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시작된 '퍼지열풍'은 지난해 우리나라에도 상륙해 세탁기에 퍼지이론을 적용했느냐를 놓고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는데…
요즘 여러 방송매체를 통해 세탁기 등 가전제품 광고에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좀 더 주의깊은 사람이라면 '퍼지'(fuzzy)라는 용어도 들었을 것이다. 1965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소재)의 교수인 자데(Zadeh)에 의해 처음 발표된 이래 퍼지이론은 수학 전기 전자 정보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퍼지는 인간의 생각과정에 내재된 모호성(vagueness)과 부정확함(imprecision)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인간이 무심코 사용하는 '아름다운', '키 큰'과 같은 주관적인 느낌을 수학적 표현을 통해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고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인간과 정확한 명령어(instruction,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명령어)만을 이해할 수 있는 기존 컴퓨터 사이의 언어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두뇌는 애매모호한 환경에서 학습(learning)과 추론(reasoning)이 가능하므로 부정확하거나 '좋다' '크다'와 같은 정성적인(qualitative) 자료에 근거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데 반해 기존의 컴퓨터는 수치적인 계산능력은 있지만 부정확하고 정성적인 자료를 가지고 원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하다.
합리적 판단을 흉내 내고
예를 들어 일반 컴퓨터에게 남자의 경우, 키 1백80㎝ 이상은 크고 그 이하는 작다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었을 경우 그 컴퓨터에게 '남자의 키 1백79㎝가 큰가' 라고 질문했을때 '작다'라고 답한다. 반면 사람은 '대략 1백75㎝에서 1백85㎝ 정도까지는 크다'라는 지식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므로 1백79㎝ 정도면 '크다'고 대답한다.
퍼지 이론은 이러한 인간의 합리적 판단 과정을 흉내내고 있다. 퍼지 이론이 최근에 들어와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퍼지제어와 퍼지 컴퓨터가 실용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중에는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키가 큰 사람들의 모임' 또는 '1보다 훨씬 큰 수들의 모임' 등이다. 이러한 대상들은 기존의 개념으로는 집합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데교수는 위와같이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대상들을 수학적으로 다루기 위해 '퍼지집합'의 개념을 도입했다. 퍼지집합의 개념은 각 대상이 어떤 모임에 '속한다, 속하지 않는다'라는 이원론적 논리 대신 각 대상을 그 모임에 '속하는 정도'(grade of membership)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X= {1, 5, 8, 10, 100, 500}일때 A={집합 X에서 5 보다 훨씬 큰 수들의 모임}을 일반적인 집합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μ}_{A}$(1)=0, ${μ}_{A}$(5)=0, ${μ}_{A}$(8)=0.05, ${μ}_{A}$(10)=0.1, ${μ}_{A}$(100)=0.95, ${μ}_{A}$(500)=1로 정의되는 소속함수(membership function)로 집합 X의 각 원소들이 퍼지 집합 A에 속하는 정도를 나타냄으로써 이 모임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퍼지 집합 A의 표현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표현법이 대표적으로 쓰인다.
A={(${μ}_{A}$(x),x) : xεX}
위의 표현법으로 집합 X에서 '5 보다 훨씬 큰 수들의 모임'인 A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A={(0,1), (0,5), (0.05,8), (0.1,10), (0.95,100), (1,500)}
이와 같은 퍼지집합 개념을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를 제작하는데 도입함으로써 인간의 기억이나 추론 등의 기능을 모방하려는 시도로써 만들어진 것이 퍼지컴퓨터라 할 수 있다. 퍼지컴퓨터는 애매한 언어 정보를 기억하는 퍼지 메모리와 그 정보를 이용하여 퍼지 추론을 실행하는 퍼지 추론엔진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요에 따라 퍼지 정보를 비(非)퍼지 정보로 바꾸어주는 디퍼지파이어(defuzzifier)가 부가된다.
인간-기계 의사교환
퍼지 컴퓨터는 기존의 디지털 컴퓨터와는 달리 0과 1 사이의 아날로그 신호를 취급하며 구조도 폰노이만의 축적 프로그램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병렬 구조의 퍼지 전용 하드웨어를 사용하고 있다. 위의 (표)는 기존의 디지털 컴퓨터와 퍼지 컴퓨터를 비교하고 있는데 두개의 컴퓨터는 취급하는 정보, 데이터의 구조, 아키텍처(컴퓨터·구조), 동작, 성질 등에서 서로 다르다.
