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제국들이 컴퓨터와 통신기술을 접목시켜 새로운 교육혁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현재 환경은 관심과 예산부족으로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다. 이대로라면 미래가 두려울 뿐이다.
기술발달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화 물결 이 교육분야에 미치면서 "이젠 교육도 변해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교과서나 참고서류에 의존한 케케묵은 과거의 학습 체계에서 탈피, 컴퓨터와 통신기술을 이용한 새 교육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요구는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형태의 자료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컴퓨터 정보망이 교육기반 구조로 자리잡을 21세기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 일원에서는 현재 교육체제 변화 검토 등 제도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2015년 고속정보통신망이 구성되는 데 따른 장기적인 전망을 강조하고 있다. 또 96년-97년경 교육망이 행정전산망에 접속되면 활용 여하에 따라 효용도가 엄청나게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컴퓨터 문맹 탈피 교육의 당위론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실행을 뒷받침할 여건은 대단히 미비하다.
양은 팽창, 질은 여전히 제자리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 된 것은 지난 89년 교육부가 학교 컴퓨터 교육을 실시한 제5차 교육과정부터. 이후 지금까지 보급된 교육용 컴퓨터대수만 보자면 총 27만3천8백12대에 이른다(국민학교 7천5백30개교 15만3천6백64대, 중학교 2천5백44개교 7만5천4백84대, 일반계 고교 1천85개교 3만3천6백35대, 연수기관 2백69개 1만1천29대). 물론 이 수치는 한국교육개발원이 작성한 교육용컴퓨터 보급 계획서에서 94년 말까지 학급당 1실의 교육용컴퓨터 보급을 완료한다는 계획을 토대로 추산한 것으로,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올해부터 시작되는 초·중등학교의 제6차 교육과정은 지난 제5차 교육과정에서 도입한 컴퓨터 보급과 교육의 성과 위에서 국내 컴퓨터 기초교육의 수준을 한단계 높여야 할 시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차과정부터는 지금까지 4학년부터 실과 과목에서 주당 2시간씩 가르치던 국민학교 컴퓨터 교육 시간이 3학년부터 주당 1시간으로 바뀌게 된다. 주당 수업 시간이 줄었지만 학교장 재량으로 컴퓨터 교육 시간을 늘릴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실제적으로는 교육 시간이 연장된 셈이다.
중학교 역시 과거에는 실업이나 가정 과목의 일정 시간을 할애해 컴퓨터를 교육하던 것에서 탈피해 정식 선택 과목으로 채택했다. 고등학교는 기술 공업 상업 정보산업에 컴퓨터 관련 내용이 포함됐던 것에서 그 범위가 농업수산업 가사 진로 직업 과목으로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이런 양적인 팽창이 그리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교육의 질. 양적인 측면에서 초·중등학교의 컴퓨터 교육은 일단 확대됐지만 5차 과정 컴퓨터 교육을 통해 각급 학교 현장 전문가들이 제기했던 문제들이 별다른 해결책 없이 그대로 연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92년말 현재 국민학교에 보급된 PC를 기종별로 보면 8비트 20.7%, 16비트 78.1%, 32비트는 1.0%를 기록하고 있다. 중학교는 그 비율이 15.6%, 82.9%, 1.2%이며 고등학교는 11.7%, 84.4%, 3.4%이다. 각급 학교에서 가장 많은 보급률을 보이고 있는 16비트 PC는 시장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XT 기종이다. 게다가 이들 XT는 초기에 보급된 컴퓨터들이 그렇듯이 한글 처리 방식이 업체마다 다르고 키보드가 89키인 경우가 많으며 하드디스크가 아예 없거나 40MB 이하인 경우가 태반이다. 실제로 활용 가능한 컴퓨터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컴퓨터 보급의 목적인 '컴퓨터 문맹 탈피'라는 수준만을 달성하려 해도 최소한 이들 XT 기종은 AT나 386급으로 바꿔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지난해 이러한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386 기종을 학교에 보급했으나, 486급이 제품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점에서 굳이 한단계 낮은 386을 고집해 컴퓨터 관련 교사들로부터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기종의 성능 여부를 떠나 컴퓨터 내구 연한이라고 할수 있는 5년 경이 지난 노후 기기라는 점에서도 현재 각급 학교에 보급된 컴퓨터는 시급히 교체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교육가'는 없고'프로그래머'만 있는 개발 현실
쓸만한 교육용 소프트웨어가 부족한데다 그나마 활용이 매우 부진한 것도 큰 문제로 지적된다. 이같은 부족현상은 학습에 도움이 되는 교수학습 매체로서 컴퓨터를 활용할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탓이다. 교육개발원이 88년부터 94년 말까지 개발한 교육용 소프트웨어는 총 5백4편. 그러나 이들 소프트웨어들에 대한 평가는 개발 소프트웨어 전체중 40%는 전혀 쓸 수 없는 제품이며, 15%는 학교에서만 쓰일 수 있을 뿐이고 45% 정도는 그냥 한번 사용해볼 만한 정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발 소프트웨어의 주를 이루는 반복학습형 프로그램으로는 학생들의 흥미를 끌기 힘들다는 비판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개발자들이 교육에 대한 이론적 경험적 배경을 결여, 현장의 요구에 맞지 않고 학생들의 학습 과정을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교육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업 설계에서부터 프로그램 설계, 그리고 이를 평가하는 각 요소에 전문가가 필요하다. 즉 교과 교육 내용 전문가로 담당교사, 대학교수, 관련 연구원, 교수학습 이론가, 수업설계 전문가 등과 함께 프로그램 설계자가 동원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재는 프로그램 설계자 중심이고 나머지는 자문이나 조언하는 입장이다.
