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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잠깬 레바논의 미라들

종교·민족 패권분쟁으로 희생, 전쟁의 참혹상 증언

최초로 발굴된'야스민'의 미라^사망 당시 만1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주변에 수의 목걸이 팔지 등이 흩어져 있다.


레바논에서 13세기 중반의 미라 8구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보존상태로 발견됐다. 이들은 십자군과 쿠르드족의 침공을 피해 산중의 동굴로 들어갔다가 죽어간 아녀자와 아이들이라는 점이 밝혀져,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일깨워 준다. 종교와 민족의 패권분쟁은 여전히 희생자를 낳는 것이다.

레바논은 아놀드 토인비가 '종교의 역사박물관'이라 불렀을 정도로 종교전쟁, 특히 기독교와 무슬렘 사이의 분쟁을 상징하는 나라다.

1958년 무슬렘의 아랍통일을 추구하는 운동이 계기가 된 레바논내전이 발발했다. 70년대 중반 이후로도 단속적으로 내전이 계속됐는데, 그 뿌리에는 거처를 찾아 이입돼 온 많은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다.

1990년 7월13일, 이때도 동족살상의 전쟁이 13년간 이어지고 있었다. 베이루트의 하늘을 포탄과 탄약들이 뒤덮었다. 전쟁의 참화에서 1백㎞ 떨어진 레바논산맥 해발 1천4백m 지점에서 G.E.R.S.L.(레바논 지하 연구탐험 그룹)소속 4명의 젊은이들이 절벽에서 발견된 자연동굴을 조사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사람인 미용업자이자 등반가, 조종사이기도 한 파디 바루디(Fadi Baroudi, 44)가 수첩을 넘기다가 그날이 13일의 금요일임을 발견했다.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군."

고고학을 공부하는 피에르 아비 아운(Pierre Abi-Aoun, 20)과 세인트 조셉대의 지질학 교수 앙트완 고셰(Antoine Ghaouche, 33), 영국 대사관의 주재상무관 폴 카와자(Paul Khawaja, 33)가 그의 일행이었다.

이 네사람은 동굴 탐사에서 동굴이 숨겨놓은 과거에 얽힌 증거들을 찾으려 했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과업은 곧 레바논의 미래에 대한 신념과 직결돼 있었다.

현실에서 격리된 이 공간은 기분 나쁠 정도로 적막에 싸여 있었고, 이들이 동굴을 파는 삽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이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하나의 굴 위에 또하나의 굴이 있는 형태로 된 이 동굴에 이들은 6번째 찾아왔다. 2년전 그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파디는 "우리가 무언가 찾아내야 할 곳이 바로 여기"라고 말했다.

벌써 몇시간째 이들은 땅을 덮은 먼지처럼 가벼운 모래층을 조시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들의 헬맷에 붙은 램프는 좁은 공간만을 비춰주었다. 추위가 뼛속 깊이까지 스며들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이들은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파디는 불을 피우기 위해 삽을 들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주의를 기울였다. 모래 속에서 천 한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소리를 질러 다른 이들을 불렀다. 모두가 그 구덩이 속을 들여다 보았다. 파디는 작은 흙손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그는 옆으로 긴 모양을 한 물체를 들어내었다. 그것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살며시 천을 열자 나타난 것은 작은 여자아기의 시신이었다. 보존상태가 아주 좋고 마치 편안하게 잠든 듯한. 동굴의 모래와 건조함 덕분에 시신은 놀랄 만큼 잘 보존돼 있었다.

발굴된 미라는 부인과 아이들을 합해 모두 8구. 이들과 함께 발견된 종이조각은 고고학자들이 군침을 삼킬 만한 증거품이 되었다.

십자군과 무슬렘의 공격으로 포위된 족장

이 발견은 금세기에서도 기념비적인 것이었으나 2년 이상 비밀로 유지됐다. G.E.R.S.L.의 회장인 하니 압둘 누르(Hani Abdul-Nour) 교수는 1992년 11월 이 시신들을 레바논 정부 고고학 담당부처에 넘기면서 이 모든 사실을 밝혔다.

모든 것은 파디 바루디의 끈질긴 집념에서 비롯됐다. 중세사 전문가인 그는 무슬렘의 역사서와 기독교도들이 기록해놓은 여러 원고들을 연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루카 - 알 바하라니라는 매우 특이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루카는 마로니트족의 족장으로 트리폴리의 영주인 보헤몬드 8세가 보낸 십자군과 마멜루크족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세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같은 사실이 트리폴리에 있던 다른 족장 제레미의 후원을 받은 십자군과, 기독교에는 항상 적대적 입장을 보여온 무슬렘 양쪽을 자극했다. 1281년에는 마멜루크족과 보헤몬드 사이에 매우 역설적인 동맹조약이 체결되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1283년에 보헤몬드는 족장 루카를 사로잡기 위해 떠났다.

기록에 따르면 족장 루카는 원래 그가 거주했던 도시 하다드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굴로 피신했으나, 오랜 포위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뒤 역사의 무대에서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파디는 오랫동안 그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점차 만일 그 족장이 피신했던 동굴을 찾을 수 있다면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루카는 피난하면서 마을의 여자와 어린이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그들이 몸을 숨겼던 곳은 난공불락의 요지에 있었고 그곳에 닿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그길은 워낙 좁아 한번에 한사람씩 밖에 오를 수 없었다.

