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초만 해도 우주개발은 러시아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아폴로 대 소유즈, 새턴 대 N1의 경쟁은 미국을 최종 승자로 만들었다.
지난 7월 20일은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디딘지 25주년 되는 날이다. 이날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닐 암스트롱과 그 외에 달에 착륙했던 10여명의 우주인을 함께 백악관에 초청하여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다. 그러나 미국의 아폴로 계획에 의한 인간의 달 착륙은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난 이후 이룩한 일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일로 평가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신장 1.8m 내외, 체중 80kg 내외의 인간들이 힘을 합쳐 로켓이라는 기계를 만들어 지구를 떠나 달이라는 다른 별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것은 이미 25년 전에 이룩된 것이지만, 아직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큰 일이었다.
서기 1232년 처음 만들어진 로켓으로부터 7백 37년만에 새턴5형이라는 초대형 로켓을 만들어 달착륙을 이룩했다. 처음 로켓과 달여행은 서로 큰 관계가 없는 듯 보였다. 로켓을 이용하여 지구를 떠나 달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은 19세기 초에 등장하였고, 2차세계대전 때 폰 브라운에 의해 독일에서 개발된 V-2 로켓을 바탕으로 대형 로켓을 만들어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1960년 초 인간이 탑승한 우주선을 지구궤도에 올리면서 인간의 달탐험 가능성은 좀더 현실화되었다.
유인 우주비행은 러시아가 먼저
1961년 4월 12일 러시아는 미국보다 한발 먼저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았다. 이날 발사된 4천7백25kg짜리 보스토크(Vostok) 1호는 근지점 1백69km, 원지점 3백15km의 궤도를 한바퀴 돈 뒤 무사히 지구에 착륙했다.
이로부터 약 3주 후 미국에서는 알랜 세퍼가 프리덤(자유) 7호 우주선을 타고 15분 22초 동안 1백 86.4km까지 떠올랐다가 대서양에 떨어져 귀환했다. 그의 비행은 미국이 완전한 지구 궤도 비행을 하기 전에 실시했던 단 한차례의 탄도 비행이었다.
러시아의 재빠른 발걸음에 자극받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국회에 보낸 교서에서 "미국은 60년대 안에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지상으로 생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의 우주개발은 러시아에 뒤지고 있었지만, 달의 정복만은 러시아보다 앞서 이루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케네디의 대(對)국민약속 이후 미국과 러시아의 달탐험 우주 경쟁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러시아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러시아가 먼저 달에 간다는 것은 당시 여러 가지 과학적인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62년 2월 20일 글렌이 지구를 3바퀴 회전함으로써 미국도 본격적인 유인 우주비행 시대에 접어들었다. 비록 러시아보다 3백15일 뒤에 이루어진 우주비행이었지만, 미국인들을 크게 흥분시킨 사건이었다. 그 기쁨에 비례하여 우주비행사였던 글렌은 미국인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상원 의원을 하였으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경쟁은 일방적으로 러시아가 우세했다. 1963년에 발사된 보스토크 6호에 이르기까지 6회의 보스토크 계획에서 러시아가 이룩한 기록들을 보면 러시아의 우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때까지 러시아의 총 지구궤도 선회수는 2백 59회에 이르고 총 우주비행 시간은 2백 82시간24분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스토크 6호에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테레쉬코바를 태우기도 했다. 한편 미국의 머큐리계획도 1963년에 마감되었다. 우주비행사 쿠커가 '신의 7호'를 타고 34시간 20분 동안 우주비행을 함으로써 6회에 걸친 미국의 1인승 우주비행 계획을 마친 것이다. 이 계획을 통해 세운 기록을 보면, 총 지구궤도 선회수 34회, 우주 비행시간 61시간 34분으로 러시아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다.
아폴로 대 소유즈
인간이 달에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달까지 우주선을 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추력)을 가진 우주 로켓이다. 그런데 로켓의 연구 개발에는 시간 돈 기술 조직력 등이 요구된다.
