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멀고도 험한 상품화의 길

화제의 대발명 그 이후

실험실의 데이터가 세계최고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산업현장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적의 섬유, 세계가 깜짝''인조다이아몬드 국산화, 연 수백억원 수입대체 효과''최초의 신약 KR10664, 연 3천억원의 국제시장…'.

8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서는 굵직굵직한 연구개발 성과를 잇따라 내놓았다. 여기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세계최초 또는 두, 세번째라는 수식어와 함께, 개발된 제품이 상품화됐을 때는 수백억 내지 수천억원의 돈이 벌릴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현재 이 개발품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실험실 수준을 벗어나 생산공장에서 힘찬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 기업 저 기업을 전전긍긍하면서 상품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개발자의 애간장을 녹이면서 연구실 창고에서 썩고 있는 것일까.

「아라미드 펄프」의 미래

85년 한해는 아라미드의 시대였다. 기적의 섬유, 아라미드펄프가 세계 최초로 과학기술원(현 과학기술연구원)에서 탄생한 것이다. 섬유고분자연구실 윤한식 박사팀은 쇠보다 10배나 단단하고 3백℃의 고온에서도 견디는 세계 최초의 단섬유를 합성해냈다.

윤박사의 대명사가 되다시피한 '아라미드'에는 두가지 개발품이 포함돼 있었다. 아라미드섬유와 아라미드펄프가 바로 그것. 아라미드섬유는 미국의 듀폰사가 세계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고강력섬유로 방탄조끼나 포신(砲身)에 사용된다. 일부에서는 케블라섬유로도 불린다. 윤박사가 개발한 아라미드섬유는 듀폰사의 것과 생산공정이 다르기 때문에 특허를 획득했다.

애초에 윤박사팀이 개발목표로 잡았던 것도 아라미드섬유다. 그러나 이 섬유개발과정에서 고분자중합연구를 하던 중 골치아픈 플라스틱 덩어리를 발견했다. 윤박사는 이를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섬유 제조의 신기원'을 이룩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아라미드펄프를 개발했다. 아라미드펄프는 무방사(실을 뽑지 않음)로 단섬유를 제조하기 때문에 기존 섬유공정의 80%를 절약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 제품 3분의 1가격으로 생산해낼 수 있다. 그렇지만 단단하며 고온에서 내열성이 강하며 단열성이 뛰어난 장점은 그대로 유지된다. 아라미드펄프는 자동차를 비롯 움직이는 물체에서는 필수품인 브레이크라이닝에 석면 대체품(석면은 발암물질로 이미 선진 각국에서는 사용이 규제되고 있다)으로 쓰이며 전자회로기판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 된다. 용도는 개발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무한정'시장이다. 아라미드펄프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물질특허를 획득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아라미드섬유와 아라미드펄프는 모두 상품생산 단계에까지 와있지 못하다. 아라미드섬유는 개발 후 1년만에 (주)코오롱에 넘겨졌다. 코오롱측은 시험공장(pilot plant, 대량생산 전단계) 생산을 거쳐 연간 5백t 규모의 실공장 설계를 완성해 놓았다. 그러나 아라미드 섬유 연료를 공급하는 네덜란드 악소사에서 듀폰측과의 관계 때문에 우리에게 연료공급이 불가능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려면 코오롱측에서 또 설비투자를 해, 연료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 수밖에 없으나, 과연 그 정도의 시장성이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아라미드 섬유는 내년에 특허가 소멸된다.

이제까지 유사기술이 전혀 없는 아라미드펄프도 코오롱측에 모든 것이 넘어가 있는 상태지만, 생산단계까지는 아직도 몇년이 더 걸릴듯하다. 코오롱은 95년 시제품 생산을 목표로 생산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주변엔지니어링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해 고전하고 있는 중이다. 코오롱에서는 윤박사 연구개발비로 연 1억5천만원씩 3년을 대줬고 섬유나 펄프 생산시설 확보에 현재까지 80억원 가까이를 투자했으나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때 아라미드펄프에 대한 듀폰사의 관심은 대단해 코오롱측에 공동생산을 제의하는 등 빈번하게 접촉했으나 코오롱의 '독자개발생산 원칙' 고수로 요즘은 시들해졌다고 한다. 아라미드펄프의 경우 시장성이 워낙 커 상품생산만 가능하다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도전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 아라미드펄프의 물질 특허 만료시한은 2002년이다.

