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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컴퓨터음악의 역사-전위음악에서 대중화로

전문집단의 실험음악으로 태동한 컴퓨터음악은 83년 미디의 등장이후 급속히 대중화되고 있다.

흔히 음악을 이성이 아닌 감성에 의한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음악가들은 이성적이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끔 논리적일 수 없는 것을 논리로 펼치는 궤변(?)의 누를 범하기도 한다. 이는 음악이 지닌 어떤 막연한 속성, 이중성에 기인하지 않나싶다. 마치 이솝 우화의 박쥐처럼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음악가들은 그들의 이성과 감성을 늘 조화 대립시켜왔다.

그들은 즉흥이라는 극히 감성적인 요소를 이성으로 이해하고자 즉흥형식이란 모순된 용어를 만들었으며 또한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탈고전형식 작업을 자유형식으로 정의했다(낭만주의의 음악형식은 자유형식이라기보다는 고전주의 형식의 확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지어 바그너와 같은 골수 낭만주의자마저도 "무의식적으로 작곡된 예술작품은 한물간 구시대 문화유물에 불과하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이러한 관점은 음악을 보다 논리적 구조에 의한 집합체로 만들어갔다.

금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조짐은 급진전하여 빈의 쇤베르크가 1923년 작곡에 있어 음고조직을 보다 제한한 12음기법(dodecaphonic)을 탄생시켰으며, 이 작법은 결국 음악적 제요소들을 일련의 시리즈로 샘플화한 메시앙의 전음열주의(total serialism)에 이른다.

이 수법은 당시 막 피어나고 있던 쾰른의 전자음악가들과 미국의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가들에게 좋은 음악적 배경이 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과학적 매체의 의한 음악가들은 그들 작업에 걸맞는 새로운 음악작법 및 미학적 배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작업에 의한 테이프 작업이든 아날로그 시퀀서나 컴퓨터를 이용한 프로그램 제어든 그들의 작업은 결국 작곡에 필요한 재료를 일련의 샘플로 만들어 처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음열주의 개념과 매우 유사했다.

이러한 음악사적 배경 속에서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벨연구소에서 시작된 컴퓨터음악은 오늘날 특수 전문집단만의 실험음악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는 일상음악이 되고있다.

벨연구소의 실험

컴퓨터가 만든 음을 음악에 사용하려는 실험은 1959년 벨연구소의 맥스 매튜와 제임스 테니 프린스턴대학의 J.K. 란달과 허버트 호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음악용은 아니지만 컴퓨터를 음발생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인 1950년대 중엽부터 있었다. 당시 벨연구소의 연구부는 아날로그 정보를 송출부에서 숫자로 샘플된 대응 패턴으로 바꾸어 수신부에서 역과정을 밟게 하는 디지털 전화통신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술자들은 몇가지 주요 기술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방송국 수준의 음악정보도 다룰 수 있는, 즉 가청 주파수대 전역에 걸쳐 송신이 가능한 시스템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당시 이곳에서 진공관식 컴퓨터를 사용하여 소리 샘플링과 발생을 연구하던 맥스 매튜는 어셈블리 코드로 만든 실험적인 두 프로그램, 뮤직 I(1957)과 뮤직 II(1958)를 발표했다. 이 둘은 모두 단순하나마 음발생 기능이 있었다. 즉 뮤직 I은 레코더 소리 비슷한 삼각파만을 발생했으며 이에 비해 뮤직 II는 네개의 파형을 발생했다. 또한 그는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제2세대 컴퓨터에 의한 뮤직 III를 1960년 초 만들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조안 밀러의 도움으로 개선되어 1962년 뮤직 IV로 발표되었고 이후 전 세계 IBM컴퓨터를 보유한 스튜디오의 기본 시스템이 된다. 이 프로그램을 사용한 여러 스튜디오들은 그들이 발견한 단점들을 보완하여 개정판을 속속 발표했다.

