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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흙과 유약을 써서 어떻게 구워냈기에 그다지도 신비한 자기가 탄생했을까?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시된 명품들을 둘러보다가 책탁도(册卓圖)라는 그림 앞에서 내 눈을 멈추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유리어항에서 고기가 놀고 있는 그림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조선시대 유리어항으로 전해지고 있는 유물은 없다. 유리어항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박물관에 전시된 유리그릇도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조선시대에는 유리그릇이 쓰이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놀랍게도 18세기 후기 조선시대 선비의 방에 유리로 만든 어항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는 그 어항이 유리임을 잘 나타내 주었다. 이 한 폭의 그림은 나의 오랜숙제 하나를 또 풀어 주었다. 조선시대에 유리그릇이 실제로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이다.

사라진 유리그릇

국내의 유리제품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어졌다. 유리구슬은 철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에 이르면서 여러 고분에서 수없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고분들에서는 유리그릇도 많이 출토되었다.

나는 유리꽃병 그림을 간접적으로도 보았다. 일본 교토(京都) 고산사(高山寺)의 가마쿠라시대(13세기경) 그림에서 의상(義湘)이 신라의 산사(山寺)에서 강설하는 장면에 그려진 담청색의 유리그릇 그림을 보고 어찌나 기뻤던지…. 또 원효(元暁)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론하는 장면에는 감색의 유리꽃병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유리그릇을 사용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증거력을 갖춘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선비방의 그림에서 커다란 유리어항을 분명히 보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어항으로 쓰일 만큼 널리 보급되었던 유리그릇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장독처럼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탓으로 지난 1세기 동안에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실학자들의 글에서도 유리그릇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많이 나온다. 그들은 금속이나 광산물, 그리고 도자기 등에 대해 말할때마다 으레 유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로 잘 알려진 이규경(李圭景)도 그의 '오주서종 박물고변'(五洲書種 博物考辨)에서 유리를 꽤 과학적으로 거론했다. 그는 안경 망원경 확대경 등을 유리로 만든다고 소개했다. 그가 말하는 '유리'(琉璃)가 지금 우리가 유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규경은 주로 렌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안경(眼鏡)이라는 항목에서 그는 아란다(阿蘭陀) 즉 오란다(Holland) 천리안경(千里眼鏡)과 서양현미경이 최고품이고 진수정(眞水晶) 자오수정(紫烏水晶)으로 만든 안경은 그만 못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오목렌즈와 볼록렌즈의 기본원리를 소개했다. 그는 이 두 종류의 렌즈를 이용, 노안경(老眼鏡) 장안경(壯眼鏡) 중로안경(中老眼鏡) 근안경(近眼鏡)을 만들 때 각각의 안경에 적합한 렌즈의 종류를 지정하기도 했다. 또 확대경을 충안경(蟲眼鏡)이라고 부르고 망원경과 현미경의 구조와 제작법을 설명했다. 이규경은 이렇게 유리로 만든 광학렌즈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면서도 유리그릇이나 유리장식품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학문으로 다루기에는 상식적인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시대 사람들도 유리를 그렇게 색다르고 신기한 대상으로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유리제품을 공예품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유리그릇 보다 사기그릇을 더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유리구슬보다는 옥이나 천연석을 선호했다. 조선의 여인들이 목걸이를 별로 하지 않은 이유도 이런 경향과 관련이 있을 성 싶다. 유리구슬 만드는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유리목걸이의 공급도 감소했다는 얘기다.

유럽의 유리기술을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일본사람들은 17세기부터 열심히 유리그릇을 개량, 18세기 이후에는 유럽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운 유리제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우리의 경우와 매우 대조적이다. 예로부터 좋은 유리를 제조해 왔던 한국이나 중국이 오히려 일본보다 처졌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도자기와 금속그릇이 높은 수준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유리그릇에 대한 기호도가 낮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서유럽에서 유리가 발달한 것도 그들의 도자기기술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리에 대한 매력이 더 강했을 것이다.

토기오리 한마리에 사로 잡혀

흙과 불이 빚어낸 그릇 중에 자기(磁器)가 있다. 청자(青磁)는 그 중에서도 걸작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그릇이 있지만, 청자처럼 깊고 은은한 멋을 풍기는 그릇은 또 없다. 토기에서 바로 이어진 예스러움 때문일까. 그 색깔 때문일까. 흙과 불의 조화로 이루어진 유리와 토기가 한데 어우러져 태어난 청자는 옛 사람들에게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동시에 그것은 혁신적인 기술개발의 결과였다.

