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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김정호의 선물 대동여지도

최신의 일·독(日獨)지도제작술을 무색케 한

「군용비도」를 제작한 일본 육군의 지도제작팀은 그보다 40년 전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를 보고 세번 놀라게 된다.

1898년. 대한제국 광무 2년, 일본 명치(明治) 31년이다. 일본 육군은 한국 땅에서 극비리에 지도제작에 착수하고 있었다.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의 요원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훈련된 측량기술자들 50~60명이었다. 그들은 20반으로 편성돼 있었는데 현지의 비밀고용원 2백~3백명을 동원, 1년간에 걸쳐 거의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외업전문원(外業專門員)이라는 이름의 기술자들은 대부분이 일본에서 교육받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에서 수기소(修技所)라는 기술기관을 졸업했다.
 

대동여지도는 20cm×30cm 크기로 접은 22첩짜리 목판본 지도다. 사진은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으로 보물 850호


역사자료가 돼 버린 군용비도

광무 2년. 한국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라 개칭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는 등 국내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한지 1년째 된 해였다. 국가는 독립제국으로서의 새 체제를 갖추고, 국민은 독립협회를 창립, 민족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민권의 확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 육군은 한국 땅에서 몰래 한국의 국토를 측량, 정밀한 지도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명분은 그럴 듯 했다. 경부선과 경의선을 비롯한 호남·경원 철도의 부설권을 얻었으니, 그 기초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조사는 철도부설 예정선의 양쪽 50㎞, 즉 1백㎞의 너비로 한반도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를 철저히 측량하는 작업이었다.

일본 육군의 육지측량부는 그보다 10여년 전에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측량기술 장교들의 주도로 일본 지도제작사업을 수행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최신 지도제작기법에 따른 정밀지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들의 최신기법을 다 적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기간이 짧았을 뿐더러 많은 제약이 따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고(考古) 조사연구가인 미쓰오카(光岡雅彥)에 따르면, 육지측량부의 요원들은 3각측량과 조감 지형묘사를 함께 실시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기술적으로 보면, 측도(測圖)는 분명히 목측(目測)으로 했다. 외업원(外業員)은 계곡의 입구에 있는 표고 2백~3백m의 구봉(丘峯)에 올라가 조감하면서 지형을 묘사했다. 입구부나 주요 도로의 위치관계는 비교적 정확했지만, 골짜기의 구석진 곳은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았다.

또 정식의 수준측량(水準測量)이 아니었고 약식(略式)의 표준점을 설정, 그것과의 비정(比定)으로 각 점(点)의 수치를 계산해내는 방식을 활용, 표고(標高)를 정했다. 그것은 간단한 사각의(斜角義)와 수평목측거리(水平目測距離)에 의한 산출에 불과했지만, 한 도면에 20점 전후의 표고가 표시된 상당히 면밀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육지측량부는 무려 3백장에 달하는 한국지도를 만들어냈다. 5만분의 1 지도였다.

'군용비도'(軍用秘圖)에 관해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지도는 지금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지도실에 보관돼 있다. 원도(原圖)와 원판은 이미 없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1911년에 아연판(?)으로 인쇄됐던 3백장이다. 물론 원도의 제작연대는 지워버렸다. 그런데 딱 한장에 그것이 남아 있다. 1898년, 일본 연호로 명치(明治) 31년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몇년 전에 이 지도를 일본의 한 출판사가 책으로 만들어 펴냈다. 확실히 이 지도는 조선시대 말의 우리나라 지명(地名)과 유적 도로 항구 등이 나타난 역사적 학술자료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당시의 최신 군사지도가 1백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 역사자료가 돼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지도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는 것같아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지도표^이것은 지도의 범례인데 그때까지 글자로 나타냈던 행정·군사지점들을 기호로 도식화하고 있다.


