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2천개 정도의 유전자에 대한 염색체지도가 작성돼 유전병 극복에 기여하고 있다.
생명과학의 발달은 인류를 풍요롭고 쾌적한 여건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왔다. 이제 21세기 문턱에 선 생명 과학은 인간 자신을 주제로 하는 대규모 '인체게놈연구사업'(human genome project)을 범세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인간모습의 반영인 유전형질의 인자를 모두 해독, 인간을 분자수준의 정밀도를 갖고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생명의 맨하탄프로젝트'라고도 불리는 이 사업은 인류역사상 커다란 획을 긋는 엄청난 연구사업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설계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며 또한 생명현상의 이해에 더한층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울러 새로운 차원의 생명과학과 응용을 인류에게 제공해줄 것이고, 이는 인류가 21세기의 새로운 문명권으로 진입 하는데 꼭 필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염색체는 소설의 각 장에 해당
사람의 유전형질인자(화학명은 DNA, deoxyribose nucleic acid)는 한편의 장편 소설처럼 구성돼 있다. 소설이름은 '인체게놈'(human genome)이라 할 수 있는데, 인체게놈에는 유전정보의 기본문자인 A, C, G, T라는 염기가 약 30억개나 모여 있다. 여기서 염색체(chromosome)는 소설의 각 장(章)에 해당된다. 각 염색체는 5천만에서 3억개 정도의 염기로 이뤄져 있다.
소설의 각 장에 쓰여진 의미있는 문장들을 유전자(gene)라고 부른다. 이 유전자들은 각기 특정한 의미를 지니며 독자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 인체게놈안에 10만개 정도의 의미있는 유전자(gene)가 산재해 있는데 이들이 우리 생체에 필요한 물질에 대한 각종정보를 제공, 생명체를 유지해주고 있다.
문장의 각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세개의 염기로 구성된 유전암호(genetic code)다. 이들은 생체내에서 단백질 합성순서에 맞는 특정 아미노산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유전적 암호를 구성하고 있는 염기(base)는 각 단어의 문자(알파벳)에 해당한다.
1877년 플레밍(Walther Fleming)이 염색체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이래, 과학자들은 염색체가 유전현상과 유전병에 관련됨을 알고 수많은 연구를 수행해 왔다. 그 결과 독립된 유전정보단위인 유전자들이 염색체 위에 일렬로 배열돼 있음을 알게 되었고, 특정유전자가 특정염색체 위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예로 1911년 월슨(E. B. Wilson)은 색맹과 관련된 유전자가 X염색체 상에 위치해 있음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사실상 이것이 유전병관련 염색체지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후 많은 연구자들이 유전병 관련 유전자가 어떤 염색체 위에 있는지를 규명, 현재 2천개 정도의 유전자를 염색체 위에 나타낸 염색체지도(chromosomal map)가 작성돼 있다.
유전적 지도와 물리적 지도
유전자지도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유전적 지도(genetic map)와 물리적 지도(physical map)가 그것이다. 유전적 지도는 기능유전자의 위치를 나타내주는 지도다. 이 지도를 통해 유전형질인자인 DNA에 관한 정보 뿐아니라 효소 호르몬 면역조절물질 등 생체활성단백질의 구조에 관한 정보, 새로운 유전기능정보 등 상당히 포괄적인 유전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유전적 지도는 기능유전자의 순서와 연결정보를 명확히 알려준다.