초기 몇년간 컴퓨터 음발생에 의한 실험은 우선 그 발생음의 질이 조악했고 또 세련된 작곡가가 아니라 음악에는 무외한이랄 수 있는 수학자 과학자들의 설익은 시험작의 횡행으로 음악계에서 따돌림당했다. 초기 벨 연구소의 시험적 성격은 그들의 작품 제목에도 반영된다. 예를 들어 1961년도의 작품들인 존 피어스의 '음색과 어택 변주곡' '7:5 랜덤 카논', 제임스 테니의 '잡음 연습곡' 등등이 그러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를 사용한 주파수 변조(FM)에 관심을 가졌던 존 쵸우닝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임스 무어러의 도움으로 이러한 FM방식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이는 결국 현재 야마하 신서사이저의 음발생 방식이 된다. 당시 그는 금관악기와 같이 배음이 풍부하며 또 금속 타악기나 종과 같이 불규칙한 배음 구조를 지닌 소리를 이중 삼중의 변조를 통해 만들 수 있었다. 초우닝은 이 기법을 1972년도 자신의 작품 '사벨리스'(Sabelithe)와 '트레니스'(Turenas, natures의 철자 자리바꿈)에서 효과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컴퓨터 발생음의 다양한 음색 가능성을 증명했다.

당시 컴퓨터는 부가합성에 의해 1차로 소리를 합성한 후 음악적인 두번째 음색 변형이 뒤따랐다. 따라서 프로그래머들의 2차적 음색처리방법은 초우닝의 FM방식 아니면 필터의 사용중 하나였다. 원래 매튜가 만든 뮤직 V 원판은 작곡가 스스로가 처음으로 원하는 소리를 계산에 의해 발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어떠한 필터도 없었다. 이 점은 작곡가에게 소리합성에 있어 전문가적인 연구와 지식을 요했지만 불행히도 작곡가들은 그러한 노력보다는 좀 더 쉽게, 그리고 좀 더 빨리 창조적인 작업영역에서 컴퓨터를 다루길 원했다.

따라서 많은 연구소들이 이런 점을 보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 발전시켰고 그 결과 후속 프로그램인 뮤직 360, 뮤직 11은 각종 필터 기능을 제공했다.
 

컴퓨터음악 반주에 맞춰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강스튜디오에서).


절충방식을 거쳐

이 시기 프로그램들이 아무리 우수했다하더라도 당시 관점으로 그 발생음은 기초적이며 유치했다. 소프트웨어적 방법으로 음을 발생시켜 얻은 제한된 음질에 실망한 많은 음악가들은 컴퓨터를 외부음원과 연결하여 사용하는 절충방식, 즉 하드웨어적으로 음을 발생하여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1960년대 중엽 이후 전자음악합성기(신서사이저)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음악적인 음발생을 목적으로 한 이 전문기기의 발생음과 그 처리방법은 음발생이란 점에서는 컴퓨터를 능가했다. 그러나 이 기기는 음의 데이터를 간직했다가 다시 호출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요인이 컴퓨터를 기억력이 있는 제어원으로서 활용하는 절충방식을 더 생각하게 했는지 모른다.

1972년 영국 EMS 스튜디오에서 볼 수 있었던 디지털 발진기 뱅크가 그러한 초기 예다. 비슷한 시기 뉴잉글랜드 디지털 코퍼레이션은 일체식 디지털 신서사이저 원형을 만들었다. 후에 이것은 싱클라비어(Synclavier)라는 명기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각 보이스(기종에 따라 8~32까지의 소리)당 25개의 정현파 하모닉스를 제공하는 음색발생 뱅크와 이를 제어하는 시스템, 1백28킬로바이트 메모리의 마이크로컴퓨터로 구성되었다.

1978년에는 쿼서 M8이란 오스트레일리아산 페얼라이트(Fairlight CMI) 신서사이저가 개발되어 그 다음해 시장에 선보였다. 이것은 두 개의 6 옥타브 건반과 그래픽장치, 건반 터미널과 A/D변환기를 지닌, 당시로는 획기적인 악기였다. 또 다른 세 종류의 절충형 악기들(GDS 콘브리오 시너지)이 시장에 선보인다. 시너지를 제외한 두 악기는 모두 모니터를 갖고 있으며 컴퓨터 키보드도 사용할 수 있었다. 1981년에 선보인 시너지는 무대 연주를 위해 만들어진 6옥타브 건반의 악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악기는 1979년 미국의 디지털 음악 시스템인 DMX-1000이다. 이것은 PDP-11에 의해 제어되는 즉각적인 응답이 가능한 프로그램 신서사이저였다.

