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억년 전에 지구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오늘의 정설. 그런데 이 숫자가 인정받을 때까지 허다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최근 경기도 일산(一山) 신도시 부근에 위치한 선사유적 발굴현장의 토탄층에서 네개의 볍씨가 발견됐다. 그 볍씨는 4천3백40년 전의 것임이 방사성탄소(${ }^{14}$C) 분석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4천3백40년이라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발표됐지만 아마도 오차가 ±2백년 정도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가 단기 4324년이니까 이 볍씨는 단군 치하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이 잘못 뿌린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지금부터 3천년 전의 쌀이 발견된 바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벼농사가 일본에서 전수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번 발굴로 그 설이 뒤집어져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런데 탄소(C)로 어떻게 볍씨의 연령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볍씨의 나이
쌀의 화학조성은 녹말, 소량의 단백질, 식물유 그밖의 미량물질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황 등을 포함하는 복잡한 유기화합물이다.
알다시피 유기물은 탄소가 주성분이다. 탄소는 여섯개의 동위체를 갖고 있다. 그들중 ${ }^{12}$C가 자연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98.892%로 가장 많고, ${ }^{13}$C의 점유비율이 1.108%이므로 이 둘을 합하면 100%가 된다. 물론 이 둘은 방사성 탄소가 아니다. 그러나 나머지 네개는 방사성 탄소인데 그중 세개는 반감기가 20분 미만이고 ${ }^{14}$C만이 반감기가 5천5백68년이다.
${ }^{14}$C는 대기 중에 ${ }^{14}$C${O}_{2}$(탄산가스) 형태로 존재한다. ${ }^{12}$C와 ${ }^{14}$C의 비는 1 대(對) ${10}^{-12}$, 즉 1조분의 1이다. 그리고 대기 중의 ${ }^{14}$C${O}_{2}$의 양은 늘 일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 }^{14}$C는 어떻게 생길까.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간 질소의 동위체 다섯개 중에서 비(非)방사성 질소인 ${ }^{14}$N 가운데 소수는 우주선에 포함된 중성자의 포격을 받아 ${ }^{14}$C로 변한다. 이 변화는 ${ }^{14}$N 핵속의 양성자 하나가 중성자와의 충돌로 쫓겨나고 그 자리에 중성자가 들어 앉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원자번호가 7인 질소(${ }_{7}^{14}$N)가 원자번호가 6인 탄소 (${ }_{6}^{14}$C)로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 }^{14}$C는 5천5백68년의 반감기를 갖는데 결국에는 ${ }^{14}$N로 되돌아간다. 바로 이런 성질을 이용, 우리는 미지의 식물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를 측정할 수 있다. 만일 탄소동화작용으로 ${ }^{14}$C${O}_{2}$를 흡수한 식물체 속의 ${ }^{14}$C의 양이 대기중에 있는${ }^{14}$C 양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 식물체의 연령은 5천5백68년 내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일산의 볍씨는 아직 반감기 만큼의 연령에는 도달하지 못한 식물체로 간주할 수 있다. 이처럼 방사성 원소는 그 반감기와 최후생성물이 알려져 있을 경우, 그 방사성 원소를 포함한 물질의 연령을 측정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반감기보다 훨씬 짧거나 지나치게 긴 연령은 측정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 }^{14}$C의 경우, 수십년 미만이거나 4만년 이상의 연령은 측정이 곤란하다.
암석의 최고 연령은 38억년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알아낸 암석의 최고연령은 38억년이고 지구의 연령은 45억년이다.
이 수치가 처음으로 계산되고 또 이 값이 모든 학자들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26년 이후부터다. 사실 그후에도 일부 지질학자들은 이 추정치를 믿으려 들지 않았다.
방사능이 발견된 것은 1896년, 그러니까 19세기가 막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이때부터 방사성 원소를 이용한 암석과 지구의 연령측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많은 논쟁을 일으켰지만 결국에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여기서 잠깐 그 논쟁의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자.
철학자들도 이 논쟁에 오래 전부터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하늘과 땅을 보고 아울러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총동원, '지구의 나이는 무한하다'는 다소 기대섞인 결론에 이르렀다.
지구연령을 제일 짧게 잡은 사람은 아일랜드의 대주교 어셔였다. 그는 1654년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연구한 뒤 지구의 창조는 B.C. 4004년 10월 26일 오전 9시에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그후 이 날짜는 누군가에 의해 성서에 삽입됐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교리로 둔갑한 것이다.
