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흑사병의 원인체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숙주를 괴롭히기는 하나 죽이는 법은 거의 없는 감기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계속 번성하고 있다. 미생물도 자신을 순화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농구계의 마술사라 불리는 어느 미국선수가 농구 묘기를 보여 주었다. 많은 농구팬들은 그의 신기에 가까운 재능에 감탄과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관람객이나 시청자 중에는 또다른 의미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의아하게 고개를 젓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에이즈 감염자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움직임은 농구 귀재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으며 그의 외모 또한 그동안 대중매체를 통해 보인 흉칙스런 에이즈 몰골이 아니라는 사실에 전문인이 아니라면 약간의 혼돈감마저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이 세균에 감염됐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증상을 갖는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환자가 되지 않든지, 아니면 환자가 되더라도 증상의 경중에 따라 우리 몸에 침범한 세균과 우리의 신체 조건과의 상호작용이 다르므로 개별적인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므로 에이즈 감염자라고 해도 환자로 변하는 시간이 다르고 그 증상도 사람에 따라, 혹은 감염된 바이러스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증상은 병원체와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먹이사슬의 서열다툼 결과에 의해 다르게 나타난다.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지구가 탄생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은 먹이다툼의 승리자들이다. 생존이란 각개체가 주어진 생명의 한 세대(generation)를 유지함은 물론 더 나아가 각각의 생명정보가 담긴 유전자(gene)를 후손에 성공적으로 남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모든 생명체는 두가지 전쟁에서 승리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 첫째는 한 개체가 다른 종류의 생명체와 먹이서열을 다투는 투쟁, 즉 서로 종류를 달리하는 종(species)간의 전쟁이고, 둘째는 자신의 유전자(gene)를 후손에 남기기 위해 주로 수컷끼리 벌이는 동종간의 투쟁이다.
생명체는 무기물 유기물을 섭취해야 한다. 이들 먹이의 대부분은 다른 생명체의 일부, 혹은 전부이다. 따라서 생명체들은 모두 서로 상대방을 먹이(prey)로 삼기도 하고 다른 상대 포획자(predator)에게 먹이가 되는 먹이사슬(food chain)로 묶여져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오늘날에는 사람을 주로 먹는 동물이 없으므로 먹이사슬에 속하지 않는 독립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도 생태계의 일원이다. 생태계는 먹이사슬이라는 숙명적 굴레로 질서가 유지되며 그 일원인 인간도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의 천적, 즉 인간을 먹이로 삼아 생존하는 것이 바로 미생물이다.
한 생명체가 또다른 생명체 내에서 생활환(life cycle)을 유지할 때의 제 1단계는 기생관계(parasitism)이다. 기생이란 어느 한쪽의 착취자(predator)가 상대를 먹이(prey)와 삶의 근거지(niche)로 삼아 생존을 영유하는 관계를 말한다. 병을 일으키는 모든 병원체가 바로 사람을 먹이와 삶의 근거지로 삼는 포획자이다.
장티푸스균의 생존비결
병리학자는 이 관계를 감염이라 하고 침입자를 병원체, 당하는 쪽을 숙주라 한다. 숙주 체내에 침입한 병원체는 숙주와 경쟁하게 되고 그 결과 질병이라는 병리현상이 일어난다. 이때 침범한 병원체와 숙주사이의 기생역사가 극히 짧으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인 숙주가 사망하게 된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병원체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전쟁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물의 진화, 즉 생존측면에서 보면 병원체도 숙주도 모두 실패자이다.
앞에서 정의한 것처럼 생존이란 그 후손이 대대로 살아 남아야 함을 의미하는데 숙주는 병원체 때문에 죽고 병원체 자신도 숙주의 죽음으로 인해 먹이와 삶의 터전을 한꺼번에 잃는다. 즉 세균 스스로도 생존에는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맹독성 병원체는 서서히 숙주와 함께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동시에 병원체의 감염에 견디지 못하는 숙주도 사멸된다.
이와 같은 현상이 긴 세월 동안 이어지면 결국 병독성이 완화된 병원체와 저항성이 강한 숙주만이 살아남게 된다. 이때는 병원체에 감염돼도 증상이 없는 상태로 남을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공생(commensalism)이라 하며 침입 병원체와 숙주 양편에 동시에 일어나는 진화를 동진화(coevolution)라 한다.
