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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를 극복하는 사람들

농구스타 매직 존슨 방한 계기로 알아본다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통념이 깨지고 있다. 10년 이상 바이러스와 더불어 동거동락하고 있는 이른바 장기생존자들에 의해서…

미국 농구 스타매직존슨(Magic Johnson)이 한국을 방문해 국내 농구팀과 시범경기를 가졌다. 이 시합을 지켜 본 관중들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미국 선수들이 한국 농구 최강팀인 기아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는 것을 보고 두 나라의 농구 수준차를 실감했을 법하다. 또한 에이즈(AIDS) 항체 양성 반응자로 알려진 매직존슨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것을 보고 그의 체력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5분만 뛰어도 숨이 차고 기력이 떨어지는데,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체력을 타고 났길래 가장 힘든 스포츠 가운데 하나라는 농구경기를, 그것도 전후반 쉴 새 없이 코트를 누비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에이즈는 급성 질환이 아니고 발병하기까지 수년-10여년이 걸리는 만성 질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해서 금방 눈에 띄는 증상이 나타나고 체력이 급강하하는 것은 아니다.

매직 존슨은 80년대 말에 이성간 성접촉에 의해 HIV 바이러스에 감염됐으므로 90년대 말 또는 21세기 초에 에이즈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보통의 HIV 바이러스 감염자와 비슷한 운명을 걷게 된다는 가정 아래서 산출한 예상이다. 만약 존슨이 이른바 장기생존자 대열에 끼게 된다면 그는 이보다 시간이 훨씬 더 흐른 후에 에이즈 환자가 되거나 아예 평생 HIV 바이러스와 '동거동락'하면서 별탈없이 지낼 수도 있다.

HIV 바이러스 감염자의 잔여수명

일반적으로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을 HIV 바이러스 감염자 또는 에이즈 바이러스 항체 양성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신의 몸에 분명히 HIV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아직 에이즈 환자는 아니다. 감염자의 몸에서 HIV 바이러스가 수년, 길게는 10년 이상 머물면서 점차로 면역기능을 떨어뜨린 결과 기회감염(2차감염)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에이즈 환자로 분류된다.

연세대 의대 감염내과 교실 김준명교수는 "미국 질병콘트롤센터(CDC)가 지정한 20여종의 기회감염에 걸려 있거나 악성종양, 림프종, 카포시육종, 자궁암 등이 생겼거나 에이즈바이러스가 뇌에 침입해 환자를 치매상태에 빠뜨린 경우 에이즈 환자로 간주한다"고 정의했다.

HIV 바이러스의 잠복기(바이러스 감염 후 에이즈로 이행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는 사람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에이즈 오피스(AIDS office)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에이즈바이러스 감염자 10명중 1명은 5년 이내에, 2명중 1명은 10년 이내에, 3명중 2명은 13년 이내에 에이즈 환자가 된다고 한다. 일단 에이즈 환자로 진단되면 보통 2, 3년 내에 사망하게 된다. 따라서 에이즈로 이행되기 전까지 얼마나 오래 HIV 바이러스 감염자로 남아 있을 수 있느냐가 바이리스감염자의 잔여수명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HIV 바이러스 감염자는 예외없이 에이즈 환자가 되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에이즈의 역사가 10년 이상 흐르면서 바이러스 감염자라고 해서 반드시 에이즈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드물지 않게 보고되고 있다. 이들이 이른바 에이즈장기생존자들이다.

아직 확실한 개념정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일반적으로 장기생존자라고 하면 감염된 지 10년이 지난 다음에도 에이즈로 이행되지 않고, 면역기능이 정상이며, 특별한 증상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AZT 같은 에이스 치료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람만 장기생존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보통은 치료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앞의 세 조건을 만족시키면 장기생존자 대열에 포함시키고 있다.