그러나 유전적 지도에는 수학적인 거리의 개념이 내포돼 있지 않아서 방대한 인체게놈의 유전정보를 이해하고 연구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거리의 개념이 포함된 지도를 제작하고 있는데 그것이 물리적 지도다. 이 지도는 특정 염기수마다 표식(STS, sequence-tagged sites)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10만개의 염기(lcentimorgan, cM)당 하나의 표식을 함으로써 보다 수월하게 유전자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면 유전적 지도와 물리적 지도는 왜 필요한가. 이는 어떤 사람이 새로운 지역이나 타국에 갔을 때 지도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약 30억개의 염기로 구성된 방대한 양의 사람유전정보를 어디에서부터 접근하고 어디를 관찰해야 하는가를 정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인체게놈의 적절한 위치에 표식을 하고 구획을 나눔으로써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유전적 지도는 어떤 지역의 관광지도와 같이 특정기능위치에 관한 사항만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 물리적인 지도는 정확한 거리측정에 따른 등고선이 나타나 있고, 도로 등과 같은 특정한 지형지물의 순서에 따라 표기돼 있는 일종의 정밀지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두 지도는 따로 제작되고 있다. 물리적 지도는 특정위치의 DNA를 절단하는 제한효소로 한 염색체를 분할한 뒤, 여기서 생긴 DNA절편이 다시 연결되는 순서를 표식해 놓은 것이다.
일반적인 세계지도와 서울특별시지도 등은 용도에 따라 지도의 자세한 정도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물리적 지도에서도 여러 종류의 저해상도와 고해상도의 지도가 제작 돼 있다. 궁극적으로 가장 정교한 물리적 지도는 A C G T로 표기되는 유전염기서열 그 자체다. 따라서 인체게놈연구란 유전적 지도와 물리적 지도작성과 함께 인체게놈에 담겨있는 모든 염기서열을 알아내는 연구사업이라 할 수 있다.
유전자지도 작성기술 10가지 이상
인체게놈은 일직선 거리가 약 1.5m이지만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자수준의 생물 유전정보물질들의 집합이다. 이렇게 미세한 물질을 분석해 유전정보를 찾아내고 염색체 위에서의 상대적 위치를 정하는 작업이 생각처럼 간단히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처음으로 염색체지도를 작성한 과학자들은 색맹과 같이 여성보다 남성에서 발생률이 높은 성(性)관련 유전질환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즉 그들의 가족관계를 조사해 X염색체의 지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적용에는 한계가 있어서 새로운 염색체 또는 유전자 분석기술이 요구됐다.
1980년대에 들어와 급속히 이뤄진 분자유전학과 유전공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유전자 지도작성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 최근에는 10가지 이상의 유전자지도 작성기술이 개발 돼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앞으로 인체게놈연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 빠르고 정확한 유전자 분석기술이 새로 선을 보일 것이고,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유전정보를 알려주는 유전자지도가 등장할 것이다.
인체게놈에 담겨있는 모든 유전정보를 해독하기에 앞서서 일차적으로 저해상도의 유전자지도를 작성해야 한다. 이때 세계각국의 연구자들은 일단 일정한 구획을 선정한 뒤 이를 더 세분해 특정염색체나 유전자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과정을 통해 매우 세밀하고 다양한 유전정보가 많이 실려있는 고해상도의 유전적 지도와 물리적 지도가 작성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 지도를 기준삼아 인체게놈의 전 염기서열을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인체의 설계도가 완전히 규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체게놈연구의 윤곽이다.
이 다양한 형태의 유전자 지도와 인체게놈의 전 염기서열 정보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설계도를 갖게 된다. 이 설계도는 사실상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는 모든 연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생명과학의 발달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간주할 수 있다. 둘째로 인류가 겪는 각종 질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알게 되고 또 그 원천적인 치료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셋째로 인체게놈연구에는 분자생물학 생화학 화학 물리학 전기학 전산학 기계학 등 수많은 과학분야가 동원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생명과학기술과 첨단과학장비가 개발될 소지가 크다. 21세기에는 이 신과학기술을 이용, 생명과학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인류는 새로운 문명권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넷째로 인류와 다른 생물의 게놈에 내재된 생체의 구조와 기능을 종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를 이용한 새로운 생명공학기술과 생체모방기술이 정착될 것이다. 이 산업기술은 화석연료인 석유와 석탄이 고갈될 21세기에 중심산업으로 부상, 신생물산업사회를 구축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신생물산업사회는 녹색혁명과 함께 인류를 건강하고 풍요롭게 하며 깨끗한 환경을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