마멜루크족은 동굴 앞에 진을 치고 포위를 했을 뿐 아니라 그 앞에다 탑을 쌓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족장을 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이 공격은 성공 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포위가 피난민들의 식량과 식수 공급을 차단했던 데 있다.

역사가인 이븐 압드 아자허에 따르면 족장은 그가 숨어있던 바로 그곳에서 투르코만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사로잡혔고 머리를 빡빡 깎인 채 죄수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굴욕이었다.

파디는 마치 예전의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견하기 위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해갔다. 마침내 파디의 연구진은 '아시 엘 하다드' 라는 동굴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미라들이 입고 있던 수의는 전문가의 손을 거쳐 조심스레 복원됐다. 사진은 '사드카'의 수의


추위와 기아로 여자와 아이부터 사망

그곳에서 그들은 일상용품 중 목제 숟가락과 그릇, 청동제 머리핀과 철제 바늘 외에도 중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양의 뼈들을 발견했다. 베이루트의 고고학자에 따르면 그 시기가 대략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도굴범들의 손에 여기저기 파해쳐 지기도 한 그곳에서 그들은 매우 값진 것을 발견했다. 14개의 원고조각들이었다. 그중에는 15세기 이래 레바논에서 사라져버린 시리아-스트란젤로어로 쓰여진 것도 있었고 아라비아어로 쓰여진 것도 있었다.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연구진은 그 동굴에 족장 루카가 살았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급기야 1990년 7월 미라들을 발견함으로써 그 증거를 얻었다. 그 미라들을 통해, 족장이 피난할 당시 하다드 마을의 부녀자와 아이들도 동행했다는 역사서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위공격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허약한 사람들은 그 공격을 견뎌 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겉옷과 천조각들을 모아 수의를 만들었다. 이는 미라 발견 이후 2년여에 걸쳐 행해진 다른 G.E.R.S.L. 일원인 프랑스의 예비역 대령 출신 제라르 피귀와 레바논의 건축기사 우사마 칼랍에 의해 수행된 복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동굴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품으로 여자와 아이부터 죽어갔다.

 

2년간 비밀에 부쳐졌던 미라 발굴 소식

이제 발견된 미라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겼다. 전쟁 중이던 레바논에는 미라들을 보관할 마땅한 건물이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박물관에 가져다 놓았을 터지만 그 박물관은 동서베이루트의 중간에 위치하여 집중포화의 표적이 돼 있었다.

G.E.R.S.L.은 그 냄새나는 것들을 은밀하게 베이루트로 운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유의해야 했던 것은 베이루트로 가는 길 10㎞ 지점마다 레바논군이든 시리아군이든이 운용하는 검문소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자동차와 운전자는 매우 조직적으로 검문을 받아야 했다. 그 검문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수녀와 수도승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명의 수도승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알리고 그들의 협조를 얻어 그 미라들을 하나씩 베이루트로 옮겼다.

일단 미라들을 옮기고 난 뒤에는 일반인의 관심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파디는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한 친구가 베이루트 근처 제니에라는 도시에 있는 아주 멋진 아파트 건물의 지하실을 그들에게 제공했는데, 여기에 그 8구의 미라가 안장됐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이 미라들은 과학적 검사를 받을수 있는 상태로 보존돼야 했다. 그러려면 동굴의 기후처럼 극도의 건조한 상태를 만들어 내야 했다.

파디는 사업상의 여행이라고 속이고서 이탈리아의 튜린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 전문가의 조언을 들었다. 그는 공기건조기도 얻고 플렉시 유리로 연금술적 관도 만들었다. 그후 그는 매일밤 그 관에 부착된 규사로 만든 투명한 병과 페놀을 분사하는 코트크마개가 달린 병을 갈아주고 있다.

폭격이 점점 심해지던 1990년대 말, 파디의 부인 마리 클로드와 당시 10세이던 그의 딸도 폭격을 피해 그 건물로 피신했다. 그들은 3개월 동안 계단 아래에서 쪼그린 채 자야만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라들은 유리 상자 안에서 아주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뒤 부인과 딸이 시리아로 피신한 뒤에도 파디는 미라들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해 내내 그는 단한번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었을 뿐이다.

지금 그는 그 미라들이 일종의 자식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는 그들에게 이름까지 지어주었는데, 가령 맨처음 발견된 작은 소녀는 '야스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점차 나는 그 미라들을 질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파디는 야스민과 대회를 나누기 위해서인 듯 시리아어까지 배웠다. 우리 딸도 시리아어로 주기도문을 배워야 했다. 나는 이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내가 질투하는 대상이 이미 7백년 전에 죽은 존재임을 돌이켜보아야 했다"고 마리 클로드는 고백하고 있다.

전쟁이 잠잠해지자 G.E.R.S.L.은 이 미이라들을 레바논 정부에 반환했다. 그들의 가장 큰 소망은 하다드 동굴이 모든 약탈로부터 보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임무로 그곳을 탐험하는 일이 님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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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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