이처럼 아라미드펄프는 상품화에 예상만큼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지만 연구실에서는 한단계 비약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윤한식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자기 자식이 사회에 나가 쑥쑥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가슴 아픈것 아닙니까. 너무 시대를 앞질러 태어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요. 다만 한가지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라미드펄프의 생성원리에 대한 학문적 규명에 세계의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고, 이 연구가 진전되면 생체의 생성 비밀 일부를 밝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중 섬유 아닌 것은 없다. 우리 몸속의 심장 간 혈관 등 모든 조직은 섬유질이다. 아라미드펄프의 생성원리가 확실하게 규명되면 그동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생체 생성의 비밀이 한꺼풀 벗겨질지도 모른다. 현재 윤박사는 올 6월말에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을 발표하고 이를 집중토의하는 고던리서치학술회의(Gordon Research Conference)에 초청받아 '윤이론'(현재 국제 섬유학계에서는 아라미드펄프 생성에 관한 윤박사의 이론을 '윤이론'(Yoon's theory)으로 부르고 있다)에 대해 주제발표할 예정이다.

3타석 1안타

80년대 들어 새로운 연구개발 과제를 잇따라 발표해 화제를 가장 많이 모았던 사람이 김영길 교수(한국과학기술원 재료과)다. 그는 84년 반도체 리드프레임용 신소재인 PMC102를 필두로 초저온강(86년), 초강력강(87년)을 연이어 탄생시켰다.

PMC102는 신소재 개발 사례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리드프레임이란 실리콘 칩을 받쳐주는 몸체. 단순한 몸체가 아니라 실리콘칩에 전기를 공급해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따라서 강도가 커야하고 전기와 열을 잘 통해야 한다. 또 연신율(延伸率)도 좋아야 한다. 사실 금속은 강도가 커지면 연신율이 떨어지는 것이 상식.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합금을 만드는 것이 리드프레임 신소재 개발의 열쇠다.

리드프레임은 실리콘칩 금속세선과 함께 반도체의 3대재료로 손꼽힌다. 실제로 IC(집적회로) 제조원가의 25~30%를 차지한다.

김교수가 리드프레임 소재를 개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풍산금속에서의 요구 때문. 비철(非鐵)금속분야에서 리드프레임처럼 사용량이 많고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이 없고 첨단산업경쟁에서 이기려면 원소재의 개발이 절실하다고 느낀 김교수는 2년간의 연구 끝에 구리 니켈 실리콘 인을 합쳐서 PMC102를 만들어냈다. 리드프레임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미국 올린사의 올린194, 195보다 성능이 우수한 제품이 탄생한 것.

그러나 실험실의 개발성공이 반드시 생산공장에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발후 2년여 동안 실험실에서 완벽했던 제품은, 생산공장에서 뒤틀리고 구부러지고 변색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엔지니어링 기술을 보강해 86년 독일에 첫수출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탄탄대로를 달려 왔다. 작년 한해 동안 5천만달러 수출을 기록했으며, 84년 미국특허를 획득한 후, 영국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도 잇따라 특허를 획득했다. 실제로 제품이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외국 반도체제조회사들도 PMC102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외국 회사로부터 이 합금을 리드프레임 이외의 용도로 활용해보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김교수는 밝혔다.

PMC102가 '운좋게' 빨리 빛을 보게된 이유는, 신소재 개발 이후 보통 5~10년씩 걸리는 실용화 기간을 2년으로 단축시킨 것이 결정적. 그만큼 리드프레임 소재가 현 산업발전단계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PMC102합금은 시대를 잘만난 것.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애초부터 개발목표가 매우 시의적절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설비가 못따라간다.

PMC102는 각광을 받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초저온강(CAM-1)과 초강력강(W-250)은 아직도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초저온 합금은 PMC102와는 달리 국책연구과제로 개발된 것으로 87년에 국내 특허, 89년에 미국특허를 획득했다. 일본에는 아직 특허출원 중. 초저온강은 저온에도 안정하며 충격에 강한 소재로 LNG탱크의 몸체 재료로 활용하면 효과적이다. 최근 CAM-1에 싱가포르국철(National Steel)에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 기업의 기술수준으로도 생산기술을 확보할 수는 있으나 시장성 등을 고려해 아직까지 설비투자를 안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포항제철 산하 산업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초저온강을 이용해 자동차 차체의 강판을 제작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가 성공을 거둔다면 같은 두께의 강판으로 4배 정도의 강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김영길교수는 이 연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수요는 '무한정'이기 때문이다.