그후 한동안 유럽사람들은 지구창조의 시점을 지금부터 약 6천년 전으로 잡았다. 절대로 6천년 전은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을 이단으로 몰기도 했다. 한국에도 지구가 6천년 전에 창조됐다고 믿는 기도교인이 적지 않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이 근대화됐다고는 하나 18, 9세기까지도 완강한 교리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사회전반이 지극히 경직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사회에서 과학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내놓는 일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문학자 핼리(Halley, 1656년~1742년)는 1715년에 '지구연령 측정을 위한 제안'이라는 서한을 영국 학술원에 보냈다. 그는 바닷물의 소금중 나트륨(Na)은 쉽게 소실되지 않을 뿐더러 바다 밑으로 침전되거나 퇴적되지 않으므로 강물이 1년동안 바다로 운반해 가는 나트륨의 양을 측정한 뒤 그 측정치로 바닷물의 나트륨 양을 나누면 바다연령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측정이 용이하지 않았으므로 핼리 자신이 그 값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후 1898년 졸리(Joly, 1857년~1933년)가 바다의 나이가 8천만~9천만년이라고 발표할 때까지 아무도 핼리의 제안을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트륨이 소실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었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바다 밑 퇴적물에 들어있는 소금은 해구(海構)에서 다른 판(板)아래로 섭입(攝入)돼 결국에는 암석의 성분이 돼 버린다고 한다. 나트륨 외에도 바다의 나이를 산출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졸리의 계산치는 그 신뢰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졸리가 얻어낸 값은 너무 적게 계산된 것이었다.
1795년 '지구의 이론'이라는 저서를 펴낸 허튼(Hutton, 1726년~1797년)은 오랜 연구 끝에 동일과정설(제일설)을 주장했다. 그는 "지구에는 시작의 흔적도, 끝날 징조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후 프랑스의 퀴비에(Cuvier, 1769년~1832년)는 1812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에서, 지표에서는 격변 즉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여러 번 반복됐다고 주장, 허들의 동일과 정설을 '허튼 소리'라고 몰아 세웠다.
이 무렵 영국의 지질학자 라이엘(Lyell, 1797년~1875년)이 그 유명한 '지질학 원리'(1830년~1866년)를 연달아 출판, 허튼이 처음 소개한 동일과정설을 이어받아 자세히 실증적으로 서술했다. 라이엘이 득세하면서 퀴비에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으나 노아의 홍수가 격변의 하나라는 주장이 교계의 지지를 받아 지금도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영국의 물리학자 켈빈경(Lord Kelvin, 1824년~1907년)은 지구는 2천만년~4천만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붉은 불덩어리였던 지구가 현재와 같이 냉각되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고려해 지구의 연령을 계산했다. 당시로서는 전혀 틈이 없어 보였던 켈빈의 주장에 반발한 지질학자는 거의 없었다.
켈빈경은 퀴비에의 동일과정설 부정에 동조, 동일과정설은 믿을 수 없는 학설이라고 맹비난했다.
한편 라이엘은 켈빈경이 산출한 지구연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지구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이엘의 친구인 다윈(Darwin, 1809년~1882년)은 라이엘의 권유를 받아들여 진화론의 기본서인 '종의 기원'을 1859년에 출판했다.
이 또한 켈빈경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다윈은 하등생물이 고등생물로 진화하는데는 적어도 3억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1864년 켈빈경이 지구의 연령은 최대로 잡아도 4천만년이라고 주장하자 그는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그 심정은 라이엘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엘은 '종의 기원'발표를 다윈에게 종용한 사람이지만 웬일인지 다윈의 진화론적인 책 내용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다윈에게는 켈빈경과 라이엘이 모두 반대편이었다. 그러나 라이엘은 1866년에 내놓은 '지질학 원리' 최종판에서 다윈의 생각을 지지, 다윈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지질학의 근본원리인 동일과정설을 켈빈경이 부인하자 격분한 라이엘이 다윈의 생각을 지지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한동안 1억년설이 유력
1898년 졸리가 바다의 연령은 약 1억년이라고 주장했는데 기키(Geikie, 1835년~1925년)라는 영국의 유명한 지질학자는 지구의 연령도 1억년이라고 발표했다(1986년).
층서학(層序學)의 아버지 스미스(Smith)의 조카인 필립스(Phillips)는 1850년 지구연령이 9천6백만년이라고 말했다. 또 다윈의 아들(천문학자)도 지구의 조석작용으로 인해 지구의 자전속도가 오늘날과 같이 되는데는 1억년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지질학자와 진화론자는 켈빈경의 지구연령 측정치나 기키 등의 1억년설(說)이 모두 실제보다 엄청나게 깎인 연령이라고 생각했다.
지질학자와 진화론자가 지구연령 측정에 관심을 쏟고 있던 19세기 말에 큰 이변이 발생했다. 1896년에 베크렐(Bequerel)이 방사성 물질을 찾아낸 것이다. 이 발견은 지질학자와 다윈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전기가 되었다.
