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이론의 창시자 러브록은 지구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그는 살아있는 지구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지구의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흰개미는 역할에 따라 제각기 여왕개미 수캐미 병정개미 일개미로 발육하여 수만마리씩 큰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질서 있는 사회를 형성한다. 흰개미는 흙이나 나무를 침으로 뭉쳐서 집을 짓는다. 아프리카의 초원에 사는 버섯흰개미는 높이가 4m나 되는 탑모양의 둥지를 만들 정도이다. 이 집에는 온도를 조절하는 정교한 냉난방장치가 있으며 애벌레에게 먹일 버섯을 기르는 방까지 갖추고 있다.
1928년 저명한 곤충학자인 월리엄 휠러는 이러한 흰개미 집단을 지칭하기 위하여 초유기체(superorganism)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개개의 흰개미가 가진 것의 총화를 훨씬 뛰어넘는 지능과 적응능력을 보여준 흰개미의 집합체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 대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구는 살아있다
초유기체의 개념은 과학분야에 널리 응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지구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지구를 초유기체로 본다는 것은 지구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지구가 살아있다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만 이러한 생각을 과학적 사실로서 대중에게 알린 최초의 학자는 오늘날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제이스 허튼(1726~1797)이다. 그는 1785년 지구를 거대한 생명체에 비유하고 지구의 연구에 지구생리학(geophysiology)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를테면 바다로부터 육지로 물이 이동하는 것을 인체내의 혈액순환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서양과학의 사고를 지배했던 환원주의에 의하여 거부되고 망각되었다. 사물을 구성요소로 쪼개서 분석하면 그것들을 조합하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환원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살아있다는 생각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이다. 1969년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뒤부터 외계로부터 지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의학자인 루이스 토마스는 그의 칼럼집인 '세포라는 대우주'(The Lives of a Cell, 1974년)에서 "멀리 달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숨이 멎을 만큼 놀라운 일은 지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즈음에 영국의 대기과학자인 제임스 러브록(1919~)은 지구를 하나의 생물체로 정의한 가이아(Gaia) 이론을 발표했다. 가이아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을 일컫는 말이다.
초유기체의 자기조절 기능
러브록에 따르면, 가이아는 지구의 생물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이다. 지구를 생물과 그것의 환경, 즉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초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가이아 이론에서는 지구가 자기조절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생물체는 생존을 위해서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체내의 환경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기온이 10도 상승했다고 해서 체온이 10도 올라가지 않으며 발한작용에 의하여 체온이 조절된다. 미국의 생리학자인 월터 캐논(1871~1945)은 생물체의 이러한 메커니즘을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명명했다. 말하자면 가이아는 항상성을 갖고 있다.
자기조절 기능을 가진 장치의 간단한 보기는 가정용 난방장치를 제어하는 자동온도조절기(thermostat)이다. 방안의 온도가 내려가면 온도조절기의 스위치가 자동으로 작동되어 난방장치의 연소가 일어나고, 방이 다시 더워지면 자동으로 연소가 정지되어 실내온도가 일정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와같이 예정된 결과와 실제의 결과를 비교하여 둘 사이의 편차에 관한 정보를 입력으로 되먹임(feedback)시키기 때문에 자기조절이 가능한 것이다. 가이아는 능동적으로 주위환경을 조절한다. 가이아에서 자동온도조절기처럼 되먹임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품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다.
가이아는 존재하는가
러브록이 가이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곧잘 제시하는 두가지 단서는 대기권의 화학적 조성과 지구의 기후이다. 먼저 지구 대기권의 경우, 그 화학적 조성이 매우 미묘하고 대부분 화학의 일반원리에 들어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무질서의 와중에서 생물계에 유리한 조건이 유지되고 있는 까닭은 생물이 대기 조성을 능동적으로 조절하고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산소와 메탄가스는 대기권에서 항상 일정한 농도를 유지한다. 두 기체는 서로 반응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을 만든다. 그러나 메탄가스의 농도는 지구 표면의 어느 곳에서 든지 1.5ppm으로 일정하다. 이 농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려면 해마다 약 10억t의 메탄가스가 대기권으로 유입되어야 한다. 아울러 메탄가스의 산화로 소진되는 산소를 벌충하기 위해서 매년 약 20억t의 산소가 필요하다.
