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컴퓨터교육의 시작과 함께 눈덩이처럼 커진 PC시장,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문제점들이 속출한다.
6천억원 시장을 잡아라.
지난해 '교육용 PC' 열풍으로 한껏 주가가 높아진 퍼스널컴퓨터 업계에 떨어진 지상명령이다.
88년 15만대, 89년 30만대라는 수치가 말해주듯 우리나라의 PC시장은 최근 몇년 사이 폭발적 성장세를 유지해 왔다. 그 여세는 올해에도 계속해 줄잡아 45만대, 6천억원 규모(본체 모니터 보조기억정치 포함)를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이러한 황금어장을 결코 놓칠 수 없는 기업들의 경쟁도 그만큼 치열해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올해부터 컴퓨터를 학교 정규과목에 포함시킨 정부의 정책방향과 이미 보급률이나 채산성 확보면에서 '한물 간' 가전제품군(群)을 대체할 유망품목으로 컴퓨터를 점찍은 업계의 대대적 홍보, 그리고 눈앞이 아찔할 만큼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사회 전반의 전산화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정부가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에 대비, 컴퓨터 문맹을 원칙적으로 퇴치하겠다는 목표 아래 올해부터 96년까지 연차적으로 전국의 초·중·고교에 컴퓨터 실습실을 설치, 의무교육을 시행키로한 것은 PC보급에 불을 댕기는 결과가 됐다.
즉 컴퓨터가 학교 교육과 연계되면서 기존의 여타 전자제품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수출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돌파구 마련에 부심하던 대기업들이 내수로 눈을 돌리면서 저가정책을 밀어붙이는 한편 학교 교육을 앞세워 학생과 학부모들의 구매심리를 자극하는 광고를 쏟아내자, 이 두가지가 서로 맞물리면서 엄청난 판매증가를 보이고 있다.
또 웬만한 대기업은 차치하고 소규모의 사무실에서조차 컴퓨터가 전화와 더불어 필수용품이 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동사무소에서 종합청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국가전산망 구축이 시도되자 PC 수요는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담합과 덤핑이 난무하고
그러나 이렇듯 성장만을 거듭하는 PC시장도 그 내막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소비자들이 '웃고있을 수 만은 없는' 문제점들이 속속 발견된다.
마치 한국경제의 모든 현상을 집약해 놓은 축소판과도 같은 PC시장(교육용 PC가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교육용PC 시장)엔 장사가 조금만 잘 된다 싶으면 으레 나타나는 업계의 이전투구, 소비자 부담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턱없이 높은 가격, 외형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진 기술수준, 하드웨어 생명이라 할 표준규격 시비 등 그야말로 난제가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다.
성장업종일수록 좀 더 많은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한 업체의 경쟁은 치열한 법. 그러나 경쟁이 뜨거워질수록 공정한 경쟁의 룰이나 기업윤리가 확립되지 못한 한국적 현실에서 갖가지 치부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단적인 예가 학교용 구매입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PC업계의 추태. 흔히 입찰파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발단은 한국전기통신공사(KTA)가 올해 국민학교 납품용 2만8천대에 대한 입찰공시를 하면서 발표한 구매조건에서 비롯됐다.
KTA는 학교용 PC를 납품하기 위해서는 무상 애프터서비스(AS) 기간을 3년간 보장할 것과 XT의 경우 45만원(부가세 및 모니터 포함)선의 낙찰예정가를 제시했다.
업계는 이에 대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AS 3년은 현행 1년에 비해 너무 길고 더욱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각급학교를 업체가 일방적으로 담당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AS 1년동안 원가부담이 7~8%에 이르는 점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원가상승 요인이 발생한다는 것.
이들은 또 KTA의 예정가 45만원은 현재 시판되고 있는 교육용PC의 최저가격이 부가세 포함 65만원선임을 고려할 때 '말도 안되는 값'이라며 이의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KTA 입찰자격을 갖춘 18개업체는 즉시 합동회의를 개최하고 자기네의 요구사항을 담은 공동건의서를 KTA와 문교부에 제출했다.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응찰 자체를 보이콧 하기로 결정했다. '담합'이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 였다.
