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제작한 5인치, 7인치 막스토브 카세그레인과 12인치 슈미트 카세그레인 망원경은 우리나라에서 관측할 수 있는 성운성단의 모든 기록은 새롭게 할 예정이다.
서쪽 지평선에 붉은 빛이 물들기 시작하면 우주로 향한 마음의 창을 조심스럽게 여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망원경 제작의 1인자'로 알려진 이만성씨(40)는 저녁놀이 사라지고 어둠의 장막이 짙게 깔리면서 또다른 세계로 몰입하기 시작한다.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좀더 가깝게 두기 위해, 우주로 열린 창을 보다 맑게 하기 위해 망원경의 반사경을 연마하는 것이다. 때로는 두세시간 정도로 끝나기도 하지만 새벽 두세시를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웬만한 아마추어천문가라면 이만성씨가 망원경 제작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저 깊이 빠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작품이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는 렌즈만 가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면부터 그리고 경통과 마운트는 물론 모든 부속을 직접 제작한다. 이씨가 주로 만들고 있는 막스토브 카세그레인식 망원경은 매우 독특하기 때문에 개인이 자작하기에는 어려운 형이다. 그렇다고 이씨가 망원경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망원경사업자는 아니다. 직업을 따로 가진 아마추어일 뿐이다.
법대출신의 엔지니어
이만성씨는 서울신탁은행에서 과장대우로 일하고 있다. 학교도 망원경과는 거리가 먼 법과대학을 나왔다. 이러한 경력의 그가 아마추어 망원경 자작자로 정상에 있는 까닭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의 어린시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정중학 1학년 다닐 때입니다. 서울역 부근에서 성능이 괜찮은 망원경(지름6㎝ F15 굴절망원경)을 가지고 10원씩 받고 달을 보여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본 달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얼마나 인상이 강렬했던지 요즘 아무리 성능이 좋은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해도 그때 본 달분화구를 못따라 가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가슴속에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천체를 향한 꿈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할머니를 한달을 졸라 거금 3백원을 타내 합동과학교재사로 달려가 천체망원경 키트를 샀다. 당시 버스요금이 2원50전하던 때니까 어린 나이로서는 엄청난 투자였다. 천체망원경 키트라고 해봐야 지름 4㎝ 안경알 두개와 켄트지를 말아 만든 경통과 마운트가 고작. 달분화구 정도는 보였으나 이미 커질대로 커진 소년의 꿈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부터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광학에 관한 책을 찾으러 남산도서관을 수시로 들락 거렸으며 아현동에 있는 시립도서관에서는 책이 하도 욕심나 필요한 페이지를 면도날로 자르는 나쁜 짓을 하기도 했다는 것.
중학 3학년 때부터는 입시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하고싶은 것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광학이론에 관한 자료정도 모으는 일만 계속했을 뿐이다. 그래도 짬이 나면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서 라디오나 화약에 관한 책들을 사 모았다. "그때 닦은 실력으로 지금도 웬만한 화약은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이씨는 "대학은 해양(생물)학과에 가길 원했으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법학과를 택했다"고 아쉬워한다.
아버지의 완강한 고집을 꺾어보려고 할머니를 비롯한 주위의 지원을 받아 여러번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별로 뜻이 없는 법공부를 하게 된 것. 대학입학 후에도 본격적인 고시공부를 하기 전에는 다양한 취미활동에 몰입했다. 아마추어무선서클에 들어가 1년 동안 열성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도 간혹 이 당시의 친구들을 만나서 우정을 나눈다고.
머리를 맑게 하는 책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갈 때에도 항상 곁에 지니고 다녔던 책들은 기계나 전자, 혹은 광학에 관련된 책이었다. 법률에 관련된 책을 보다가도 머리를 식힐 때 들여다보는 책이 복잡한 회로도가 잔뜩 그려진 공학도서. 지금도 이런류의 책만 보면 머리속이 시원하게 뚫린다고 한다. 이런 이씨가 고시에 합격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씨가 망원경 제작을 세부 전공으로 정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대학 2학년 때 명동 뒷골목의 외국서적 판매대를 뒤지면서다. 이날도 '머리를 식히기 위한 책'을 찾으러 나와 SKY & TELESCOPE라는 잡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 잡지에는 말 그대로 '망원경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다. 평상시 궁금하던 것들이 망라돼 있었던 것. 하도 기뻐서 목차에서부터 편집후기까지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외우다시피 했다. 물론 광고까지도
이렇게 쌓아놓은 기본적 소양이 '귀인들'을 만나면서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1976년 겨울 연세대 옥상에는 아마추어 망원경 전시회가 열렸다. 여기에 참가한 성인들은 고작해야 열명 내외였다. 망원경 할아버지 나은선씨를 비롯 김성수 윤실 윤태석 변상식씨 등 현재 아마추어천문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분들이 다수 참가했다. 이만성씨도 제대를 앞둔 군인의 신분으로 이 행사에 참가했던 것. 성인들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이들은 모임을 만들었고 후에 이 모임은 유명한 천문서클 미리내(은하수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의 모태가 됐다.