그렇다고 현재의 디지털 컴퓨터가 불필요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인간의 두뇌에서 좌뇌가 이성을 통제하고 우뇌가 감성을 통제, 서로 조화롭게 결합하여 균형있는 판단을 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퍼지 컴퓨터는 인간과 기계사이의 의사교환, 즉 MMI(Man Machine Interface)에서 더 큰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퍼지 컴퓨터는 대부분의 경우 규칙형 모델을 세운다. 계산 과정은 언어에 대응하는 소속함수를 사용하여 수행하며, 현실과의 모순(mismatching)은 소속함수를 조정함으로써 행하고 언어에 의한 모델은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퍼지 추론 결과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이 제일 큰 특징이라 하겠다. 실제로 퍼지 이론은 가장 적합한 답을 구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계산하기 보다는 근사적인(approximate) 계산으로 비슷한 답을 신속히 구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 퍼지 컴퓨터는 병렬 처리개념을 이용하여 초당 1천만 퍼지규칙을 처리할 수 있다. 즉 1천만 FIPS(Fuzzy Inference Processing Per Second)의 고속 계산이 가능하다.
흑백논리는 벗어나
퍼지 이론을 이용한 주요한 응용 분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패턴 인식(pattern recognition)은 퍼지 집합론의 가장 적절한 응용 분야 중의 하나로써 인공 지능, 컴퓨터그래픽스 등 여러 연구 분야에서 사용될 수 있다. 패턴 인식은 주어진 데이터로부터 어떤 구조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가장 물리적인 탐색은 인간의 눈에 의한 방법이다. 인간에 의한 탐색 방법의 가장 커다란 장점 중의 하나는 주어진 패턴을 흑백 논리식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퍼지 집합론이 패턴인식에 적용된다.
두번째로 퍼지이론을 이용한 의사(decision)결정 문제는 여러 응용 분야에서 사용되어 진다. 전통적으로 의사결정이론은 몇개의 대안(alternative)과 상태공간(state space), 각 결정과 상태를 연결 할당하는 관계(relation)와 효용성에 따라 결과를 정렬시킬 수 있는 유용 함수(utility function)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애매한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 모델은 벨만과 자데에 의해 제안되었다. 애매한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은 퍼지제한조건과 퍼지목적함수의 교집합으로 볼 수 있다.
전문가 시스템은 전문가의 지식을 모델링하여 비전문가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 한다. 전문가 시스템의 지식 획득, 지식 표현, 지식 베이스, 추론 기관 등의 분야에도 퍼지 이론을 이용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활발
자데교수가 퍼지집합을 제안한 이래 1974년 영국의 맴다니가 스팀엔진(steam engine)에 퍼지제어를 연구한 것이 기초가 되어 1980년대에 들어 상용화가 실현되었다. 최근에 퍼지추론 하드웨어의 개발로 가전분야에서 퍼지이론의 상품화는 급속히 확대되어 응용 분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퍼지컴퓨터는 최근에 개발이 시작되는 단계에 있으므로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최근들어 국내에서는 퍼지 이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나 퍼지 이론을 하드웨어로 구체화한 제품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지난 1월에 국내 처음으로 퍼지시스템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퍼지를 이용한 제품이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도카이, 야마카와 등이 퍼지칩과 퍼지컴퓨터를 제작했다. 일본에서는 퍼지컴퓨터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통산성 산하에 국제 퍼지 공학연구소(LIFE)가 1989년에 설립되었다. 미국도 뒤늦게 퍼지 이론의 중요성을 깨닫고 NASA에서 우주왕복선 랑데부에 퍼지 이론을 도입하는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퍼지 컴퓨터는 수식으로 모델링하여 기술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시스템의 제어에 적합하며 기존 컴퓨터의 MMI부분에 사용되면 인간이 보다 사용하기 쉬운 컴퓨터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또 기존의 컴퓨터로는 불가능했던 애매한 정보 처리의 문제가 퍼지컴퓨터를 통해 해결될 수 있게 될 것이다.
퍼지 컴퓨터가 인간의 애매한 언어 정보 처리를 목표로 한다면 뉴로 컴퓨터는 1백40억개나 되는 두뇌의 신경세포들이 병렬 비선형 및 혼돈 상태에서 신호 처리하는 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이지만 인간의 정보처리방식을 모방하기 위해 퍼지컴퓨터와 뉴로 컴퓨터가 융합되는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이 당연한 추세라 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인공 지능과 관련이 되는 응용시스템 개발에서는 특히 퍼지 이론의 중요성이 증대 되리라고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