미국에서 이 일을 담당한 사람은 폰 브라운 박사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달나라 여행에 쓰여질 새턴(saturn) 로켓을 만들자는 결정은 이미 1958년경에 있었다고 한다. 새턴로켓의 개발 취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러시아를 추월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와 미국의 첫번째 인공위성의 무게 비는 83kg 대 4.8kg였다. 러시아의 인공위성이 미국의 것보다 15배 이상 무거웠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강력한 추력을 가진 로켓 개발이 절박한 당면 과제였다. 그래서 폰 브라운 박사는 강력한 추력을 낼 수 있는 새로운 로켓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 로켓개발의 성패에 따라 미국의 달 여행의 성패가 결정지어질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미항공우주국(NASA)의 마샬우주센터에서는 달여행에 필요한 새턴 로켓 연구개발에 집중했다. 또 달여행에 필요한 기술인 우주선끼리 가까이 접근하는 랑데부기술, 두 우주선이 하나로 결합하는 도킹기술 등은 제미니계획을 통해서 얻어냈다. 미국은 이들 기술을 종합, 최종적으로 아폴로 계획을 수립하여 달탐험을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역시 달여행을 위한 강력한 로켓 개발에 들어갔다. 또 보스토크계획과 보스호드계획을 통해서 필요한 기술을 실험 훈련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인 소유즈계획을 통해 달탐험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러시아의 달탐험에 사용할 초대형 로켓인 N-1 로켓은 러시아의 첫인공위성을 발사한 A-1 로켓을 개발한 코롤로프가 맡았다.
루나의 좌절과 성공
러시아의 달탐험에 필요한 자료 수집은 루나(Lunar)계획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이 계획은 초창기에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1959년 루나 3호가 달 뒷면 촬영에 처음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실패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성공은 또다시 찾아왔다. 1966년에 발사된 루나 9호가 달에 사뿐히 내려앉아 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얻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루나 9호를 발사한 지 두 발 뒤에 쏘아 올린 루나 10호는 처음으로 인공적인 달의 위성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루나 10호는 달의 주위를 회전하면서 인류의 달탐험에 필요한 많은 자료를 지구로 송신하였다. 러시아는 달탐험에 필요한 준비를 착실히 다져간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서디너라는 작은 도시에는 제트추진연구소(JPL)가 자리잡고 있다. NASA 소속 연구소 중의 하나인 이 연구소는 달착륙선이 착륙할 곳을 선정하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행성, 즉 화성 금성 토성 등에 보낼 탐사선을 설계 제작 연구하는 임무도 갖고 있다.
미국은 1961년 9월부터 달에 탐사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의 달탐사선은 달의 인력에 이끌려 달을 향해 떨어질 때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사진 찍는 일은 달에 충돌하기 직전까지만 할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달의 사진들은 달표면 3백m 이상의 상공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사진 찍기가 간단했다는 말은 아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64년에 발사된 레인저 7호가 처음으로 근접 달사진을 찍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1965년에 발사된 레인저 8호는 7천1백37장, 같은 해에 발사된 레인저 9호는 5천8백14장의 달사진을 지구로 보내왔다.