물론 상업적 차원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악기들이 발표된 것만은 아니다. 1976년 일리노이 대학의 소형 디지털 신서사이저, 덴마크 아루스대학의 EGG, 1977년 토론토 대학의 SSSP(Structured Sound Synthesis Project)에 의한 시스템 등 실로 많은 시도들이 행해졌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이러한 실험적 작업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발달로 인해 본격적인 활용으로 진전된다. 그간 전문가들만의 성역과도 같았던 컴퓨터 음악은 애플과 같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으로 서서히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알파신타우리와 사운드체서, 두 회사는 애플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건반과 소프트웨어들을 시판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스템에서 얻을 수 있는 음향은 어설픈 것이었지만 소리의 구체적인 편집 기능 등은 앞으로의 기술발전을 예시하기에 충분했다.

애플 컴퓨터의 경우 자체음 발진을 위한 아홉가지 소리의 뮤직카드, 16가지 소리의 신서사이저, 마운틴 컴퓨터 뮤직시스템(Mountain Computer Music System) 등의 하드웨어와 프로그램들이 발매되면서 전문가는 물론 일반 아마추어까지도 충분히 컴퓨터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은 음악 교육가들의 관심을 끌어 저명한 미국의 음악 교육가인 브르스 벤워드와 필리스파가 만든 많은 교육용 프로그램들도 발표되었다.

요사이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케이크워크(Cakewalk)나 멀티트랙(Multi Track)과 같은 시퀀서 프로그램을 사용해 디지털 신서사이저를 제어하는 것 역시 이 방식에 의한 컴퓨터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초찿기 아날로그 신서사이저 「미나무그」(minimoog)


크세나키스의 시도

소리 발생이나 작곡과 같은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컴퓨터는 전진적 사고를 지닌 작곡가들에게 있어 흥미로운 도구였다.

작곡상의 세부 내용을 위한 데이터 구축에 컴퓨터를 사용하려는 시도는 1950년대 말 르야렌 힐러와 야니스 크세나키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두 사람 모두 전자음악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작업은 자연스레 컴퓨터 발생음과도 연결되었으며 결국 컴퓨터 음악기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1967~69년 존 케이지는 르야렌 힐러의 도움으로 얻은 난수열을 그의 우연성 음악에 사용하기도 했다. 힐러는 많은 작곡용 서브루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후에 이것들은 그의 '일리악 모음곡'(1957)과 '컴퓨터 칸타타'(1963)에 사용되었다. 일리악 모음곡은 컴퓨터가 작곡했다고 하여 화제를 일으켰던 작품으로 유명하다.

힐러의 작업은 이 시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힐러가 구사한 작곡기법은 이미 모차르트 베토벤 쇼팡 고트샤크 부조니 쇤 베르크 케이지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케이지는 중국의 음양원리에 따른 우연성에 몰두했으며, 모차르트는 '음악적 주사위 놀이'(Musical Dice Game)의 전 20곡을 이러한 기법으로 진행시켰다.

유럽 컴퓨터 음악에 있어 크세나키스의 업적은 지대하다. 항상 전위적인 기법들을 구사한 그는 레이저광을 비롯한 시각적 효과처리에도 컴퓨터를 사용하는 등 여지껏 그 누구보다도 능동적이며 실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전통악기를 위한 그의 일련의 작품들. 1962년 5월 24일 프랑스 IBM에서 초연된 'ST/10-1, 080262', 대편성 관현악곡 'ST/48-1, 240162', 열명의 독주자를 위한 '아틀레스'(Atrées, 1962) 등은 모두 컴퓨터에 의한 계산(ST/10의 수정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크세나키스는 퐁피두 센터의 위촉으로 '폴리토프 드 클루니'(Polytope de Cluny, 1972~74)', '디아토프'(Diatope, 1977)와 같은 대규모 멀티 미디어 작품을 제작했다. 수많은 전자 프레시(후자의 경우 1천6백개)와 레이저광, 멀티 트랙 녹음기를 사용한 이 작품들은 모두 컴퓨터에 의해 계산되어 제작됐다. 10년뒤 크세나키스는 컴퓨터 발생음에도 관심을 가져 기 메디크(Guy Medique)와 공동으로 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컴퓨터음악의 산실이 된 벨연구소


미디의 등장

미디(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전자악기는 음악정보의 호환성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세계의 악기 제조사들은 1982년 새로운 산업 표준방식에 대해 논의했으며 그 결과가 이듬해 발표된 미디다. 엄밀히 말해 미디는 하드웨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미디제조사협회(MMA)와 일본 미디 표준위원회(JMSC)에 의한 약속일 뿐이다. 즉 드럼머신 신서사이저를 포함한 모든 전자악기와 음 가공을 위한 주변기기 그리고 시퀀서 컴퓨터 간의 원활한 정보소통을 위해 1983년 8월5일 최종적으로 협약된 국제 표준 인터페이스다.