러브록은 이와같이 불안정하기 이를데 없는 대기권의 조성이 오랫동안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범지구적 규모의 자기조절 체계, 즉 가이아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산소와 메탄가스는 생물에 의하여 대기권에 재충전된다. 산소의 공급원은 녹색 식물이다. 산소는 광합성을 통하여 생산되기 때문이다. 메탄가스는 늪지나 해저처럼 산소가 희박한 조건에서 살고 있는 혐기성 박테리아에 의하여 생산된다. 요컨대 대기권의 조성이 미생물에 의하여 생물체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조절된다는 것이 가이아 이론의 핵심이다.
가이아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두번째의 방증은 지구 기온의 역사이다. 생물의 탄생 이후 약 35억년 동안 태양이 지구로 방출한 에너지의 양은 30% 정도 증가했다. 바꾸어 말하면 35억년 전의 태양열은 지금보다 30% 감소된 수준이었다. 이 상태는 원시지구의 기온이 빙점이하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5억년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이 생물의 생존에 부적당한 때가 단 한순간도 없었다는 사실은 지구의 기후가 오로지 태양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러브록은 태양열이 오늘날처럼 강력하지 못했던 원시지구에서는 이산화탄소 또는 암모니아와 같은 기체가 기온의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처럼 분자구조상으로 3개 이상의 원자를 가진 기체들은 지구 표면이 가열되면서 복사되는 열을 흡수하는 특성이 있다. 이 복사열이 적외선이다. 지구는 밤낮으로 적외선을 은은히 발하고 있다. 적외선은 지구의 빛이라 할 수 있다. 적외선 복사열을 흡수한 기체들은 열을 붙잡아 두었다가 천천히 외계로 방출시킨다. 따라서 대기권이 하나의 커다란 열 저장소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온실효과(greenhouse effect)라 이른다. 말하자면 온실효과기체들은 단열작용을 하므로 따뜻한 담요처럼 지구의 안락한 환경 조성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온실효과기체는 대부분 생물에 의하여 합성된다. 따라서 러브록은 지구의 기온이 생물에 의하여 일정하게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이아의 존재를 입증하는 두번째의 증거로 지구 기후의 역사를 내세우는 이유이다.
데이지세계 모델로 반격
가이아 이론이 70년대에 소개되었을 때 과학자들이 보인 반응은 철저한 외면과 냉소였다. 특히 생물학자인 포드둘리틀과 리차드 도킨스는 경멸에 가까운 비판을 했다. 그들은 자연도태에 의하여 진화되는 생물체가 환경을 조절하기 위하여 전지구적 규모로 이타주의를 발휘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가이아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에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서 러브록은 1982년에 데이지세계(Daisyworld)라고 불리는 가이아의 컴퓨터 모델을 제시했다.
데이지세계는 지구와 크기가 똑같은 가상의 행성인데 태양과 똑같은 질량과 광도를 가진 별의 주위를 공전한다. 이 행성의 주생물은 데이지라는 국화과 식물로서 색이 짙은종, 옅은종, 중간색 종의 세가지가 있다. 데이지세계의 환경을 결정하는 변수는 온도이다. 말하자면 데이지세계는 생물은 데이지 한 종류, 환경은 온도 한가지로 단순화된 축소판 지구인 셈이다.