이러한 동진화때문에 옛날에 무서웠던 질환들이 오늘날에는 아주 경미한 질병이 된 것이 많다. 그 예의 하나가 장티푸스이다. 약 50년전의 장티푸스는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심한 설사병 정도로 여길 뿐이다. 옛날같이 머리가 빠질 만큼 독종 전염병은 아니다. 물론 치료방법의 발전이나 항생제 치료의 영향도 있으나 동진화 현상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동진화 현상을 분명하게 증명한 사건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했다. 토끼에서 발병하는 점액성 열병(myxomatosis)이 그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다른 대륙과 분리돼 생태계가 다르고 먹이사슬이 독특한 진화의 역사를 가지며 또한 포획성 동물에 대한 방어능력이 전혀 없어 다른 대륙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동물, 즉 캥거루 코알라와 같은 유대류가 무한히 번식하는 곳이다. 이런 동물 가운데 하나가 야생토끼이다. 토끼를 잡아 먹는 포획성 동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토끼에 치명적인 전염병도 없었으므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토끼에 의한 농사피해가 수세기 동안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치사율 99%의 바이러스를 극복한 야생토끼
1950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대륙에만 존재하는 토끼에 치명적인 점액성 열병 바이러스를 오스트레일리아 생태계에 도입 살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토끼에게 완전히 새로웠던 이 바이러스는 남부전역으로 불번지듯 퍼져 토끼를 거의 전멸시켰다. 그후 수년간 이 바이러스는 치사율 99%라는 가공할 병원독성을 나타냈다. 한 토끼에서 다른 토끼로 이 바이러스를 옮기는 곤충은 모기였고 모기 또한 여름철에는 무한정 번식했으므로 농부들은 몇해 여름만 지나면 토끼를 박멸시킬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이러스 살포를 지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농부의 희망은 일부 제한된 지역에서만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 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봤을 때 예기치 못한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이러스의 병독성이 약해진 것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토끼중 쇠약해진 상태이지만 바이러스를 지닌 채 겨울을 살아남은 토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모기가 없어 바이러스가 반복 주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토끼의 생존이 가능했다. 반대로 이미 토끼 몸에 자리잡은 바이러스는 수백세대(한세대가 약 3시간)까지 번식, 독성이 완화된 변종으로 진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렇게 새롭게 변이된 바이러스는 병독성이 현저히 떨어져 이 바이러스 감염 후 토끼가 죽을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수 시간에서 수 주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바이러스를 살포한 첫 해부터 시작돼 불과 3, 4년후에는 순화된 바이러스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퍼져 토끼인구에 섞이게 되었다. 1957년의 조사에 따르면 토끼 숫자는 서서히 다시 늘어났고 대부분의 토끼는 변이된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생존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바이러스의 치사율이 초기의 99%에서 7년만에 25%로 급격히 감소한 것이다.
한편 바이러스의 진화와 더불어 토끼집단도 저항성이 강한 집단으로 진화됐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토끼 중 극소수의 토끼는 처음부터 면역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저항능력이 있는 토끼만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에 급속히 번식했다. 이들이 번식하기에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 나은 조건이 형성됐다. 이 토끼들은 독종인 점액성 열병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전형질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동시 에 경쟁상대였던 다른 토끼 대부분을 바이러스가 없애버렸기 매문이다.
1960년 조사에 따르면 저항성 토끼가 드디어 전체 토끼의 1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10% 이상의 저항성 토끼가 약한 토끼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면 바이러스 전염의 길목이 차단돼 전염이 더이상 확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점액성 열병 바이러스는 토끼를 죽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동진화의 결과이다.
풍토병이 무서운 이유
이처럼 어느 질병이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지리적으로 격리된 지역에 오랜 기간 존재하면 동진화 과정을 거쳐 병독성이 약화된 풍토병으로 남게 된다. 이 풍토병의 병원체와 원주민은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따라서 토착주민에게는 풍토병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에 외지인이 침범할 경우 그 외지인에게는 치명적 감염이 될 수 있다.
그 예가 파나마의 황열병이다. 황열병이란 바이러스 열병으로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무서운 병이다. 파나마의 정글형 황열병은 원래 그곳에 상주하는 원숭이 집단에서 동진화돼 왔다. 이 병의 역사는 아주 길어서 토착민과 원숭이에게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초 운하개발을 위해 외래인인 백인이 이곳에 들어가서 숲을 벌목하고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다가 치명적인 황열병을 얻어 수백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한 동안 운하개발이 중단되기도 했다. 모기에 쏘인 백인들은 난생 처음 만나는 바이러스와 공생의 역사를 새로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었다.
