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불어온 생필품 분야의 '가격파괴' 바람이 올해에는 컴퓨터에까지 확산됐다. 대기업들이 멀티미디어용 CD롬 타이틀을 비롯한 소프트웨어 유통에 뛰어들자 이에 위협을 느낀 소프트웨어 전문 유통사들은 자구책으로 PC부터 소모품에 이르는 컴퓨터 관련 제품 일체를 취급 하는 회원제 창고형 가격파괴 매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 유통업체 소프트라인이 지난해 말 최초로 연회비를 낸 회원들에게 회원증을 발급하고, 시중보다 싼 가격에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회원제 판매점 '컴퓨웨어클럽(현 컴퓨터천국)'을 열었다.
소프트라인의 회원제 판매점은 창고형 백화점의 인기에 편승해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회원제 판매점인 컴퓨웨어클럽이 인기를 누리자 이와 유사한 가격파괴점이 연달아 생겼다. 올해초 소프트타운이 똑같은 가격파괴점인 'C-마트'를, 그리고 한국소프트가 비슷한 성격의 '컴퓨터 프라이스마트'를 각각 개장 하면서 가격파괴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소프트웨어 전문유통업체가 소모품이나 하드웨어까지 취급하게 된 것은 소프트웨어 판매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윤 폭이 크게 낮아져 소프트웨어 단일 품목만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게 됐기 때문. 할인매장 설립 붐은 홈PC 소프트웨어 등 멀티미디어 관련시장이 3-4년간 연평균 최소 2백%이상 고속성장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요즘상황에서 매출액 상승을 낙관적으로 기대하는 해당 업체들의 계산에 따른 것이다.
판단은 소비자의 몫
한편 이 같은 가격파괴 열풍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창고형 가격파괴 매장의 주도권 다툼이 한풀 꺾일 즈음에 등장한 세진컴퓨터다. 여타 가격파괴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규모의 대형매장과 연일 중앙 일간지의 전면을 메우는 대규모 광고 공세로 시작된 이른바 '세진 돌풍'은 컴퓨터 유통업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다.
세진컴퓨터에 대해서는 용산조립상가나 중소컴퓨터 업계 뿐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등장하는 전면 광고, 전국적으로 늘어나는 매장, 그리고 세진컴퓨터의 불도저식 경영 방식은 놀라움을 넘어서 사뭇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세진컴퓨터는 자기자본 없이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금 유통이 빠른 유통업의 특성을 한껏 이용해 어음으로 물건을 구매하고 현금으로 판매해 어음결제일까지의 기간을 확보한 후 매장을 계속 확장함으로써 매출을 불리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뿌리는 광고비와 억대 모델료를 충당하고 매장을 확장할 만큼 매출이 계속 증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만약 한군데서라도 삐거덕하는 날이면 그날로 세진컴퓨터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다.
세진컴퓨터의 저돌적 진입은 대부분의 컴퓨터 업계를 긴장시키며 자구책을 강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대만 에이서 PC의 공급업체인 옥소리와 소프트라인이 손잡고 PC 공급과 유통에 나선 것이 한 예다.
기존 PC 생산업체들은 가격파괴점에 물건을 공급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리점에서도 제품 공급을 꺼려 가격파괴점들은 물건 조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관례 때문에 PC공급 업체와 유통사인 두 회사의 제휴는 이례적이다. 유통 채널의 특성상 공급 업체에서 대리점이나 총판을 거치지 않고 막바로 판매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그러나 PC판매 경험이 전혀 없는 옥소리와 물건조달이 어려운 소프트라인의 제휴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유통업체가 내세우고 있는 가격파괴는 상당 부분 문제점을 안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이유는 가격파괴매장이 저마진의 가격정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 이들 할인점은 대부분 도심권에 자리잡고 있어 점포개발 비용부터 높게 책정된데다 인건비 물류비 등의 부담도 안고 있어, 비용절감이 뒷받침되지 않는 저가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가격파괴점은 순수 소프트웨어 유통사들이 컴퓨터 종합유통으로 사업방향을 선회하면서 안정적인 제품공급에 실패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을 적시에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이들이 판매하는 대기업 멀티미디어 PC는 정식 채널을 통해 구입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 떠도는 덤핑물량을 끌어 모아 구색만 맞춘데 불과하며 '최고 80%까지 할인해 준다'는 소프트웨어도 대부분 창고에서 잠자던 재고품과 신제품을 꾸러미로 묶어 파는 변칙 유통의 혐의가 짙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 소비자들의 올바른 판단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