MMA와 JMSC에 속한 악기 제작사들 가운데 이 규정을 따르지 않는 회사도 있다.

미디 채용 후 악기 및 소프트웨어의 발전은 급성장한다. 1984년 코모도사가 미디 개념의 소프트웨어와 액세서리 상품을 내놓아 본격적인 개인용 컴퓨터음악의 문을 열었으며 또 시퀀서를 내장한, 그러면서 멀티팀버(동시에 여러 음색을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기능, 즉 신서사이저 하나로 피아노 베이스 기타 클라리넷 등의 음을 별개의 성부로 같이 연주할 수 있는 기능)악기들도 속속 소개되었다.

시퀀셜사의 개척자적 노력과 그 산물들은 몇년 안가서 일제 악기들의 공격에 여지없이 침몰하고 만다. 이 시기 일본의 계산기회사 카시오는 CZ-101이라는 일본 최초의 멀티팀버 악기를 만들어 마치 장난감처럼 팔았다.

어찌보면 미디의 탄생은 미국 악기회사로 본다면 악운을 예고하는 징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정히 이야기한다면 미국 회사들의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비효율적인 기업경영(엔지니어가 개발과 경영을 맡는 소자본의 가내공업적 경영)으로는 막대한 개발비와 대량생산에 따른 생산가 절감이 가능했던 일본의 대자본을 이길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컴퓨터음악 동호회 「전롱회」 VS 「셈틀소리」
 
음악을 전공한 교수들이 주축이 된 전롱회와 컴퓨터통신을 통해 만난 순수아마추어들의 모임 셈틀소리
 
컴퓨터음악은 아직 일반인에게 친숙하지않은 개념이다. 지난해 김민우의 ‘입영전야’가 폭발적 인기를 모았지만 그 반주가 컴퓨터음악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근에 발표되는 대중가요에는 배경음악에 미디가 동원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컴퓨터음악은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든 것이다.
 
아직 컴퓨터음악의 여명기지만 이를 대중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 ‘전롱회’(電弄會)와 ‘셈틀소리’라는 두개의 동호인모임으로 살라진다. 전통회가 초창기부터 전자음악에 관심을 두고 음악을 전공한 교수들 중심의 프로집단이라면, 셈틀소리는 컴퓨터통신을 하다가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인 순수한 아마추어 집단이다.
 
전자기기를 쓰는 공연예술집단
 
전롱회는 ‘뎐롱패’(電弄會의 고어 발음)로 더많이 알려져있다. 전자음악에 관심을 가진 몇몇이 패거리를 이루어 실험적인 활동에 몰두했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모임의 규모가 커지고 전자음이 정통음악의 한갈래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지난해부터 명칭을 전롱회로 바꾸었다.
 
전롱회의 출발은 1977년 서울대에 신서사이저가 처음 들엉면서 이에 호기심을 가졌던 몇몇 음악도에 의해 시작된다. 그 악기는 지금에와서 보면 보잘것없는 아날로그 신서사이저 ‘시스템 100’이었지만 당시 작곡을 전공으로 했던 이들에게는 충격적인 새로운 지평이었다. 막상 전자음악을 시작했지만 국내에 가르쳐줄만한 사람도 없고 기계적인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만 했다.
 
1979년 아시아작곡가연맹 서울대회가 열렸을 때 일본전자음악이 소개됐고, 80년 황성홍씨가 롤랜드사 초청으로 일본에 두달간 건너가 체계적인 전자음악을 익혀오면서 이 모임은 91년 전롱회의 전신인 ‘전자음악연구회’로 정식 발족하게 된다. 이 때의 멤버는 주로 서울대 작곡과출신인 장덕산 진규영 허병한 황성호 이건영 유병한씨와 악기기술자 공정실씨 등이었다. 그러나 회원들이 82년 기점으로 속속 유학을 떠나면서 이들의 활동은 뜸해진다.
 