1900년에는 캐나다의 맥길대학 교수였던 러더포드(Rutherford, 1871년~1937년)와 소디(Soddy, 1877년~1956년)가 방사능의 발생과정을 설명했다.
또 퀴리(Curie)부인은 1902년 남편과 함께 방사성 물질인 라듐(Ra)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년 후 퀴리부부는 라듐이 자신의 무게만한 얼음을 1시간내에 녹일수 있다고 발표했다. 뒤이어 러더포드와 바네스(Barnes)는 열은 알파(α)입자가 주위의 물질과 충돌할 때 발생하며 α입자의 수가 증가할수록 높은 열이 얻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러한 연속적인 대발견을, 당시 곤경에 빠져 있던 지질학자들이 놓칠 리 없었다. 방사능이라는 구세주가 나타나 고착국면을 타개하게 된 것이다.
러더포드의 제자인 볼트우드(Boltwood)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방사성 물질에 대한 연구에 열중, 1905년 우라늄 광물중에서 납(Pb)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이 우라늄(U)의 최종생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볼트우드는 우라늄-납 (U-Pb)측정법을 사용, 여러 종의 광물을 분석한 뒤 그들의 연령범위가 9천2백만년~5억7천만년 사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이 수치는 우라늄계열 방사성 원소의 반감기가 충분히 연구되기 전에 산출된 것이어서 실제 연령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얼마 후 새 반감기를 사용한 결과, 그 광물의 나이는 최대 10억년이라는, 보다 연장된 결과를 얻었다. 이 값은 당시로서는 놀랄만큼 긴 광물의 연령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의 지질학자 중에는 켈빈경이 제시한 지구연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들의 공격을 받은 러더포드와 볼트우드는 지구연령 연구에 흥미를 잃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암석중에 많은 양의 라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스트러트(Strutt)만은 우라늄-헬륨(U-He)법을 개량하는 등 지속적인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그도 결국 이 분야를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이 문제에 매달린 사람은 대논쟁 당시에는 학생이었으나 후에 저명한 지질학 교수가 된 홈즈(Holmes, 1890년~1965년)였다. 그는 지구연령 측정연구의 흥미로움을 일반에게 다시 일깨워 주었고 중요한 연구과제를 쉽게 포기하는 지질학자들은 각성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1911년 홈즈는 많은 암석시료를 분석, 16억년이라는 최고치를 얻어냈다.
1913년에는 소디가 동위원소의 존재를 밝혀냈다. 아울러 동위체들 중에는 방사성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또 동일원소의 여러 동위체들이 서로 섞여 있으면 측정된 연령에 오차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이 무렵에 처음으로 지적됐다. 암석연령이란 결국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지질학자도 다수 생겼다.
1915년 홈즈는 ${ }^{238}$U의 반감기가 45억년임을 알아냈으나 그의 연구결과를 믿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는 1921년 지질학자 생물학자 수학자 물리학자가 모인 학회에서 지구의 연령은 수십억년이라고 언명했는데 뜻밖에도 그 주장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일부 물리학자는 그들의 선배가 제시한 1억년설을 그대로 믿으려는 기색을 역력히 내보이기도 했다.
1926년 미국의 과학아카데미 국가연구평의회는 산하에 지구연령에 관한 전문위원회를 설치했다. 홈즈는 여기에도 연구보고서를 계속 제출했다. 결국 이 위원회에서도 홈즈가 제시한 방법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질학적 절대편년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절대 연령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돼
필자가 1940년대에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지질학 교수들은 지구의 절대연령이 그리 중요치 않다고 가르쳤다. 상대적인 편년(編年)만 알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중생대의 지층은 고생대의 지층보다 새로운 것이다. 석탄기의 지층은 상대적으로 페름기의 지층보다 오래된 것이고 데본기의 지층보다는 새로운 것'이라는 정도로 슬그머니 넘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볍씨의 나이가 4천3백40년이라는 것을 흥미롭게 생각하듯이 암석의 연령, 나아가서는 지구의 연령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지질학자들도 암석과 지구연령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러더포드 볼트우드에서 홈즈로 이어지는 절대연령 측정으로 20세기 벽두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령논쟁은 결국 홈즈의 승리로 끝났다.
요즘에는 지구연령을 측정할 때 운석을 이용하고 있다. 또 여러가지 납의 동위원소를 활용한 계산방법이 있다. 이들은 지구연령=45억년 내외라고 한결같이 밝히고 있다. 한편 세계최고(最古) 암석의 연령은 38억년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은 경기도 오산 부근의 편마암인데 그 연령은 29억년 정도다.
현재 암석의 연령은 일반적으로 1계열의 방사성 원소를 활용해 측정하고 있으나 가능하면 2, 3계열 방사성 원소를 함께 사용, 서로 보완하는 것이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