그 청자들을 주로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1982년 11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문을 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이 그것이다. 그 2층 로비의 한쪽 벽 조금 높은 곳에 토기오리 한마리가 앉아 있다.

그 다소곳한 모습은 신라 가야의 토기에서 낯익은 것이다. 결코 좁지 않은 공간에 왜 오리모양 토기 하나만을 놓아둔 것일까. 1백36점의 전시물이 모두 빼어난 도자기들인데도 불구하고 단 하나 이 오리모양토기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 토기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나는 토기가 도자기기술의 출발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토기 한점은 마치 하얀 종이에 점 하나를 깨끗이 찍은 그림과 같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 그것은 그 공간을 꽉 채워주고 있었다. 고려자기 33점, 조선자기 51점, 그리고 중국자기 48점을 모아 놓은 그 미술관이 마치 한마리의 토기오리에서 시작이라도 되는 듯했다.

신라토기나 가야토기는 토기 제조기술에 있어서 거의 완성의 단계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릇의 모양이나 토기의 질, 그리고 표면처리기술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주고 세련된 미적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기술에서 볼 때, 토기에서 자기(磁器)로의 이행은 매우 자연스러운 발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오리모양토기^삼국시대(5~6세기), 국립경주박물관


청자유의 출현으로

자기의 바로 앞 단계가 유약을 입혀 구워내는 기술이다. 그것은 통일신라시대 초기부터 나타난다. 초록색의 이른바 녹유(綠釉)가 입혀진 토기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매우 아름다운 색깔을 내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녹청자(綠青磁)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여기서 출현한 것이 청자다. 벌써 1천년이 지난 10세기경의 일이다. 그윽한 푸른색깔을 내는 아름다운 청자를 구워 내는 기술을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한층 더 발달했다. 단계별로 말하면 토기에서 시작한 그릇을 빚어 구워내는 기술은 신라토기에 이르러 도기(陶器)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청자가 탄생하면서 마침내 자기(磁器)로의 혁신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기술적 발전은 몇가지 기본적 공정(工程)에서 이뤄진다. 도자기의 기본공정은 첫째가 흙의 채취고, 둘째는 성형(成形)이며 그 다음이 구워내는 세 단계를 거친다. 이 세가지 기본공정에서 기술적인 발전이 있을 때 도자기는 한층 더 우수한 것이 된다.

도자기의 재료가 되는 흙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장석(長石)이 분해돼 생긴, 흙(흔히 말하는 고령토)과 철분을 포함해 붉은 색을 띤 고운 진흙이다. 결국 이 흙을 어떻게 빚어내는가에 따라서도 자기의 우열이 갈린다. 그리고 알맞은 흙을 선택했는냐, 어떤 비율로 배합했느냐에 따라 구워내는 그릇의 질이 판가름난다. 토기와 도기, 그리고 청자와 백자는 먼저 이 흙부터 차이가 난다.

그 다음에는 성형이다. 성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말할 나위없이 물레의 사용이다. 실제로 물레의 사용은 도자기 제조기술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그릇의 모양을 마음대로 반듯하게 다듬어내게 했고, 도자기를 대량생산하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도공들은 특히 발로 돌리는 물레를 잘 썼다. 그것은 두 손에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손으로 돌리는 물레보다 여러모로 편리했다.

성형된 도자기는 가마에서 구워 낸다. 그 가마에도 한국인의 특색이 보인다. 등요(登窯)라는 터널식 가마가 그것이다. 등요는 우리나라 도공들이 오랫동안 써 온 훌륭한 가마다. 여기서 불을 조절하기에 따라서 가마 속의 불길은 산화염도 되고 환원염도 된다. 이 두 종류의 불의 성질이 마음대로 조절되면서 비로소 도자기에 색의 변화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유약의 기술이 더해진다. 낮은 온도에서 녹는 연유(鉛釉)에서 높은 온도에서 녹는 회유(灰釉)로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이른바 청자유(青磁釉)의 출현이다.
 

유리잔^고신라, 국립경주박물관, 국보 193호


송청자를 모방했나?