장기생존자라 할지라도 HIV 항체검사를 받으면 양성 반응을 보이고 혈액에서 소량의 바이러스가 검출된다.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HIV 바이러스를 전파하는가에 대해서 학자들간의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옮긴다'고 보는 측의 주장이 더 무게를 갖고 있다. 그것이 보다 안전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미국 NBA 농구에서 1980년대 말 LA 레이커스의 전성시대를 누리게 한 스타 플레이어 매직존슨. 그는 스스로 에이즈 항체 양성자임을 밝혀 세계를 놀라게 했다(왼쪽). 지난 해 LA 레이커스의 코치로 활약할 때의 매직 존슨(오른쪽)


5% 정도가 장기생존자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 14년이 흘렀어도 별다른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는 한 장기생존자가 1993년 3월 22일자 '타임'(Time)에 소개됐다. 키 187㎝, 체중 77㎏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롭 앤더슨이라는 당시 39세의 미술가는 가끔 감기에 걸린 것 길은 느낌을 호소할 뿐 일반인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건강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그는 AZT 등 치료제를 복용한 적이 없는 '오리지널' 장기생존자이며 게다가 그와 1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남자 친구는 HIV 바이러스 항체 음성자라고 타임은 전한다.

앤더슨과 같은 장기생존자의 수가 얼마나 될까. 에이즈의 왕국 미국에서조차 정확한 통계가 없다. 장기생존자의 정의가 아직 확립돼 있지 않으며, 에이즈 역사가 이제 10여년 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에이즈 관련학자들은 HIV 바이러스 감염자들 가운데 5% 정도가 장기생존자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전세계의 에이즈 관련 학자들은 장기생존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연구목적은 장기생존의 원인을 캐내어 획기적인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으며 전체 HIV 바이러스 감염자에 도움이 되는 결과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한 연세대 의대 미생물학 교실 이원영교수는 이 방면의 연구가 이제 '착수단계'라고 규정했다.

HIV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고도 장기간 건강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어떤 신체적 특성을 갖고 있을까.

첫번째로 거론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면역 능력이다. 즉 선천적으로 병약한 (면역성이 낮은) 사람보다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는 (면역성이 높은) 사람의 장기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개인의 면역능력이 장기생존의 관건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면역기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어린이나 노인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생존기간이 짧은데 비해 면역기능이 왕성한 젊은 환자들은 훨씬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그 단적인 예로 들고 있다.

한 개인의 면역성과 장기생존과의 관계를 더 깊게 이해하려면 먼저 에이즈 발병의 메커니즘부터 더듬어 나가야 한다. HIV 바이러스 감염후 에이즈환자가 되는 과정과 계기를 설명하는 여러 학설들 가운데에서 현재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은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몽타니에박사가 제안한 공통인자이론(cofactor theory)이다.

이 이론의 요체는 HIV 바이러스는 혼자서 병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감염자의 세포의 핵 속에서 바이러스가 오래 잠복하고 있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갑자기 핵 밖으로 뛰쳐나와 면역관련세포를 파괴함으로써 면역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의 주창자들이 말하는 '어느 시점'이란 면역시스템이 자극받을 때, 다시 발해 박테리아(마이코플라스마 등)나 바이러스(인간 허피스 바이러스 등) 같은 공통인자에 감염될 때를 가리킨다.

미국 뉴욕에 있는 아론 다이아몬드 에이즈연구센터 소장인 데이비드 호박사는 몽타니에 박사와 다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HIV 바이러스가 매우 적극적인 바이러스라고 믿는다. HIV 바이러스는 항상 세포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면역시스템의 '브레이크'에 걸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감염자의 면역성이 떨어지면 즉시 외부로 탈출해 면역세포의 파괴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최근 에이즈 관련학자들은 인간의 면역과 관련이 있는 여러 세포들 가운데에서 CD4세포와 CD8세포에 초점을 맞춰 장기생존과의 관계를 집중 추적하고 있다. 일종의 보조 T림프구인 CD4세포는 HIV 바이러스의 주 공격 목표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HIV 바이러스가 체내에 들어오면 CD4세포 수가 정상치인 1㎕당 1천2백개에서 크게 줄어들어 5백개 이하가 된다. CD4세포가 더 감소해 2백개 이하가 되면 에이즈로 발전할 가능성이 급격히 커진다.

CD4세포와 CD8세포

HIV 바이러스 침입 이후 장기생존자의 CD4세포 숫자가 5백개 정도로 줄어든다는 점은 여느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와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은 장기생존자가 이 수를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CD4세포의 수를 안정시키지 못하면 그의 운명은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는가. 현 시점에서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렵다. CD4세포의 숫자가 2백개 이하인 상태에서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수년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회감염을 거부하거나 쉽게 극복해내는데, 학자들은 CD4세포 대신 다른 종류의 백혈구를 동원해 면역체계가 무너진 틈을 파고 드려는 각종 질병에 저항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최근에는 '수동적인' CD4세포 보다 '적극적인' CD8세포에 연구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추세이다. HIV 바이러스의 집중포화를 받아 CD4세포의 전열이 무너지면 그 반작용으로 항(抗) 바이러스 기능을 가진 CD8세포가 에이즈방어선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를 근거로 CD8세포의 활성도가 원래 높은(CD8세포의 수가 많은) 사람들이 장기생존자로 남게 된다는 학설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CD4/CD8은 HIV 바이러스감염자의 현재를 판정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지표로 활용가능하다. 정상인의 CD4/CD8은 1을 약간 상회하지만, 에이즈바이러스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이 비(比)가 1 이하로 떨어진다.