이들 18개업체는 자신들의 행위가 담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담합으로 판명될 경우 향후 1~3년간 일체의 정부 관련 입찰 자격이 박탈되는 제재조치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이를 강행했다.
이들의 이같은 '겁없는 행동' 이면에는 이미 같은 수법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던 지난해 행정전산망용 입찰때의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자기네의 주장이 수용되면 좋고, 그렇지 않다면 응찰을 보이콧해 2차까지 자동유찰을 유도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행 회계법상 '동일 조건으로는 재입찰 할 수 없다'는 조항에 걸려 KTA로서도 'AS 3년, 45만원의 예정가'라는 문제항목을 변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입찰은 예정대로 시행됐다. 1차입찰은 18개업체가 강철같은(?) 단합으로 똘똘뭉쳐 자동 유찰시켰고, 한번만 더 유찰시키면 KTA의 굴복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사건 자체가 급반전된 것은 1주일 후에 있었던 2차 입찰.
그동안 KTA 조건의 부당성을 가장 앞장서서 비난하고 앞에서 언급한 업계의 '입찰 시나리오'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삼성전자와 로얄컴퓨터가 등록마감 5분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입찰 신청서를 제출
사실 공동 보이콧을 약속하고 1차까지 각본대로 움직였던 업계였지만 각사의 영업담당자들은 그래도 있을지 모를 '배반자'를 상호감시키 위해 2차 입찰 전날 호텔에 공동 투숙, 서로를 견제했다. 등록 당일에도 등록창구에 몰려가 이탈자가 생기지 않도록 아예 진을 치고 앉아 있었으나 삼성과 로얄의 전술은 이보다 한수 높았다.
삼성과 로얄은 입찰 책임자가 다른 업체의 관계자들과 함께 창구앞에서 공동보조를 취하는 척해 경쟁사들을 안심시키고 실무직원을 동원 마감시간 5분전에 전격등록한 것이다.
시중가격의 5분의 1에 낙찰
졸지에 당한 여타 업체들은 중역들이 당일 저녁 직접 삼성의 사업본부장 자택에 까지 몰려가 배신(?) 행위를 항의하기도 했으며 그래도 분을 삭이지 못해 이튿날 곧장 삼성과 로얄을 제외한 16개 업체의 공동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이들은 이 회의에서 담합을 깬 삼성과 로얄을 집중 성토하고 구체적 대응 방안으로 KTA의 입찰이 등록시간을 넘겨 원천무효라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들은 업계 담합을 주동했던 삼성과 로얄의 기업윤리를 강력히 비난하는 1차 성명서를 각 일간지 및 전문지에 일제히 광고했다. 또한 이들은 그간의 담합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삼성 영업진의 개인 이름까지 거론한 2차 성명서를 다시 광고, 양측의 감정싸움은 극에 달했다.
이들은 또 현실적 대안으로 앞으로 있을 크고 작은 입찰에서 삼성만은 반드시 '물을 먹여야'한다는데 합의, 각 사별로 돌아가면서 덤핑하는 방식으로 삼성 낙찰만은 어떻게든 막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반면 삼성은 '소나기는 피해가는 것이 상책'이라며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이 문제는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흐지부지 되고 있지만, 자라나는 2세들의 학습용 제품에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담합을 강행했고 그것도 모자라 상호비난을 일삼는 이전투구 양상까지 보였다는 점에서 업계의 반성이 꼭 뒤따라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입찰 파동과 PC가격과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업계가 '정부가 덤핑을 조장한다'며 반발한 학교용 입찰에서 국민학교 물량의 경우 낙찰가는 XT 41만6천원, AT 93만원이었으며 중·고교용은 XT 9만9천원, AT 58만 4천원 이었다.
참고로 조달청이 자체조사한 가격은 XT 51만7천원, AT 1백13만원이고 현재 시판중인 XT의 소비자가는 65만원, AT는 1백30만원이다.
이렇게 볼때 PC업체들이 스스로 정부에 납품하겠다고 써낸 가격은 일반 소비자가의 5분의 1에도 못미치는 엄청난 저가격도 있었다.
물론 기업이 경영전략상 결정하는 특판가와 소비자가를 일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덤핑이 한두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20~30대의 소규모 입찰에도 그대로 적용돼,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현재의 컴퓨터 소비자 가는 분명 더 내려가야만 하고 또 그럴 여지도 충분히 있다.