1916년 미국의 록펠러재단이 1천4백만달러라는 거금을 투자,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히고 백신을 개발한 후에야 다시 운하를 개발할 수있게 되었다. 이처럼 병원체가 처음으로 사람에게 기생을 시작하면 결말은 어느 한쪽이 파멸되는 무서운 질병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아직 에이즈의 기원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 실정이다. 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인 HIV와 사람과의 진화 역사조차도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자연법칙에서 에이즈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에이즈의 유래 혹은 그 진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에이즈의 시발을 아프리카 원숭이의 전염병으로 보며 우연한 기회에 그 주변 원주민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서 에이즈와 인간이 서로 악연을 맺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에이즈를 이 아프리카 원주민과 처음으로 동진화를 시작한 바이러스 질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실제로 중앙 아프리카의 에이즈 감염률은 50%가 넘지만 서방세계에서처럼 시끄럽지는 않다. 이런 상태의 바이러스가 어떤 경로로 서구인에게 전파되면서 새로운 숙주와의 기생관계를 다시 반복하게 된 것이 현실에서 겪는 에이즈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서구에서도 HIV에 감염됐지만 만10년 이상 증상이 없고 바이러스가 저절로 없어진 사례가 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점액성 열병 바이러스와 토끼에서 관찰된 현상의 재판일지도 모른다.
바이러스의 돌연변이 확률높아
한개체의 진화란 돌연변이가 원인이고 이로 인해 생긴 변종이 원종보다 살아남기가 유리하다면 변이종이 결국은 주종이 된다. 돌연변이의 발생빈도는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하나 그 확률은 새로 출생한 자손 1백만 가운데 하나꼴이다. 따라서 이같은 조건에 합당한 경우는 바이러스나 세균 뿐이다. 특히 바이러스는 한번에 후손이 수만개씩 생산되기 때문에 돌연변이의 발생확률이 더 높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진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변 상황에 잘 적응해 빠르고 쉽게 변화하고 진화하는 쪽이 바이러스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유행성 감기 바이러스이다. 감기 바이러스의 경우, 한 사람에게 병을 유발시킬 때의 바이러스와 그사람에게서 병을 일으킨 후 배출되는 바이러스는 이미 다른 종이라고 봐야한다. 이렇게 바이러스는 매우 짧은 시간사이에도 변종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접종이 불가능하고 치료약의 개발도 어렵다.
에이즈도 마찬가지로 이미 세상에 서로 다른 바이러스가 무수히 존재하며 또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며 증상도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약내성도 다르고 병원성도 다르며 항원성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이러스가 다른 만큼 사람도 서로같지 않다. 이 두가지 변수의 조합이 에이즈 증상이라면 에이즈 감염자라 해도 증상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얼마 전 농구계의 마술사라 불리는 어느 미국선수가 농구 묘기를 보여 주었다. 많은 농구팬들은 그의 신기에 가까운 재능에 감탄과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관람객이나 시청자 중에는 또다른 의미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의아하게 고개를 젓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에이즈 감염자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움직임은 농구 귀재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으며 그의 외모 또한 그동안 대중매체를 통해 보인 흉칙스런 에이즈 몰골이 아니라는 사실에 전문인이 아니라면 약간의 혼돈감마저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이 세균에 감염됐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증상을 갖는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환자가 되지 않든지, 아니면 환자가 되더라도 증상의 경중에 따라 우리 몸에 침범한 세균과 우리의 신체 조건과의 상호작용이 다르므로 개별적인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므로 에이즈 감염자라고 해도 환자로 변하는 시간이 다르고 그 증상도 사람에 따라, 혹은 감염된 바이러스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증상은 병원체와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먹이사슬의 서열다툼 결과에 의해 다르게 나타난다.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지구가 탄생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은 먹이다툼의 승리자들이다. 생존이란 각개체가 주어진 생명의 한 세대(generation)를 유지함은 물론 더 나아가 각각의 생명정보가 담긴 유전자(gene)를 후손에 성공적으로 남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모든 생명체는 두가지 전쟁에서 승리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 첫째는 한 개체가 다른 종류의 생명체와 먹이서열을 다투는 투쟁, 즉 서로 종류를 달리하는 종(species)간의 전쟁이고, 둘째는 자신의 유전자(gene)를 후손에 남기기 위해 주로 수컷끼리 벌이는 동종간의 투쟁이다.
생명체는 무기물 유기물을 섭취해야 한다. 이들 먹이의 대부분은 다른 생명체의 일부, 혹은 전부이다. 따라서 생명체들은 모두 서로 상대방을 먹이(prey)로 삼기도 하고 다른 상대 포획자(predator)에게 먹이가 되는 먹이사슬(food chain)로 묶여져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오늘날에는 사람을 주로 먹는 동물이 없으므로 먹이사슬에 속하지 않는 독립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도 생태계의 일원이다. 생태계는 먹이사슬이라는 숙명적 굴레로 질서가 유지되며 그 일원인 인간도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의 천적, 즉 인간을 먹이로 삼아 생존하는 것이 바로 미생물이다.