1백년 동안 할 일을…

'군용비도'를 제작한 일본 육군의 육지측량부는 얼마 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16만분의 1 한국지도가 40년 전에 이미 출판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도의 정확함과 정밀함에 또 한번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김정호(金正浩)라는 한 개인이 만들어낸 지도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물론 대동여지도의 존재를 미리 알았다고 해서 일본 육군이 한국의 지형도를 만들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참고했더라면 지형 측량작업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고 지형도 작성도 간단히 이뤄졌을 것이다. 육군 육지측량부가 최신 기술을 다 동원해 제작한 지도가 김정호 혼자 힘으로 만든 대동여지도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5만분의 1이란 정밀성을 갖지 않았더라면 또 등고선을 측정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육군의 극비작업은 정말로 불필요한 출혈이었을지도 모른다.

50~60명의 잘 훈련된 전문인력이 2백~3백명의 보조원을 동원해 1년이나 걸린 작업을 단 한사람의 힘으로 해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보면 1백년도 더 걸려야 하는 작업량인 것이다.

이런 일을 혼자 해낸 김정호는 확실히 훌륭한 인물이었다. 초인간적인 능력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어떤 지도인가. 그것은 20㎝x30㎝ 크기로 접은 22첩(帖)짜리 목판본 조선지도다. 그 안쪽은 '가로 80리, 세로 1백20리의 지역을 포함한다. 그래서 그 전체의 크기는 길이가 7m이고 너비가 3m다. 축척은 약 16만 대 1이다.

한반도를 동서로 끊어 22장의 긴 지도를 만든 다음 책으로 접어 놓은 한국전도(全圖)가 대동여지도다. 목판으로 조선종이에 인쇄 한 뒤 은은하게 채색을 하고 매첩마다 표지를 붙여 크게 한질로 만든 지도책이다.

책의 첫머리에 지도유설(地圖類說)이 있다. 간결하지만 이 지도책의 편찬목적과 지도작성의 원리를 서술한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김정호는 그와 지리와 지도에 대한 이론을 지리학 고문헌(古文獻)을 인용하면서 차근차근 전개해 나갔다. 그는 먼저 중국의 지도와 지지(地誌)의 기원을 언급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했다. 그리고 정치 경제 국방 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지도 편찬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는 또 지도제작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리를 중국의 지리학자 배수(裵秀, A.D. 224~271년)의 6체(六體)를 인용해 설명했다. 특히 지형이 정확히 측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지도제작의 원리로 내세운 여섯가지 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분율(分率)을 잘 정해야 한다. 분율이란 지형의 넓고 둥근 도수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둘째 준망(準望)에도 유의해야 한다. 준망이란 이곳과 저곳의 형체(지형)을 바로잡는 것이다. 셋째 거리의 이수(里數)를 정하는 도리(道里)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리고 넷째 고하(高下) 즉 지형의 높낮이 측정도 잘 해야 한다. 다섯째 방사(方邪) 즉 모나고 비뚤어진 것의 측정도 정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여섯째 우직(迂直)도 강조했다. 우직이란 곡선의 지형과 곧은 지형을 따로 측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고하 방사 우직 세가지는 모두 그 지형에 맞춰 도형(圖形)을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평탄하고 험준한 것을 비교하고 멀고 가까운 것을 살펴서 그 형세를 모두 나타낼 수 있도록 측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대동여지도. 한국전도가 거의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방격도가 그려져 있어

김정호는 또 송(宋)나라의 지리서인 '한여지도'(漢輿地圖) '방여기요'(方輿紀要) 등에 나타난 지리이론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국토의 크기와 그 위치, 산천과 자연의 형상, 호구의 수 등이 지도에 제대로 나타나 있어야 하고, 정확한 방위와 거리는 지도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또 나라를 지키고 바르게 다스리려면 지리(地利)와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자연자원과 주민의 생활풍속 교통 등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지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국토의 크기를 매우 정확하게 나타냈다. 한반도 해안선의 길이, 동북쪽 끝에서 동남쪽 끝 및 서남쪽 끝까지의 거리, 서북쪽 끝에서 서남쪽 끝까지의 거리, 국경선의 길이 등 실측치와 거의 비슷하다.