소비자는 '봉'인가
일반 소비자들 역시 PC입찰 파동을 거치면서 적어도 가격에 관한 한 각종 언론보도를 통해 충분히 알고 있는 상황이며 실제로 가격 하락에 대한 기대심리때문에 구매를 늦추고 있는 사례도 많아 업계에는 커다란 압력이 되고 있다.
업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이 비록 현재 가격이 원가에 근접하는 최저가라고 주장은 하고 있지만 수출가와는 아직도 커다란 차이가 있고 D램가격 등의 하락으로 원가인하 요인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소비자 가격은 거의 1년동안 요지부동이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수출이나 특판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모두 일반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소비자 부담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학교용 제품에서만 덤핑으로 수십억원씩의 적자를 보고 또 여타 입찰에서 그에 상당하는 액수의 적자를 기록한 PC업계로서는 이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일반소비자가는 올리면 올렸지 내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만약 소비자가격 마저 내리면 적자폭은 눈덩이처럼 커져 아무리 재벌기업 이라도 '도산'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덤핑을 최소화하는 정상적 시장질서가 하루빨리 확립되지 않는다면 일반 소비자는 언제까지나 비싼 물건을 살 수 밖에 없는 '봉'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이와관련 또 한가지 짚어야 할 것은 기업들이 엄연히 정부 인증을 받은 공식 교육용(학교용) 제품이 있는데도 기존 '비인증' 제품의 재고가 소진될 때까지 출시를 늦추고 있다는 점이다.
품질과 호환성에서 월등히 뛰어난 인증제품을 내놓지 않고 기존 제품을 '교육용'이라고 계속 선전, 광고만 믿고 물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있다. 더구나 인증제품을 시판하면서도 여타 제품까지 곁들인 광고를 버젓이 게재, 마치 전체 모델이 인증을 받은 양 소비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은 소비자 보호차원에서도 시정되어야 할 대목이다.
시장상황과 업계 경쟁이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한국적 현실이었다면 기술수준과 규격시비는 교육용PC의 또다른 암울한 단면이다.
우리나라에는 '컴퓨터산업'은 없고 단지 '조립산업'만 존재한다는 냉소적 표현이 있지만, PC 2백만대 생산의 '세계 3위국'이라는 자부심과 현재의 기술수준은 너무 현저한 차이가 있다.
교육용PC 인증을 실시한 KTA의 1차 시험결과 금성 삼성 대우 등 내노라하는 재벌기업들이 일제히 불합격, 큰 충격을 주었으며 부품 수준 역시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특히 부품의 경우 PC품질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이나 이를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이 대부분 열악한 환경속에서 생산에만 급급, 연구개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들 부품을 구입해 컴퓨터를 생산하는 세트업체들도 장기적 안목에서 이들을 지원 육성하기 보다는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다.
우리의 경쟁상대국인 대만의 경우 기술수준이 우리보다 5~6년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부품을 생산하는 전문업체가 수십개에 달해 각자 최고 품질의 제품을 세트업체에 납품하고 있기 때문이다.
KS규격과 문교부규격이 달라
PC를 둘러싼 공진청의 KS규격과 문교부(KTA실시) 인증기준이 서로 다른 점도 업계와 소비자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림과 도형처리가 많을 수 밖에 없는 교육용 PC의 속성상 업계와 문교부 및 전산망조정위원회는 비디오 모드(mode)를 그래픽의 표준으로 설정했으나 KS규격은 텍스트에뮬레이션(TEG)모드를 채택하고 있다.
교육용 PC가 본격 등장하기 이전에는 문자처리에 초점을 맞춘 TEG가 설득력을 가졌으나 지난해부터 제작된 모든 교육용 PC는 그래픽 모드로 만들어 졌다. 또 수백종에 이르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역시 이를 기초로 제작된 상황에서 호환성이 없는 규격을 국가공인기관들이 서로 고집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KS규격을 그래픽모드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아무튼 향후 2년간 지속적인 성장이 예상되는 유일한 업종인 컴퓨터산업의 내수시장은 교육용 선풍으로 이제 막 본궤도에 진입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어떻게 대응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 전도가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