김영길 교수의 세번째 작품은 텅스텐을 이용한 초강력강 W-250. 고강도와 더불어 충격에 잘 깨지지 않는, 미국 인코사가 개발한 마레이징강과 비교되는 신소재다. 사용용도는 헬리콥터의 랜딩기어나 항공기 제트기 등의 샤프트 등. W-250은 미육군 재료연구소에서 행한 마레이징강과의 비교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고 김교수는 전하다. 특히 마레이징강은 값이 비싼 코발트와 몰리브덴을 원료로 하지만, W-250은 이 대신에 텅스텐을 사용하기 때문에 원료비가 반밖에 들지 않는다. 더구나 텅스텐은 국내에서 많이 생산되는 천연자원이기 때문에 더욱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W-250은 아직은 실험실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교수에게 연구비를 지원한 풍산에서는 이 신금속을 제조하는데 필수적인 진공아크용해와 진공유도용해 장치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국내 다른 기업에서도 이 두 설비를 동시에 갖춘 곳은 없다. 기업측이 설비투자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신금속이 상품화됐을 때의 시장성 때문. 아무래도 우주 항공 등 특수분야에 쓰임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PMC102로 '첨단기술 수출1호'를 기록한 김영길 박사는 그 이후 연속해서 신금속을 내놓았으나 국내 산업여건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 고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김교수는 "고전이 아니라 이것이 정상"이라며 "새로운 금속이 탄생해 성능을 인정받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기존제품을 대체하는데는 10년 이상씩 걸린다"고 덧붙였다. 김교수 말대로라면 CAM-1이나 W-250은 정상이며 PMC-102는 극히 예외적인 '행운아'인 셈이다.
 

첨단기술 수출 1호로 기록된 리드프레임


실험실 챔피언

89년 KM1557이라는 '세계 최강합금'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가 '과장이다'는 일부의 이의제기에 마음을 크게 상했던 최주박사(과학기술연구원 금속부장)의 경우를 보면, 연구개발성과와 실제활용이 거리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KM1557은 강하고 녹슬지 않는 합금이다. 금속은 강하면 내식성이 떨어지게 마련. 그러나 KM1557은 강하면서도 내식성이 뛰어나다. 대부분의 신금속이 그러하듯이 KM1557도 원래 금속이 가졌던 불문율을 깨뜨리고 탄생했다. 개발 당시 5㎏의 추를 매단 크립(creep)실험에서 3백시간을 버텨, 세계 최강이라고 알려진 일본 히다치사의 합금을(2백시간) 능가했다. 물론 일정 수준의 내식성을 유지하면서 얻은 데이터다.

그러나 이는 실험실 수준의 데이터일 뿐이다. 이 합금이 연구자의 손을 떠나 기계의 재료로, 선박 항공기의 가스터빈 재료로 사용되려면 10년 이상씩 걸리는 것이 상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KM1557이 히타치사 제품(아직 실용화 되지 않았음)을 제치고 획득한 것은 '실험실 챔피언 벨트'일 따름이다.

현재 최주박사는 과학기술처의 스타프로젝트 예산을 추가로 배정받아(2억원) KM1557의 성능 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89년 실험치가 3백시간이었는데 이를 1천시간으로 늘리고 있지요. 내식성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강도를 크게 늘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의외로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롤드 알로이사에서 이 합금에 관심을 갖고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KM1557은 89년에 미국 물질특허를 획득했으며 90년에는 한국 영국 등에서 특허를 얻었다.

가능성과 현실의 차이

신약이나 농약에 관련된 신물질개발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황무지나 다름없다. 그런데 80년대 말 들어 황무지를 개척하고자 나선 과학자들이 있다. 88년 강력 살충제 KH502를 개발한 황기준박사(한국화학연구소)와 89년 항생제 KR10664를 개발한 김완주박사(한국화학연구소) 등이 이들이다.

KH502는 살충력은 강하고 독성이 적은 새로운 농약. 특히 동남아에서 번식하는 배추좀나방의 살충효과가 커 상품화될 경우 많은 돈을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됐다. 개발 당시에는 4,5년이 지나면 물질 특허도 획득하고 제품이 상품화돼 소비자의 손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으나 현재 시점에서 좀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최근 KH502는 일본 농약회사에서 필드테스트 결과, 약효는 좋으나 스펙트럼이 좁아 상품화하기에 경제성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황기준 박사는 "원래 계획을 수정해서 안전성 및 독성 테스트는 화학연구소에서 맡고 상품화는 국내 기업체에 맡겨볼 작정이다"고 밝혔다.