정부가 교육용 소프트웨어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은 분명하다. 89년에서 94년까지 6년 동안 교육용 PC 보급에 들어간 정부 예산이 1천1백12억원인 반면 교육개발원의 소프트웨어 예산은 88년부터 96년까지 9년 동안 기껏 47억여원을 책정했을 뿐이다. 이같은 예산에 맞춰 이것 저것을 개발하는 것은 구색을 위한 것일 뿐, 각 소프트웨어는 당연히 부실한 제품이 될 수밖에 없다.
또 현재 국내에 유통되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제품은 국민학생용 교과서 학습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업체들은 새로운 개발보다 기존제품의 버전업에 치중하고 있으나 이것도 바뀐 교과과정에 맞춰 내용을 교체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음성·비디오 등 멀티미디어 기능을 추가하거나 교안 자체를 새로 구성하는 작업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이들 교육용 프로그램은 국민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저학년 과정이 대부분인데다가 학과 수업 위주로 영어 수학 등 중요과목에 치우쳐 있는 등 업체마다 제품의 구성이나 내용에 별 차이가 없다는 지적이다. 고등학생용 프로그램의 경우 업체들이 그만한 노하우도 없거니와, 실제 입시교육 위주의 교육상황에서 수요 자체가 불투명해 아예 개발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다.
가르칠 선생님이 없다
교사의 자질 문제도 학교 컴퓨터 교육의 심각성을 더하는 요소로 지적된다. 학교 교사들의 컴퓨터 문맹 탈피 수준이 매우 낮음을 보여 주는 증거는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학교용 소프트웨어 제작을 책임질 능력을 가진 교사는 전국을 대상으로 봐도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전산담당 교사가 별로 없는데다, 있다고 해도 프로그램 제작을 주도할 수준은 아니다. 가정·상업 교사가 컴퓨터교육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에 이런 전문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학교별 선택과목 중 중학교의 69% 정도가 컴퓨터를, 고등학교의 46% 정도가 정보산업 과목을 선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 필요한 컴퓨터 교원수는 4천3백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교육부의 집계로 현직 컴퓨터 자격 교사가 1백7명에 불과하다는 현실에 비춰볼 때 교사가 없어 배울 수 없다는 우려는 단순한 걱정이 아닌 것이다.
또 92년말 현재 기본적인 응용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는 교사는 약 14%이며 프로그램을 이용해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는 12%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진다. 어린 문맹들을 깨우쳐주어야 할 교사들이 대부분 컴퓨터 문맹이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이 쉽게 개선될 것 같지는 않다. 컴퓨터교사를 양성해야할 공식 기관인 사범대학이나 교육 대학의 컴퓨터 이수 학점은 교양필수 2학점, 심화선택 4학점으로 한정돼 있다. 학생들이 교양필수만 이수할 경우 겨우 50시간 내외의 교육을 받고 학교 현장에 나와 초중등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내 컴퓨터 교육은 특히 사교육의 비중이 공교육에 비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공교육이 전혀 제 역할을 못하고 학교의 일을 컴퓨터학원이 대신하는 실정인 셈. 그러나 사교육이라고 해서 원활한 컴퓨터교육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학교 컴퓨터교육 내용이 베이식 위주의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학습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 사설학원의 강의나 컴퓨터 경진대회 등이 베이식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학생들이 프로그래머가 될 것이 아닌 바에야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는 것은 응용 프로그램을 제대로 구동시키는 것과 비교해 매우 소모적인 일이다.
행정 지원이 미흡한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 컴퓨터 교육을 전담하는 행정조직은 교육부 과학 교육과 소속 전산실 근무 연구관과 연구사 몇명, 그리고 시·도 과학 기술과의 1명뿐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50명 미만의 인원이 1천만명에 달하는 우리나라 초중등학생들의 컴퓨터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제기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그러나 당분간 대폭적인 예산 확대는 기대하기 힘들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동안 한국통신의 낙전 수입으로 교육용 컴퓨터가 보급됐던 점을 볼 때 별다른 특별 재원의 마련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인 학교 컴퓨터 교육의 정상화. 컴퓨터교육 관련 주체의 '발상의대전환'을 기대해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