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에 소련의 스파이기가 미국 방공망의 중심부에 침범했다면 전투기가 뜨고 비상경계령이 내리는 등 한바탕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이류신76-MD라는 이름의 거대한 러시아 비행기가 콜로라도주 덴버 부근에 착륙했을 때 미국 공군은 조용했다. 이 공항에서 비행기로 몇분 거리에 북미대륙우주항공방위본부와 미항공경비대기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종식됐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비행기에는 32명의 러시아 과학자와 14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연방붕괴전에 군관계자였다. 이들은 비행기를 보기 위해 몰려온 견학자들에게 장비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 촬영도 허용했다.
이 획기적인 계획은 미 해양대기국(NOAA)의 지구물리학자 듀허스트가 7개월간 노력한 결과 성사됐다. 그는 92년초 모스크바의 그로모프비행실험소에서 이 '나는 실험실'을 보고 이를 미국에 전시해야겠다고 생각, 소련과학자들과 미국 당국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류신에 탑재된 장비는 정밀한 과학탐사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가령 지자기와 중력의 미세한 변화를 측정하는 장비는 광물 원유 천연가스등의 탐사에 이용되지만, 이와 동시에 해면의 자력변동을 측정하면 잠수함의 이동을 볼 수 있고 중력지도를 통해 미사일의 명중도를 높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비행기가 몇 년 전에 아무 연락없이 미국에 착륙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