'최초의 신약'을 개발했다해서 화제를 모았던 김완주 박사의 경우도 아직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KR10664는 방광염 부스럼 자궁내막염 등에 잘듣는 '제2세대 항생제'다. KR10664를 개발했을 당시 "독성실험 특허보호 대사연구 약효연구 등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주변에서는 마치 모든 것이 끝나 제품으로 나와있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매우 당황했다"는 김 박사는 "KR10664는 현재 독일 훽스트사에서 임상실험 중"이라고 밝혔다. 결국 KR10664가 상품으로서 제구실을 하려면 앞으로 몇단계는 더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이 제품이 상품으로 나오면 연간 3,4천억원의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단계에서 시장규모를 논의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신약이나 농화학 계통의 신물질 개발 발표는 조금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연구 결과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당사자의 지적대로 산적돼 있는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특허를 출원만 한 상황에서 '개발 발표'를 하는 것은 불신풍조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 물론 신물질 개발 경험이 전무한 우리나라에서 상품화 가능성이 있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기업체나 정부의 연구투자를 유도한다는 측면은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이 번번해지면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지적이다.
 

5공 최대의 과학기술계 업적으로 손꼽히는 TDX10


통신기술 자립 기반을 마련

국산 전전자(全電子)교환기 TDX개발사업은 '5공 최대의 과학기술계 업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를 축으로 삼성전자 금성정보통신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최근 부도로 제일화재에 인수) 네개업체가 공동으로 참가한 TDX개발사업은 동원된 연구개발인원, 투입된 연구개발비, 시장규모 등 어느모로 보아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거대프로젝트다.

TDX개발사업의 첫성과가 나온 것은 지난 86년 3월. TDX-1(1만회선 규모)이 경기도 가평 등 네개 농촌전화국에서 개통됐다. 그후 이보다 10배 규모인 TDX10(10만회선 규모)의 상용실험을 성공리에 마친 현재까지(오는 10월 정식 개통) 총1천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쏟아부었다.

'홀로서기 10년만에 통신기술 자립'이라는 매스컴의 호평답게 TDX개발사업은 우리나라 전자통신사업에 굵은 획을 그었다. 올해만도 국내 교환기 시장은 4천억원에 이른다. 이를 외국기종에 전적으로 의존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자명한 일이다.

TDX-10은 올 초에 시행된 서대전 전화국에서의 성능시험 결과, 시간당 통화도수(BHCA)가 외국 기종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TDX-1 개발당시만 해도 10개국 정도로알려진 '정보통신 1부리그' 진입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1부리그팀'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TDX개발과 관련해 삐걱거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ETRI를 중심으로 한 네 업체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바로 그것. 문제는 TDX-10이 개발완료된 시점에서 수출시장을 개척하는데, 불협화음이 현실화된다는데 있다. 예를 들면 국내 업체간의 출혈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수출시에 '1사 1개국 주의'가 원칙인데, 소련 등 덩치 큰 수출대상국이 등장하면서 원칙고수가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TDX수출은 가전제품과는 달리 단순한 제품수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통신 관련 기술을 제공하는 '기술수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우리가 10년 가까이 1천억원의 돈을 들여 개발한 '기술덩어리'가 아무런 보호대책 없이 국제시장에 던져진다면 '10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라는 얘기다. 네개사가 전전자 교환기 기술이 전무하다시피한 동구권 국가와 동남아시아 국가에 기술수출 경쟁을 하다보면 모든 기술이 쉽사리 노출된다는 우려다.

최근에는 소련 중국 베트남 등 공산권 국가와의 TDX 수출상담이 대(對)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의 제재로 지연되고 있다. 애써 얻은 우리의 기술개발성과가 제대로 빛을 보려면 업체간의 과당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교통정리와 더불어 기술보호대책, 정책적인 수출 지원책 등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초강력 살충제 KH 502를 개발한 바 있는 황기준 박사