러시아의 무인 우주선이 달 연착륙에 성공한지 5개월 뒤인 1966년 6월 미국은 서베이어 (Surveyor) 1호를 발사, 달에 연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단 한번의 시도로 달연착륙을 성공시킨 것이다. 아무튼 서베이어 계획은 1958년까지 7차례 시도, 그중 5번을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유인 우주선이 착륙할 예정지를 모두 조사하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달로 발사된 서베이어 7호는 각종 실험기구를 가지고 떠났다. 달표면에 안착한 서베이어 7호는 달의 흙을 파서 달의 토양에 대한 여러 실험을 수행, 그 자료를 지구로 보내 주었다 서베이어 계획과 함께 미국은 루나 오비터 (Lunar Orbiter)계획도 착수했다. 서베이어 계획이 아폴로 우주선의 착륙 지점에 대한 자세한 자료의 수집이라면, 루나 오비터 계획은 위성이 달을 돌면서 달의 일반적인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였다. 1966년에 발사한 루나 오비터 1호는 달의 궤도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크게 뒤졌던 달의 정보 수집에서도 러시아를 많이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 루나 오비터계획으로 1967년 8월까지 5차례 우주선이 발사되었는데 모두 성공리에 임무를 마쳤다. 이 계획의 성공으로 거의 완벽한 달의 지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제미니의 역전 드라마
유인 우주비행 계획인 미국의 머큐리 계획과 러시아의 보스토크 계획은 서로 비교하기가 좀 거북할 정도로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다음 계획인 제미니계획을 통해서 달탐험에 필요한 각종 기술을 익혔다. 즉 장기간 우주비행(2주 이상),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바꾸는 기술, 랑데부(Rendezvou, 두 우주선이 2~3m 근접한 거리에서 같이 비행하는 것) 도킹 (docking, 두 우주선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로 되는 기술) 우주유영(우주선이 고장났을 때 밖에서 고쳐야 하므로 필수적인 기술) 등을 습득해 나간 것이다.
제미니계획을 통하여 얻은 성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첫 성과는 제미니 7호가 13일간의 우주비행을 한 기록을 꼽을 수 있다. 또한 1966년에 발사된 제미니 9호의 우주비행사 유진 서넌은 2시간 4분이라는 당시로는 최장의 우주 산책 기록을 세우며 러시아의 기록들을 하나씩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 12월 15일과 12월 4일에 각각 발사된 제미니 6호와 7호는 서로 2~3 m까지 접근하는 랑데부 기록을 세웠다.
또 1966년에 발사된 제미니 8호는 아제나 로켓과 35분 동안 도킹하는데 성공했다. 이 도킹 과정에서 제미니 우주선에 이상이 생겼다. 그 때 우주비행사인 암스트롱은 이를 침착하게 잘 해결, 후에 최초로 달나라 탐험을 수행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이외에 궤도 변경실험, 강력한 우주선 지대인 반 알렌대 통과 실험 등 달탐험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술을 해결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보스호드(Voskhod) 1호를 발사하였다. 1964년 가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우주선에는 사상 처음으로 3명의 우주비행사가 탑승했다. 이듬해인 1965년에 발사된 보스호드 2호의 우주비행사 레오노프는 인류 최초로 10분간 우주 산책(우주유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미국보다 3개월 빠른 기록이지만 당시 발표했던 사진 등이 아주 희미해서 미국의 일부 우주과학자들은 가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존심 건 마지막 승부
1966년 7월 미국은 아폴로 2호를 발사했다. 우주선은 없고 단지 강력한 로켓의 발사 뿐이었다. 이날 궤도에 올려놓은 2단 로켓의 무게는 26.5t으로 사상 최대의 무게였다. 2단 로켓은 달 탐험에 사용할 새턴 5형 로켓의 초보적인 단계였던 것이다.
다음 날 러시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프로톤(Proton)3호를 발사했다. 하지만 이 우주선의 무게는 12.2톤으로 미국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로써 그 동안 러시아에 뒤졌던, 대형발사체 부분에서도 미국은 러시아를 크게 앞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국의 아폴로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7년 1월 아폴로 계획은 큰 시련을 맞는다. 연습중 화재가 일어나 우주선에 있던 3명의 우주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아폴로 우주선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개조 작업이 실시되었다. 아폴로 계획이 이룬 성과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새턴 5형 로켓의 개발과 활용을 들 수 있다. 1967년 아폴로 4호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새턴 5형 로켓은 그 뒤 여러 차례의 성공적인 비행을 통해 달 탐험에 충분히 이용될 수 있는 훌륭한 초대형 로켓임이 증명됐다.