러브록은 데이지가 서로 경쟁적으로 성장함으로써 마치 자동온도조절기처럼 작용하여 데이지세계의 기온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컴퓨터프로그램으로 말없는 식물이 행성의 온도를 그들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유지시켜나가는 과정을 모의실험해보인 것이다. 그러나 데이지세계 모델의 성공으로 가이아 이론이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부 과학자들은 아직도 가이아이론은 결코 과학이론이 될 수 없으며 종교적 성격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서슴지 않는다. 어쨌든 가이아 이론은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아 이론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하는 가이아 이론이 환경오염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가다라의 미친 돼지떼
러브록은 가이아 이론을 발표하기 전부터 환경문제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가 50년대 말엽에 발명한 전자포획탐지기는 미량의 화학물질을 검출해내는 기능이 뛰어난 분석기구이다. 러브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의 어딘가에서 몇리터의 과불화탄소가 증발되었다고 할 때 그것을 며칠 뒤에 영국 브리스톨의 대기 중에서 용이하게 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한 장치"이다. 환경운동은 바로 이 장치에서 비롯되었다. DDT와 같은 살충제가 남극 펭귄의 지방 속에서부터 미국 여성의 모유 속에까지 지구의 모든 생물에 퍼져 있다는 기초자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자료를 보고 미국의 레이첼 카슨여사는 '침묵의 봄'(Silent Spring, 1962년)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 책은 농약의 남용이 결국 생태계의 파괴를 초래하여 봄이 와도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재앙이 닥쳐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카슨은 미국의 농약제조업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갓 태어난 녹색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러브록은 살아있는 지구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구의학(planetary medicine)이라고 불렀다. 가이아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지구 전체의 건강성이다. 따라서 지구의학은 인류의 건강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환경보호운동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가이아의 세계에서 인류는 단지 한 종의 생물에 불과할 따름이다. 인류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며 관리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부주의와 잘못으로 가이아가 앓고 있는 질병은 오존층 파괴,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지구의 기온상승과 산성비 오염문제, 열대지방의 삼림생태계 파괴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존층의 파괴는 한때 지구 멸망의 위기감을 증폭시킨 바 있다. 지구의 성층권에 자리한 오존층의 구멍이 커질수록 그만큼 인체에 해로운 자외선의 차단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피부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인간에게 발생하는 암 중에서 1/3이 피부암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60만명의 피부암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오존층 파괴의 주범은 염화불화탄소(CFC)와 메탄가스이다. CFC의 사용은 전면금지되었지만 논이나 가축들의 방귀로부터 나오는 메탄가스의 과도한 방출을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존층의 구멍이 작아질 것으로는 보아지지 않는다.
한편 석탄이나 석유 따위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야기되는 환경문제 역시 심각하다. 이산화탄소의 과다한 방출로 지구 온난화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가 대기권에 축적됨에 따라 온실효과가 유발되어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있다.
물론 이산화탄소는 소금처럼 중요한 기체이다. 광합성 식물의 먹이로서 결국 모든 생물의 식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독이 되는 것처럼 인류가 화석연료의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감축시키지 않으면 대기권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되어 지구는 열병을 앓게될지 모를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러브록은 인간이 지구의 환경을 제멋대로 훼손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판 가다라의 돼지들처럼 오염을 일으키는 자동차를 몰고, 우리를 익사시킬 바다를 향하여 정신 없이 내리막길로 질주하고 있다."
가다라의 돼지는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가다라 지방의 마귀들린 돼지떼를 가리킨다.
괴짜가 되는 자유
러브록은 대학교수가 아니다. 영국 남부의 물레방앗간이 딸린 오두막에서 아내와 함께 연구생활을 하는 이른바 재야학자이다. 그는 스스로 봉급이 좋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편한 연구소 생활이 창조성을 말살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구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처음 품기 시작한 시기는 직장생활을 마감한 50대 초반무렵이었다. 그는 "50년 이상의 생애를 보내고 나서 얻을 수 있는 여러 좋은 보상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이제 괴짜가 되어도 좋다는 자유로움일 것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나이가 들고 관록이 붙으면 연구는 뒤로 물리고 감투 다툼에 여념이 없는 우리나라의 일부 몰지각한 과학기술자들이 귀담아 들었으면 싶은 말이 아닐 수 없다.
러브록은 일반대중이 가이아 이론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저서를 열심히 집필하여 세 권의 단행본을 내놓았다. '가이아-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GAIA-A new look at life on Earth, 1979년)'가 이아의 시대-살아있는 우리 지구의 전기'(The Ages of GAIA-A Biography of Our Living Earth, 1988년) '가이아-지구의학의 실천과학'(GAIA-The Practical Science of Planetary Medicine, 1991년)은 모두 번역되어 국내에서 출판되었다. 특유의 이론에 대해 생전에 폭넓은 대중적 이해와 지지를 획득했다는 측면에서 러브록은 당대에 일정 수준의 사회적 보상을 받아낸 행복한 과학자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