85년경 유학에서 돌아온 이들은, 독자적으로 전자음악에 심취해있던 이인성씨와 만나면서 뎐롱패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을 재개한다. 정치학을 전공한 이인성씨는 마흔이 넘어 전자음악에 푹 빠져든 아마추어 음악가로 현재는 서울예전에 컴퓨터 음악강의를 나갈 만큼 전문가가 된 독특한 인물.
 
뎐롱패로 개칭한후 이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매년 한번씩 정기발표회를 개최했고 서울대 서울예전 추계예술학교 등에 ‘전자음악’또는‘컴퓨터음악’이란 과목을 개설했다. 또 새로 등장한 마디를 이용해 전자음악이 대중적인 관심을 끌수있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11우러 MBC 개국기념으로 공연된 컴퓨터사운드쇼는 이러한 대표적인 예다. 비록 공연전체를 전롱회에서 기획 주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컴퓨터음악 반주에 맞춰 이선희 변진섭 등 대중음악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미디음을 통해 대중에 소개되는 등 이날의 공연은 컴퓨터음악을 널리 소개하는 계기가 됐다. 현재 전롱회의 회원은 15명. 작곡을 전공한 교수들뿐만 아니라 권혁찬 공정실 홍사철씨 등 기술자와 연구자들이 섞여있다. 현재 전롱회의 회장을 맡고있는 이인성씨는 “모임의 성격을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공연예술가들의 모임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음악에 심취한 통신광들

 
셈틀소리는 89년 8월 한국데이타통신(DACOM)의 통신망 ‘PC서브’의 동호회로 출발했다. 당시 통신광이었던 김환호 임재현 등이 한국경제신문의 케텔(KETEL)통신망에 들어가 컴퓨터로 대화를 나누다가 미디에 서로 관심이 있음을 알고 전자게시판에 회원모집광고를 냈다. 마침 케텔에는 동호회를 지원하는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PC서브로 옮겨 셈트소리를 만들게됐다고 한다.
 
셈틀소리의 현재 회원은 1백20명 정도. 고등학생에서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회원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물론 대부분의 회원은 고등학생 대학생들이다. 지방에 있는 회원도 30여명 된다.
 
셈틀소리 회원은 미디그룹 어쿠스틱그룹 그룹사운드 등 세부류로 나눠진다. 셈틀소리의 주축을 이루는 미디그룹은 컴퓨터음악에 관심있는 부류. 전자악기나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자신들이 만든곡들은 회원들끼리 서로 돌려 들어보고 비평을 한다. 회원들의 컴퓨터 음악수준에 대해 “용산전자상가의 악기가게에서 우리가 만든 작품을 틀어놓고 손님들에게 무단복사를 해줄 정도”라고 방재혁회장은 은근히 자랑한다.
 
어쿠스틱크룹은 통기타와 노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PC통신을 통해 음악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모임이 있을때 가장 잘노는 그룹. 그룹사이드는 과거에 이러한 활동을 해본 적이 있거나 현재 활동중인 사람들로 구성돼있다. 세 그룹은 그동안 익힌 기량들을 두차례에 걸쳐 공연으로 소화했다. 지난해 8월 종로의 신나라스튜디오에서 열렸던 정기공연에는 회원들의 자작곡과 노래, 그룹사이드의 연주가 어우러져 관객들을 정말 ‘신나게’했다고 한다.
 
셈틀소리회원들은 비록 얼굴은 못보지만 컴퓨터통신을 통해 매일같이 만난다. 정기모임은 한달에 한번. 아지트가 되다시피한 강스튜디오(용산전자상가 부근에 있는 회원 강계남씨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한번 모일 때마다 30~40명씩 모인다.
 
방재혁씨는 “전자음악이라 해서 ‘딱딱한’ 거싱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한가지 악기만 다룰줄 알면 미디로 다른 악기도 연주해볼 수 있으므로 아마추어라도 혼자 악단을 구성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한꺼번에 편곡자 지휘자 연주자가 되는 점이 컴퓨터 음악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장비를 갖추는데는 적지않은 비용이 든다. PC는 제외하고 인터페이스 모듈 키보드 등을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1백만원은 있어야 한다. 셈틀소리 회원들 중에도 30% 정도만이 장비를 갖추고 있다.
 
실험음악으로 시작한 전자음악을 대중화하려고 애쓰는 전문가집단이 전롱회라면 셈틀소리는 비록 아마추어들이지만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 셈틀소리의 고문인 홍사철씨(KBS 경음악단)는 전롱회 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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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황성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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