한편 러시아의 소유즈계획도 1967년 소유즈 1호가 발사됨으로써 시작된다. 그런데 소유즈 1호는 발사한 지 하루만에 비극을 낳는다. 우주비행사가 지구로 돌아오다 낙하산에 문제가 생겨 러시아의 첫 우주비행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소유즈계획도 1년 반 이상이나 연기되었다. 러시아는 소유즈와 코스모스 계획을 이용, 달탐험에 필요할 랑데부, 도킹 기술을 익히고 실험했다. 특히 1967년에 발사된 코스모스 186호와 코스모스 188호는 지구궤도에서 서로 자동으로 도킹, 우주정거장 건설 실험을 하였다. 이는 러시아가 우주 정거장에서 달 탐험용 우주선을 발사할 것이라는 예측을 불러 일으켰다. 실제로 러시아는 우주 정거장 건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68년 말까지도 미국의 새턴 5형에 필적하는 강력한 추진력의 로켓 개발에는 실패했다.
러시아의 달탐험용 N-1 로켓을 개발하던 코롤로프가 1966년 세상을 떠나면서 N-1 로켓의 개발은 주인을 잃었고, 1969년 2월 21일의 첫 발사에서 12km까지 상승한 로켓은 실패로 끝났고, 1972년 11월 28일까지 모두 3번의 발사 시험이 더 진행되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러시아의 달탐험 계획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발표되었다.
러시아의 달탐험 계획과 N-1 로켓의 개발은 지난 20여년 동안 서방세계에 알려지지 않다가 1989년부터 서서히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필자도 1992년 2월 19일 러시아의 구조시험연구소에서 N-1 로켓의 구조 실험용 모델을 볼 수 있었다.
폰 브라운의 새턴 5형 로켓 개발과 코롤로프의 N-1 로켓 개발에서 폰 브라운이 승리한 것이며, 이는 미국이 달탐험 경쟁에서 러시아를 따돌리고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다. 1969년 7월 16일 오전 9시 32분(미국 동부 시간) 닐 암스트롱, 에드윈 E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즈가 탑승한 아폴로 11호가 새턴 5형 로켓에 의해 케이프 케네디 우주항을 출발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군함은 케이프 케네디 앞바다에 정박해서 아폴로 11호 발사의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고, 3일전인 7월 13일에는 루나 15호를 발사하였다 루나 15호는 달에 착륙한 뒤 달 흙을 채취하여 지구로 갖고 오게 함으로써 아폴로 11호의 성과를 축소시키려는 목적으로 발사된 것이다.
러시아와의 경쟁속에 달로 떠난 아폴로 11호는 지구를 출발한 지 1백2시간45분39초 만에 38만5km를 날아 1969년 7월 20일 오전 3시17분42초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는데 성공했으며, 닐 암스트롱은 6시간 뒤인 오전 9시 56분 달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전 인류를 위해선 거대한 도약"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표면에서 2시간 15분 동안의 산책을 하여 달암석 28kg을 채취하여 달을 이륙, 지구로 되돌아왔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올드린은 달 산책중 "우주복을 입은 채 소변을 보았다"는 웃지못할 일화를 털어놓기도 하였으며,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에서 산책하고 있을 때 고독하게 혼자서 사령선을 지킨 올린즈도 최근의 인터뷰에서 자기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에서 활동하는 것을 TV 중계로 못 본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며, 만일 우주선에 문제가 생겨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을 떠나지 못하면 나 자신도 자살하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모험이었다. 인간의 달탐험은 최고로 선택받은 자들의 최대의 모험이었다. 암스트롱이 달을 떠난 후 달을 돌고 있던 루나 15호는 달의 착륙에 실패하여 달에 충돌함으로써 러시아는 패배의 두손을, 미국은 승리의 두손을 들었다.
얼마전 필자가 만났던 러시아의 우주 과학자 말대로 러시아는 미국과의 우주개발경쟁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현재는 무척 어려운 처지이다.
앞으로 우주개발은 강대국들간의 경쟁보다는 세계적으로 뜻있는 많은 나라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진행하여야 한다는 큰 교훈을 심어준 채 인간의 달탐험 경쟁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