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완성형 코드는 풍부한 한글사용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컴퓨터에 한글을 표현하는 '한글코드'를 조합형으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관계 학자들과 컴퓨터 이용자들 사이에서 비등하다. 현재의 국가 표준코드는 지난 87년에 공업진흥청이 정한 2바이트 완성형체계의 'KSC-5601'.
조합형은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에 각각 하나의 코드를 부여해 이를 조합하여 글자를 표현하는 방식이고 완성형은 완성된 글자 자체에 각기 고유의 코드를 지정한다. 따라서 조합형은 자소(字素)로 쓰이는 한글 자모(子母)만 약속해두면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지만 완성형은 코드를 지정한 글자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컴퓨터에 표기할 수 없다. KS코드는 한글 2천3백50자를 비롯, 한자 기호 특수문자 등을 포함해 8천여자를 정의하고 있다.
조합형 코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KS코드로는 한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다"고 말한다. 가령 '뮬 뾸 한' 등의 글자는 컴퓨터 상에서 표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글자나 고어(古語)를 인쇄하려면 비슷한 글자를 변형시켜 사용자가 스스로 없는 글자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전자출판정보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기성 교수(신구전문대)는 "현행 KS코드는 한글의 자랑인 과학성을 컴퓨터로 한껏 발휘하지는 못할 망정 풍부한 우리말 사용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완성형 코드가 한글의 원리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영문 알파벳이나 일본의 가나 한문 등은 각각의 문자를 하나의 코드로 지정해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 합쳐 하나의 글자를 이루는 한편 각각의 자소가 독립적인 문자로도 기능한다. 가령 데이터를 검색할 때 받침이 'ㅇ'인 글자를 모두 찾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완성형 코드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국어사전에는 '가'다음에 '각'이 나오지만 완성형 코드를 채택한 컴퓨터에서는 사전배열에 따라 단어를 검색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는 컴퓨터에서 한글을 다루는데 중대한 차질을 빚고 있다고 프로그래머들은 말한다.
그러면 이렇게 여러가지 문제를 발생시키는 2바이트 완성형 코드가 어떻게 국가표준으로 결정됐는가. 여기에는 일부 학자들과 관료들의 편의주의적이고 행정만능주의적인 발상이 숨어있다.
먼저 KS코드의 제정과정을 살펴보자. 개인용 컴퓨터(PC)가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한글코드에 대한 국가표준이 없어 메이커마다 한글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조합형 완성형 뿐만 아니라 같은 조합형 내에서도 2바이트 3바이트 n바이트로 나눠져 있었고 업체마다 코드지정방식이 달라 프로그램이나 데이터의 호환성이 결여돼 있었다. 한글코드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정부는 국가표준을 정해 당시 추진중이던 행정전산망사업에 이를 채택하겠다고 밝혀 표준화작업에 적극 나섰다. 표준연구소에서 실무작업을 맡았지만 이 표준화작업은 한국통신 전자통신연구소 데이콤 등의 통신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됐다. 행정전산망에 이용하려면 한글데이터를 주고받는 문제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한글코드가 ISO(국제표준기구)의 규격을 받아들여 국제간의 통신에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통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성형을 채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몇차례 여론수렴을 위한 공청회도 열렸으나 업체들간에 이해관계가 엇갈려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통신론자들의 주장대로 국가표준은 완성형으로 결정됐다. KS코드가 강제사항이 아니고 행정전산망용으로 적용됐지만 그후 한국통신에서 돈을 댄 '교육용 컴퓨터 보급'사업에도 이 코드는 그대로 적용됐으므로 업체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이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KS코드를 발표할 때 정부는 '한글을 99.9% 표현가능하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글은 0.1% 표현이 불가능해도 사용자들은 답답함을 느낀다. 또 국제표준규격도 우리나라만 충실히 따르고 있지 미국 같은 나라조차도 자기네 ASCII(아스키, 미국표준코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내부코드는 조합형으로 하고 통신을 할 때 ISO규격에 맞게 코드를 변환시켜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젊은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한 '한글'워드프로세서 '이야기'통신프로그램 등은 완성형과 조합형 모두를 지원한다. 조합형을 원하지만 실제 완성형 코드를 쓰는 이용자들이 많아 이들도 불편이 없게 하려면 프로그램개발에 이중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설명이다. 한글문화원과 일부 컴퓨터사용자들은 지난 3월 30일 '올바른 한글코드 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조합형 코드로 바꾸자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코드문제와 관련해 최근 어느 전산학자가 사석에서 한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글을 꼭 2바이트로 표현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컴퓨터 기술이 일천해 최대한 메모리를 절약해야 했을 때의 얘기다. 현재 컴퓨터 반도체 기술은 한글을 충분히 담을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 다시 말하면 한글문제를 거론하면서 컴퓨터 쪽으로 핑계를 대지 말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