김정호의 지도제작이론은 중국의 역대 지리학 문헌에 나타난 이론을 완전히 소화, 자기 식대로 전개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국인의 지도제작 이론과 수법이 펼쳐지고 있다. 산맥과 하천의 묘사에 관한 부분에서 한국인의 독특한 지형묘사법을 계승했다고 말한 제작자 자신의 견해가 좋은 예다.

실제로 그가 그린 산맥은 한국의 풍수가(風水家)들이 그린 지형도인 묘도(墓圖)의 독특한 묘사법과 매우 비슷하다.

대동여지도와 한국의 모든 다른 옛지도의 뚜렷한 차이점은 방격도(方格圖)에 따른 제작법에 있다. 지도를 펴면 대동여지도란 제자와 함께 제작연대와 제작자의 호가 인쇄돼 있다. 이어서 방격도 즉 10리 방안이 그려진 장이 나온다. 이 방안지는 가로 8간, 세로 12간으로 돼 있으므로 실제의 거리로는 가로 80리, 세로 1백20리를 그린 셈이다. 그 대각선은 14리라고 명기돼 있다.

조선시대의 10리는 4.5㎞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도에 그려진 한 방격지의 크기가 포괄하는 지역은 36㎞x54㎞가 된다. 여기서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10리가 4.5㎞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4㎞가 아니었다. 4㎞로 환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제의 잔재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 이후 1리(里)를 4㎞로 환산해 사용했다. 그들이 한국을 식민지 통치하면서 10리를 4㎞로 쓰게 하면서 생긴 값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문헌에 등장하는 거리를 미터단위로 계산할 때는 10리=4.5㎞로 환산해야 한다.

대동여지도의 지도표(地圖標)는 특히 두드러진다. 이것은 지도의 범례(凡例)인대 그때까지 글자로 나타냈던 행정적 군사적 지점과 시설요소들을 기호로 도식화(圖式化)했다. 이것은 지도제작의 커다란 발전으로 평가된다. 김정호는 지도의 중요한 요소들인 산맥 하천 도로 해로와 더불어 14개항의 지도표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지도를 전통적 조선지도의 차원에서 한단계 올려 놓았다.

대동여지도 이전의 조선지도들은 행정·군사상의 필요성 때문에 제작됐다. 따라서 주민지점(住民地点)의 도식이 기재량의 50~70%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대동여지도에는 지형요소의 도식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하천과 도로 등의 기호가 10% 이상의 비율을 점하고 있다. 이러한 도면상 기재량의 발전은 대동여지도가 갖는 커다란 특징이다.

정확성이 돋보여

이 지도를 보면 금방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묘사된 해안선과 지형의 정확성이다 산은 산맥의 뻗음과 산들의 집결 그리고 독립된 산으로 구분, 매우 개성이 강한 새로운 지도제작기법을 활용하고 있음을 금세 느끼게 한다.

산맥의 묘사법에서도 그는 한국의 전통적 옛 지도의 두드러진 특징을 되살리고 있다. 또 명산(名山)과 지산(支山)을 산줄기의 큰 마디로 그려냈다. 이런 방법으로 특별히 높은 산, 나란히 놓인 산, 연달아 맥을 이룬 산, 서로 겹친 산 등 2천8백개 이상의 산을 묘사했다. 그는 산줄기를 따라 단면으로 그린 것을 기호화하는 방법으로 산맥을 나타냈다. 도시와 마을 그리고 행정적 요소와 군사기지 등도 그 성격과 크기에 따라 기호를 달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체(字體)의 크기도 차이를 두어 잘 드러나는 지도표(地圖標)를 만들었다. 이런 기발한 지도제작기법의 개발이 대동여지도에 1만2천이나 되는 지명과 수많은 지리적 요소들을 일목요연하고 산뜻하게 나타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여기서 그가 도로의 거리를 기호화한 수법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김정호는 그의 지도에 10리마다 눈금을 찍어 놓는 방법으로 도로의 거리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그 거리를 평면상의 길이가 아닌, 지형에 따른 실제 노정(路程)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래서 평야인 경우에는 평균 2.5㎝가 10리를 나타내고 있지만, 산령(山嶺) 사이에서는 1㎝가 채 안되는 곳에 10리의 눈금이 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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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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