청자는 유약과 태토에 포함된 적은 양의 산화철이 환원해 생긴 푸른색의 자기다.

10세기 경 고려도공들은 오랫동안 그들이 추구하던 비취옥의 신비로운 색깔을 도자기에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흙을 빚어 옥을 구워내는 벅찬 감격을 안은 것이다.

그것은 한국기술사(技術史)의 새로운 장(章)이었고 자기(磁器) 제조기술에 새경지를 연 커다란 비약이었다. 고려청자의 제조는 그야말로 고도로 승화된 기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청자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아직 확실치 않다.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아직 꽤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청자의 고향이라고도 불리는 전라남도 일대, 특히 강진 등지에서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청자 가마터에 주목해야 한다. 그 발굴과 조사연구를 통해 해명의 결정적 실마리가 제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대는 미술사가와 기술사가, 그리고 과학자와 역사학자들이 함께 조직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고려청자는 많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흙과 불의 조화다. 하지만 그 비밀은 아직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가마의 쓰임새, 불질의 기술이 해명돼야 하고, 흙과 유약의 신비가 풀려야 한다.

고려 도공들은 기술적 바탕이 없던 상태에서 송청자(宋青磁)를 모방해 청자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일본 사람들은 끝내 흉내내지 못했던 기술이 아닌다. 고려사람들은 그 기술들을 자기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개발해냈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해 신라의 경질토기에 이르는 오랜 기술적 축적과 전통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고려청자는 그 가마의 기술전통과 그 유약과 태토의 기술전통,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선과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볼 때 오랜 전통의 산물로 보인다. 그래서 고려 청자의 기술이 통일신라 말기에 이미 태동되기 시작했다는 견해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다. 처음에는 순청자를 구워 냈다. 산기슭을 타고 비스듬히 올라가는 가마에 그릇을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열이 일정하게 오르게 했다. 그 다음에 아궁이를 막아 환원불꽃이 되게 불을 조절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그 제조법을 두 단계로 나눠 간략하게 알아보자. 먼저 고도로 정선된 태토(胎土)에, 나무나 풀을 태운 재를 주원료로 하고 장석(長石)이나 석영(石英)의 규산(硅酸) 성분을 혼합해 만든 유약을 입힌다. 곧이어 불 속에서 1천3백℃ (어떤 것은 1천2백℃내외)라는 높은 온도로 가열한다. 이때 유약과 태토의 겉이 한데 어우러져 유리같은 매끄러운면서도 그윽한 비색(翡色)이 나타나는 것이다.

고려의 순청자기술은 12세기 전반에 절정에 달했다. 장식무늬는 중국청자와는 달리 번잡스럽지 않고 간결해 소박한 듯하면서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또 그릇의 모양과 선은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 예리한 조각법으로 수놓은 무늬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워졌다. 유약을 입히는 기술 또한 아주 세련돼졌다. 엷고 고르게 발라 청자로 하여금 날렵한 자태를 간직하게 한 것이다.

실험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유약의 두께는 놀라울 정도로 일정했다. 이는 중국청자가 유약을 두껍게 발라 투박하게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순청자기술이 완성단계에 이른 12세기 중엽, 고려도공들은 도자공예에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는 신기술을 창출했다. 상감청자를 개발한 것이다.

그것은 그릇의 표면을 파고 그 속에 백토 또는 흑토를 메워서 청자의 푸른 바탕에 백색과 흑색의 무늬를 장식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개발로 고려청자는 그 아름다운 푸른색에 흑백의 선명한 도안이 화사하게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상감기술은 그때까지 금속공예나 목공예에만 쓰이던 수법이다. 실제로 그 당시 은입사(銀入糸)의 기법과 나전 및 화각의 기법은 꽤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도자기에 그러한 장식수법을 쓴 사람은 고려도공이 처음이었다. 이 기막힌 기술을 가지고 고려도공들은 시원스럽게 날아가는 학의 모습과 청초한 국화, 그리고 냇가풍경 등을 문양으로 표현했다. 화사하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한 멋을 청자에 더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도자기기술에서 또 하나의 기술혁신이었다.

자랑스럽게도 고려도공들은 세계 최상의 송자기의 제조기술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중국인이 나타내지 못한 독특한 감각을 우리 기술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발로 돌리는 물레 및 옹기가마와 자기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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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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