막내뻘인 이만성씨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나은선 할아버지에게서 반사경을 연마하는 '장인기질'을 습득한 것은 호랑이가 날개를 단격. 빛 파장의 8분의 1(10만 분의 1㎜)내의 굴곡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도를 닦는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이 정도의 오차는 기계로 측정하기보다는 빛을 쪼여서 느낌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몇개월씩 작업한 것을 느낌만으로(옆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도 없음) 한달 이상씩 수정하는 자세를 배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이씨는 본격적으로 망원경제작에 들어갔다. 제작비가 월급으로 충당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작품은 78년에 완성한 7인치 막스토브 카세그레인식(F15). 도면부터 그려서 몸체를 가공하는데 1년, 렌즈를 가공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남들이 하지않는 막스토브 카세그레인식을 하겠다니까 주위에서 많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준비했던 자료를 토대로 일사천리로 밀어붙였지요. 다 만들어 현장에 나가 관측을 해보니 맘에 안 드는 게 많더군요 그 이후에 개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작품도 역시 막스토브 구경은 첫 작품보다 작은 5인치지만 사진찍기 편하게 하기 위해 F수를 5.6으로 줄였고 오치를 줄이기 위해 웜기어 대신 디스크 롤러 드라이버를 채용했다. "이 형을 확장하면 세계 최대 망원경으로 알려진 팔로마산 헤일망원경이 된다"고 설명하는 이만성씨는 올여름내로 두 가지 작품의 개량형을 완성할 예정. 이 작품이 완성된다면 막스토브의 '마지막 제너레이션'이 탄생하는 셈이다. 1만3천달러의 가격으로 국내 대학에 들어와 있는 7인치 막스토브와 성능 비교도 해볼 예정.
개인 천문대의 꿈
이만성씨의 작품 중 단연 압권은 85년부터 시작해 현재 95%의 진척을 보이고 있는 12인치 슈미트 카세그레인식 망원경. 아직 용의 눈에 점찍는 일(畵龍點睛)을 안하고 있는 이유는 이 망원경을 설치할 개인 돔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끔 대학 천문대에 기증하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기증하면 뭐합니까. 녹이나 슬게 할 뿐이지" 라며 일축해버린다.
역시 이씨의 꿈은 지금까지 제작한 망원경이 놓일 개인천문대를 만드는 것이다. 아마추어천문가라면 누구나 들러 별사랑을 펼칠 수 있는 그런 곳을 꿈꾸고 있다. 오래전부터의 꿈이기 때문에 망원경 제작도 이 계획에 맞춰 진행하고 있는 셈. 첫번째나 두번째도 모두 12인치 슈미트 카세그레인에 붙게 돼 있다는 설명. 첫째 것은 관측용이고 두번째 것은 사진촬영용, 세번째 것은 천문대용 등으로 이미 역할분담도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직 천문대를 세울 땅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 30~40명정도 망원경 자작자가 있지만 이들 중 일정수준 이상의 망원경을 완성 해본 사람은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 대부분 중도에서 포기하고 적금 부어 망원경을 사버리고 만다는 것. 물론 개중에는 돈 주고 산 망원경이 마음에 안들어 다시 자작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더군다나 경통과 마운트는 물론 모든 부속까지 다 만드는 사람은 이씨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혼자만 너무 앞서 나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며 몇가지 자랑(?)을 늘어놓는다. 좋은 책을 보다가 혼자 보기 아까우면 번역해 사람들한테 돌린다는 것. 얼마전에도 망원경제작과 관련된 책을 2백권 찍어 실비만 받고 아마추어들에게 돌렸으나 3분의 1밖에 소화하질 못했다고 한다. 아마추어후배들을 위해 충분히 봉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것. 미리내에서도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미추어들을 우선 명단이라도 뽑아볼 계획.
국민학교에 다니는 두 딸들이 아빠를 따라 다니며 어깨너머로 배운 별사랑이 커가고 있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않는다는 이씨는 개인천문대를 세워 뭘 할 것이냐는 질문에 "별 보지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만다. 한참 후에서야 "능력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관측이 가능한 모든 성운 성단을 직접 찍어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