장기생존자의 면역시스템을 들여다 보면 실제로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CD8세포를 선봉장으로 내세운 면역군(軍)은 먼저 적(HIV 바이러스)의 행동반경을 최대한 제한하고 적이 빈번하게 변신(돌연변이)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유리한 국면을 조성한다.

실제로 돌연변이 빈도를 HIV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가 한결 수월해진다. 수개월마다 한번씩 돌연변이하는 HIV 바이러스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때마다 신종 바이러스를 인식하고 죽이는 방법까지 새로 수립하는 것이 면역시스템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에이즈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하는 학자들은 돌연변이 횟수가 줄어드는 것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움직이는 목표물(돌연변이가 빈번한) 보다는 고정된 목표물을 조준할 때 명중확률이 높다는 데 기인한다. 따라서 장기생존자의 면역시스템이 어떻게 HIV 바이러스의 돌연변이를 억제시키는가를 밝혀내는 일에 수많은 학자들이 매달리고 있다.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 5년 남짓 된 매직존슨이 장기생존자에 해당될지 안 될지는 현시점에서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강인한 체력의 소지자이긴 하지만 체력과 면역능력이 반드시 비례한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존슨이 만약 독종인 HIV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면 그의 체력이나 면역능력과는 관계없이 흑인으로 윔블던대회에서 처음 우승한 테니스 스타 아서 애쉬와 같은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에이즈 감염 사실을 발표하는 흑인 테니스 스타 아서 애쉬. 이미 사망한 그는 영국 윔블던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을 갖고 있다.


사이비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한편 장기생존 여부가 개인의 면역능력 우열에 따라 결정되기 보다는 감염자의 운(?)에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HIV 바이러스는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들의 병원성(병을 일으키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즉 병원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종(種)과 약한 종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운 좋게' 병원성이 약한 종에 감염된 사람이 장기생존자가 된다는 것.

이해를 돕기 위해 병원성은 거의 없지만 항원성을 보이는 HIV 바이러스의 한 종에 감염됐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감염자의 혈액을 채취해 항체검사를 실시하면 분명히 앙성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이는 항원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항체가 있다는 면역상식을 떠올리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바이러스는 항원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공포탄'에 불과하다. 그 다음 단계(에이즈)로 넘어가는 능력(병원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김준명교수가 전하는 '운 좋은' HIV 바이러스 감염자의 예를 소개하면 이렇다.

"HIV 바이러스 감염 후 13년 동안 아무 증상없이 살고 있는 한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장기생존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람은 수혈을 받은 후 바이러스 감염자가 됐기 때문에 학자들은 수혈제공자와 또 다른 수혈자들을 찾아 그들의 에이즈 이행여부를 살폈는데 모두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HIV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한 사람의 피를 나눠 가졌으므로 전원이 HIV 항체 양성자인 것은 분명했으나 에이즈로 발전한 사례는 물론이고 그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지요."

학자들은 몇 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HIV 바이러스 감염 후에도 특별한 건강상의 문제없이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게 된 원인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한 사람만 장기생존자라면 그의 면역성이 남다르게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비교적 간단히 결론내릴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단지 수혈을 통해 서로 인연을 맺은 불특정 다수가 장기생존을 이어가고 있어서 적어도 개인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학자들의 의견은 수혈제공자가 사이비(병원성이 낮은 종) HIV 바이러스에 감염됐기 때문에 장기생존자 그룹이 형성된 것으로 모아졌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체내에 잔류하는 HIV 바이러스의 병원성을 직접 조사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고(현재의 의학기술로 HIV 바이러스의 병원성을 명백하게 판정할 수 없다)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이른, 일정한 약점을 안고 있는 결론이었다.