한 생명체가 또다른 생명체 내에서 생활환(life cycle)을 유지할 때의 제 1단계는 기생관계(parasitism)이다. 기생이란 어느 한쪽의 착취자(predator)가 상대를 먹이(prey)와 삶의 근거지(niche)로 삼아 생존을 영유하는 관계를 말한다. 병을 일으키는 모든 병원체가 바로 사람을 먹이와 삶의 근거지로 삼는 포획자이다.
장티푸스균의 생존비결
병리학자는 이 관계를 감염이라 하고 침입자를 병원체, 당하는 쪽을 숙주라 한다. 숙주 체내에 침입한 병원체는 숙주와 경쟁하게 되고 그 결과 질병이라는 병리현상이 일어난다. 이때 침범한 병원체와 숙주사이의 기생역사가 극히 짧으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인 숙주가 사망하게 된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병원체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전쟁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물의 진화, 즉 생존측면에서 보면 병원체도 숙주도 모두 실패자이다.
앞에서 정의한 것처럼 생존이란 그 후손이 대대로 살아 남아야 함을 의미하는데 숙주는 병원체 때문에 죽고 병원체 자신도 숙주의 죽음으로 인해 먹이와 삶의 터전을 한꺼번에 잃는다. 즉 세균 스스로도 생존에는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맹독성 병원체는 서서히 숙주와 함께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동시에 병원체의 감염에 견디지 못하는 숙주도 사멸된다.
이와 같은 현상이 긴 세월 동안 이어지면 결국 병독성이 완화된 병원체와 저항성이 강한 숙주만이 살아남게 된다. 이때는 병원체에 감염돼도 증상이 없는 상태로 남을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공생(commensalism)이라 하며 침입 병원체와 숙주 양편에 동시에 일어나는 진화를 동진화(coevolution)라 한다.
이러한 동진화때문에 옛날에 무서웠던 질환들이 오늘날에는 아주 경미한 질병이 된 것이 많다. 그 예의 하나가 장티푸스이다. 약 50년전의 장티푸스는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심한 설사병 정도로 여길 뿐이다. 옛날같이 머리가 빠질 만큼 독종 전염병은 아니다. 물론 치료방법의 발전이나 항생제 치료의 영향도 있으나 동진화 현상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동진화 현상을 분명하게 증명한 사건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했다. 토끼에서 발병하는 점액성 열병(myxomatosis)이 그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다른 대륙과 분리돼 생태계가 다르고 먹이사슬이 독특한 진화의 역사를 가지며 또한 포획성 동물에 대한 방어능력이 전혀 없어 다른 대륙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동물, 즉 캥거루 코알라와 같은 유대류가 무한히 번식하는 곳이다. 이런 동물 가운데 하나가 야생토끼이다. 토끼를 잡아 먹는 포획성 동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토끼에 치명적인 전염병도 없었으므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토끼에 의한 농사피해가 수세기 동안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치사율 99%의 바이러스를 극복한 야생토끼
그러나 이러한 농부의 희망은 일부 제한된 지역에서만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 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봤을 때 예기치 못한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이러스의 병독성이 약해진 것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토끼중 쇠약해진 상태이지만 바이러스를 지닌 채 겨울을 살아남은 토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모기가 없어 바이러스가 반복 주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토끼의 생존이 가능했다. 반대로 이미 토끼 몸에 자리잡은 바이러스는 수백세대(한세대가 약 3시간)까지 번식, 독성이 완화된 변종으로 진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렇게 새롭게 변이된 바이러스는 병독성이 현저히 떨어져 이 바이러스 감염 후 토끼가 죽을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수 시간에서 수 주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바이러스를 살포한 첫 해부터 시작돼 불과 3, 4년후에는 순화된 바이러스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퍼져 토끼인구에 섞이게 되었다. 1957년의 조사에 따르면 토끼 숫자는 서서히 다시 늘어났고 대부분의 토끼는 변이된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생존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바이러스의 치사율이 초기의 99%에서 7년만에 25%로 급격히 감소한 것이다.
한편 바이러스의 진화와 더불어 토끼집단도 저항성이 강한 집단으로 진화됐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토끼 중 극소수의 토끼는 처음부터 면역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저항능력이 있는 토끼만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에 급속히 번식했다. 이들이 번식하기에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 나은 조건이 형성됐다. 이 토끼들은 독종인 점액성 열병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전형질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동시 에 경쟁상대였던 다른 토끼 대부분을 바이러스가 없애버렸기 매문이다.