초전도 열풍에 휩싸여

87년 과학계는 '초전도로 시작해서 초전도로 끝났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초전도 열풍이 불었다. 그 덕으로 전기저항이 0이 되는 온도가 점점 높아져 액체질소온도인 77K를 넘어 1백25K까지 높아졌다. 저항이 없어지는 온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적은 비용으로 초전도현상을 일으켜 전기저장장치 자기부상열차 핵자기공명촬영장치(NMR-CT) 슈퍼컴퓨터 등에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새로운 고온초전도체를 개발하는데 있어 국내 과학자들은 세계수준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87년 4월 서울대 김정구교수팀을 필두로 부산대 포항공대 전자통신연구소 표준연구소 등에서 잇따라 연구개발 성과를 내놓았다. 이들 연구성과는 대부분 세계에서 두, 세번째라는 수식어를 동반했다. 그후 열풍이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89년에는 8개 정부출연연구소와 10여개 대학팀, 산업과학기술연구소 등이 공동연구를 수행해 임계온도가 1백10K수준인 물질을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수치는 세계수준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초전도체가 바로 응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험실에서 초전도현상을 보였던 고온초전도체는 깨지기 쉬운 세라믹. 이를 얇은 판 등으로 가공해서 실제제품에 활용해야 하는데, 이 기술은 미국 일본 등과 비교, 상당한 수준차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90년부터 국책과제로 채택된 '고온초전도기술개발'도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 표준연구소 박종철 박사(양자 연구부장)은 "고온초전도체는 물질 자체가 4,5종의 원소로 이루어진 산화물이므로 화학적 안정성 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종전의 금속초전도체와는 달리 실용화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고 예상하면서 "올해 결성된 '고온초전도기술개발사업단'을 중심으로 초전도체 실용화를 위한 핵심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산업체의 변화를 감지해야

우리가 최초로 개발한 기술은 아니지만 산업화에 성공해 밝은 미래를 제시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인조다이아몬드, 즉 공업용다이아몬드다. '보석의 왕' 다이아몬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로 각종 절삭공구에 널리 사용된다. 하지만 천연 다이아몬드는 값이 너무 비싸 인공적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8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은광용 박사(경질 재료 연구실장)는 (주)일진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초고압(5만기압) 아래서 다이아몬드를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는 미국 일본 영국에 이어 네번째로 평가되고 있다. 12억원의 개발비가 투입된 이 연구는 4백 미크론 크기의 다이아몬드분말을 만드는데 성공, 작년부터 일진측에서 생산을 시작했다. 현재 생산되는 제품은 1캐럿 당 3,4달러로 외국제품과 비교해 경제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올해 국내 공업용다이아몬드 시장은 약 4백억원으로 예상되는데, 일진에서는 이 양의 25%를 공급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국내 수요를 다 채울예정으로 생산설비를 확충하고 있다.

공업용다이아몬드 제조기술은 1970년대 말에 특허권이 소멸된 것으로 다른 신물질 개발과는 달리 생산기술에 가깝다. 구체적으로는 정밀금형을 제작하는 것과 초고압운영기술, 그리고 흑연순도를 높이는 기술이다. 특수금형에 99.9%~99.99%의 흑연을 철 코발트 니켈 등의 촉매금속과 함께 넣어 1천5백℃에서 5만기압으로 압축해 인공다이아몬드를 합성한다.

은박사는 "공업용다이아몬드 제조기술이 짧은 시간안에 제품생산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기업측의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라며 "연구개발이 완벽하게 마무리되기도 전에 일진에서는 산업화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개발중에 독일의 클레크너사에서는 초고압장치와 다이아몬드 합성기술을 팔겠다고 나섰으나 이를 냉정하게 평가한 후 거절했고, 3차년도 연구(88년)가 시작되기도 전에 연구결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생산설비를 구매했다는 것.

공업용다이아몬드를 생산하기 까지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GE사의 방해공작이 지금도 치열하다. 일진에서 생산설비를 구매하면서 자문을 구했던 중국인(84년까지 GE사 근무)의 약점을 잡아 일진측을 '영업비밀침해'로 고소해 놓은 상태. 또한 정부 차원에서 상공부를 통해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 은박사가 개발한 공업용다이아몬드 제조기술이 위협적임을 반증해주는 예다.

현대를 과학기술사회라고 한다. 그만큼 과학기술자의 역할이 중요한 때다. 저임금을 바탕으로 단순 조립 기술에 의존했던 우리나라도 이제는 고급기술인력에 의한 고부가가치 상품을 개발해 국제경쟁에 나서야 할 때다.

세계적인 대발명이라 해서 모두 산업화되는 것은 아니다. 실험실 수준과 산업화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엔지니어링기술이 취약해 연구자의 대발명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것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사전조사를 철저히 한 연구자가 우리의 산업단계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목표를 설정하고 산업화의 의지가 강한 기업을 찾았다면, 그 기술이 비록 세계 최초가 아닐지라도 가치를 더욱 빛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공계 연구자는 교수든 연구원이든 항상 산업현장의 변화를 눈을 치켜뜨고 지켜봐야 한다"는 이면우교수(서울대 산업공학과)의 말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199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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