또 아론에이즈연구센터에서 10명의 장기생존자의 HIV 바이러스를 채취한 후 그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금년 1월 미국의학협회지)는 장기생존과 바이러스 병원성의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모든 장기생존자의 바이러스 nef 유전자가 결여돼 있었는데 이 nef 결손 HIV 바이러스를 원숭이에 주입했더니 바이러스의 복제빈도가 줄어들고 에이즈로의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사이비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은 HIV 생균(生菌) 백신(이런 백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지만)을 접종 받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약한 HIV 바이러스를 받아들인 후 체내에 형성된 항체가 독종의 침입을 차단하고 죽이는 일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것.

이는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시한' 우두에 걸린 목장 여성이 당시 가공할 공포의 질환이었던 천연두에 대해 면역성을 보인 것(우두 바이러스와 천연두 바이러스는 병원체는 서로 '사촌'간이다.)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병원성이 크게 떨어지는 약골 HIV 바이러스를 잘 연구하면 우두와 천연두의 관계를 조사하다가 1796년 사상 최초의 백신인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의 뒤를 잇는 대발명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면역학자는 면역능력의 우열에, 바이러스학자는 바이러스의 병원성에 초점을 맞춰 장기생존의 비밀을 찾아 나서고 있는데 반해 유전학자들은 유전자에서 직접 그 원인을 캐고 있다. 이미 그들은 HIV 감염 후 단기간 내에 에이즈로 발전될 소지가 큰 사람들의 유전형을 밝혀냈으며 장기생존자들 고유의 유전형을 가려내기 위한 탐색작업도 착수해 놓고 있다.

이밖에도 장기생존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대상은 수두룩하다. 그러나 1993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평가회의에서 섭취한 음식의 종류, 스트레스, 마약복용 여부, 성병 감염 등과 장기생존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결론내렸다.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야

얼핏 보면 현재까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장기생존의 비결들은 한결같이 감염자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노력해 봐야 헛수고"라는 체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에이즈관련학자들의 일치된 충고이다.

의사들은 감염자가 가급적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생활하기를 바라고 있다. 감염(infection), 면역(immunity), 스트레스(stress)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로 이혼이라는 강력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의 경우, 면역관련 세포의 수가 크게 줄어들며 그 결과로 각종 질병에 잘 걸리게 된다는 사실은 널리 수용되고 있다.

HIV 바이러스 감염자의 경우 감염사실 자체가 커다란 스트레스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국내의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매직 존슨은 "몸에 작은 반점 하나만 나타나도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고 고백해 감염자의 위축된 심리를 보여 주었다. 이렇게 세세한 증상에 매달려 스트레스를 받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항상 긍정적 사고를 갖고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생명을 최대한 연장시키고 있다가 21세기 초나 그 이전에 에이즈 특효약이 개발되면 한 순간에 병마를 이겨내는 것이 훨씬 현명한 대처법이라고 김준명교수는 말한다.

정기적인 치료를 받는 것도 장기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대책 가운데 하나이다. 선진국의 HIV 바이러스 감염자가 아프리카의 감염자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오래 사는 것이 의료(medical care)의 중요성을 입증해준다. 실제로 항(抗) 미생물제제를 지속적으로 투여받아 톡소플라스마 결핵 허피스바이러스 폐렴 등의 기회감염을 예방한 경우,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감염자에 비해 에이즈로의 이행기간이 길어지고 예후가 훨씬 낫게 나타난다.

또 면역기능이 약간 떨어지기 시작하면 AZT ddl ddC와 같은 에이즈 치료제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바이러스감염 후 바로 치료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AZT 등을 투여해도 생존기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도 주장하지만 그렇더라도 삶의 질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어쩌다 HIV 바이러스 감염자가 됐을지라도 장기생존자의 대열에 속하게 된다면 '불행중 다행'이다. 그러나 장기생존자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다. HIV 바이러스가 에이즈로 이행되기까지에는 보통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므로 그 동안에 에이즈를 완전 치유하는 획기적인 치료제가 개발될지도 알 수 없다. 설령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동안 HIV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신약이 등장할 가능성은 더 높다. 실제로 현재 세계의 수많은 연구소와 제약회사들이 이 방향으로 연구의 물꼬를 돌리고 있다. 이 일이 성취되면 당뇨병 환자가 인슐린(insulin)과 더불어 살아가듯이 HIV 바이러스를 몸에 지닌 채로 별 문제없이 천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여성HIV 바이러스 감염자가 가벼운 체조를 하면서 명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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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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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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