1960년 조사에 따르면 저항성 토끼가 드디어 전체 토끼의 1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10% 이상의 저항성 토끼가 약한 토끼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면 바이러스 전염의 길목이 차단돼 전염이 더이상 확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점액성 열병 바이러스는 토끼를 죽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동진화의 결과이다.
이처럼 어느 질병이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지리적으로 격리된 지역에 오랜 기간 존재하면 동진화 과정을 거쳐 병독성이 약화된 풍토병으로 남게 된다. 이 풍토병의 병원체와 원주민은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따라서 토착주민에게는 풍토병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에 외지인이 침범할 경우 그 외지인에게는 치명적 감염이 될 수 있다.
그 예가 파나마의 황열병이다. 황열병이란 바이러스 열병으로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무서운 병이다. 파나마의 정글형 황열병은 원래 그곳에 상주하는 원숭이 집단에서 동진화돼 왔다. 이 병의 역사는 아주 길어서 토착민과 원숭이에게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초 운하개발을 위해 외래인인 백인이 이곳에 들어가서 숲을 벌목하고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다가 치명적인 황열병을 얻어 수백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한 동안 운하개발이 중단되기도 했다. 모기에 쏘인 백인들은 난생 처음 만나는 바이러스와 공생의 역사를 새로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었다.
1916년 미국의 록펠러재단이 1천4백만달러라는 거금을 투자,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히고 백신을 개발한 후에야 다시 운하를 개발할 수있게 되었다. 이처럼 병원체가 처음으로 사람에게 기생을 시작하면 결말은 어느 한쪽이 파멸되는 무서운 질병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아직 에이즈의 기원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 실정이다. 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인 HIV와 사람과의 진화 역사조차도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자연법칙에서 에이즈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에이즈의 유래 혹은 그 진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에이즈의 시발을 아프리카 원숭이의 전염병으로 보며 우연한 기회에 그 주변 원주민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서 에이즈와 인간이 서로 악연을 맺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에이즈를 이 아프리카 원주민과 처음으로 동진화를 시작한 바이러스 질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실제로 중앙 아프리카의 에이즈 감염률은 50%가 넘지만 서방세계에서처럼 시끄럽지는 않다. 이런 상태의 바이러스가 어떤 경로로 서구인에게 전파되면서 새로운 숙주와의 기생관계를 다시 반복하게 된 것이 현실에서 겪는 에이즈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서구에서도 HIV에 감염됐지만 만10년 이상 증상이 없고 바이러스가 저절로 없어진 사례가 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점액성 열병 바이러스와 토끼에서 관찰된 현상의 재판일지도 모른다.
바이러스의 돌연변이 확률높아
한개체의 진화란 돌연변이가 원인이고 이로 인해 생긴 변종이 원종보다 살아남기가 유리하다면 변이종이 결국은 주종이 된다. 돌연변이의 발생빈도는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하나 그 확률은 새로 출생한 자손 1백만 가운데 하나꼴이다. 따라서 이같은 조건에 합당한 경우는 바이러스나 세균 뿐이다. 특히 바이러스는 한번에 후손이 수만개씩 생산되기 때문에 돌연변이의 발생확률이 더 높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진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변 상황에 잘 적응해 빠르고 쉽게 변화하고 진화하는 쪽이 바이러스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유행성 감기 바이러스이다. 감기 바이러스의 경우, 한 사람에게 병을 유발시킬 때의 바이러스와 그사람에게서 병을 일으킨 후 배출되는 바이러스는 이미 다른 종이라고 봐야한다. 이렇게 바이러스는 매우 짧은 시간사이에도 변종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접종이 불가능하고 치료약의 개발도 어렵다.
에이즈도 마찬가지로 이미 세상에 서로 다른 바이러스가 무수히 존재하며 또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며 증상도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약내성도 다르고 병원성도 다르며 항원성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이러스가 다른 만큼 사람도 서로같지 않다. 이 두가지 변수의 조합이 에이즈 증상이라면 에이즈 감염자라 해도 증상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이러스성 질병 가운데에도 백신으로 병을 통제한 예가 있다. 소아마비 천연두가 그 대표적 성공사례이다. 그러나 이는 우연하게도 이들 바이러스는 변이가 심하지 않으며 사람만이 유일한 숙주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례이다. 에이즈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진화하며 환경에 잘 적응하므로 백신개발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병원성도 변할 수 있으며 지금같은 진화속도가 지속되면 언젠가는 에이즈도 허피스 바이러스(herpes virus)와 같이 몸에 지니고는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길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