포스(당시 29세)와 MIT의 더글라스(39세)였다. 그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50년까지 국제수학자총회는 중단됐다. 1950-1962년 동안 4차례의 총회에서는 각각 2명의 수학자에게 필즈상이 수여됐다. 4명의 수학자에게 필즈상을 주자는 결정은 1966년 모스크바에서 개체된 총회에서였다. 그러나 1974년에 2명, 1983년(1982년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개최예정지인 폴란드의 정치사정으로 다음해로 연기됨)과 1986년에 각각3명이 수상자로 결정되고, 나머지 총회에서만 4명이 수상했다.

필즈상은 지금까지 모두 38명이 받았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14명으로 단연 1위다. 그 다음으로 프랑스 7명, 소련과 영국이 각각 4명, 일본3명, 독일2명, 중국, 이탈리아, 스웨덴, 벨기에가 각각1명이다. 현재 미국에 영주하고 있는 필즈상 수상자는 20명에 달하며, 이들 모두가 최우수 10개 대학에 분포돼 있다. 동양의 경우 필즈상 수상자(일본3명, 중국1명)는 노벨상 수상자(일본8명, 중국4명)와 비슷한 분포를 보인다.

수상자들의 연구 업적은 근대 수학 발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분야이며 대체로 순수수학에 한하고 있다. 노벨 수상자는 평균 연령이 60대인데 비해, 필즈상은 평균 연령이 인생의 가장 화려한 나이인 30대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들은 이미 수학에서 최고봉에 도달한 사람들로서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부분의 필증상 수상자들은 수상 후에도 오랫동안 연구를 활발하게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근래에 와서 자연과학이 국제화됨에 따라 노벨상과 병행해 필즈상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밀노(1962), 스메일(1966), 히로나카(1970), 노비코프(1970), 야우(1983), 모리(1990), 젤마노프(1994)와 같은 필즈상 수상자들이 방문함으로써 필즈상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괄호 안은 수상년도).
 

필즈메달을 창안한 캐나다 수학자 존 찰스 필즈.


1994 필즈상 수상자들 40세 이하의 젊은 수학자

1994년8월3일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는 제13회 국제수학자총회가 열렸다. 이때 장부갱((장 벨기에), 삐에르-루이 리용(프랑스), 장 크리스토프 요코(프랑스), 에핌 젤마노프(러시아)등이 필즈상을 받았다. 수상 당시 부갱은 미국 일리노이대학 교수였으며, 지금은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원 교수이자 영구 멤버이다. 젤마노프는 당시 위스콘신대학 교수였으며 현재는 예일대학에 재직 중이다.

필즈상의 수상자들은 8명의 저명한 수학자들로 구성된 선발위원회에서 선발되며 수여 당일까지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3회 총회에서 선발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1974년 필즈상을 수상한 하버드대학의 데이버스 멈포드교수였다.

부갱의 연구 분야는 해석학의 거의 모든 주요 과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는 바나하(Banach)공간 이론과 조화해석학으로부터 비선형 편미분 방정식과 수리물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업적을 남겨 40세의 나이로 필즈상을 받았다. 부갱은 해석학에서 미해결된 어려운 문제들을 해석학과 다른 분야의 이론을 써서 이전에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해결함으로써 관련 분야의 수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주요한예로서 유명한 비선형 슈뢰딩거 또는 KdV(Korte weg-de Vries)방정식에 관한 미해결 문제를 푼 것을 들수 있다. 부갱의 업적은 미래의 해석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리용은 지난 15년 동안 비선형 편미분방정식의 여러 주제에 공헌한 업적으로 38세의 나이로 필즈상을 받았다. 리용의 미분방정식에 관한 연구는 순수, 특히 응용수학과 물리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새로운 이론과 해법을 포괄하고 있어, 그의 연구업적은 하나하나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다. 리용은 현재 도팽에 소재한 파리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요코는 1975년 고등사범학교(L'Ecole Normale Superierre)입시에서 수석 합격했고, 그후 다른 수학경시대회에서도 수석을 차지한 천재적인 수학자다. 현재 파리대학(Sud, Orsay)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요코는 동력학계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로, 이 분야의 업적으로 37세의 나이에 필즈상을 받았다.

케플러의 법칙에 의해 태양계에 있는 행성들은 태양 주위의 타원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행성 사이의 인력은 궤도의 섭동을 초래해 타인궤도 운동의 안정성 문제를 야기시킨다. 요코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이 안정성이 유지되는 정확한 한계를 설정하는 이론을 창설한 것이다. 이외에도 요코는 조합론과 전산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소위 '요코의 퍼즐'도 이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젤마노프는 소련 시베리아의 수도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주립대학에서 25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24세의 나이로 그 당시 대수학에서 반세기 동안 풀지못한 무한차원 특수 조르단(Jordan)대수의 존재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천재적인 수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로부터 9년 후 반세기 이상 미해결된 대수학의 군(Group)론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제한된 번사이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1994년38세의 나이에 필즈상을 받았다. 이 문제는 1902년 영국의 수학자 번사이드가 제기했던 것이다. 젤마노프는 1992년과 1996년에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으며, 앞으로 3년동안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학교수로서 매년 2개월씩 근무할 계획이다.

다가오는 2000년은 세계 수학의 해다. 지난 1992년5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열린 국제수학인 대회(IMU)에서 선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세계의 수학계는 21세기에는 수학이라는 학문이 재도약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순수ㆍ응용수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며, 정보화 사회 속에서 수학의 역할을 새롭게 구축할 것을 목표로 정했다.

주지해야 할 것은 한국이 2000년도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IMO)의 개최지로 지정됐다는 사실이다. 세계 수학의 해에 수학 올림피아드가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은 국제 무대에서 차지하는 한국 수학의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행사의 유치가 국내 수학계에 큰 자극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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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명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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