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형상을 기억하는 「물 저장고」

고흡수성 고분자

물을 너무나도 잘 삼키고 일단 흡수한 물은 거의 배출하지 않는 이 묘한 고분자는 위생재료 농업용 산업용으로 활용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 산업의 고도화 및 과학의 발달로 하루에도 수많은 신제품과 신소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을 재료측면에서 보면 금속, 세라믹, 그리고 플라스틱으로 대변되는 고분자재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고분자재료는 기존의 구조재료인 금속이나 세라믹과 비교해 볼 때 많은 장점을 보유하고 있다. 우선 가볍고 가공성이 우수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현대문명을 '플라스틱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금속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적 물성을 가진 고성능 고분자 재료의 개발에 매달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고성능 물성과 더불어 특수한 용도에 요구되는 독특한 기능까지 겸비한 고기능성 고분자 신소재의 개발이 활발하다.

우연히 알려져

이런 신소재들 중 고(高)흡수성 고분자는 여러모로 묘한 재료다. 흔히 이 재료는 다량의 물을 흡수 팽윤 겔(gel)화시키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또 외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아도 한번 '먹은' 물은 결코 쉽게 방출하지 않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 고기능성 고분자다.

흡수능력만 가지고 생각하면 이런 '물킬러'는 자연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곡류의 주성분인 전분, 해초류인 한천 그리고 소프트콘택트렌즈 등도 넓은 의미의 고흡수성 고분자다. 하지만 이들은 자체 무게당 10배 이하의 팽윤도를 가질 뿐이다.

그런데 팽윤도가 10배 이상 심지어는 1천배 이상 되는 물질이 있다. 다름아닌 고흡수성 고분자다. 이 물질은 실로 높은 흡수능(能)과 보수력(保水力)을 가지고 있는데 물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자신의 형태만은 원래 그대로 유지하는 참으로 알쏭달쏭한 성격의 소유자다.

'물 저장고'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고흡수성고분자는 지금부터 약 20년전 미국의 농무부연구소에서 탄생했다. 이 곳에서 미국에 남아도는 잉여농산물인 옥수수의 활용연구를 수행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원래 연구는 "옥수수의 주성분인 전분에 석유화학수지인 합성고분자를 결합시키면, 일반 플라스틱의 기계적 물성과 뛰어난 가공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아울러 합성 플라스틱의 최대 약점, 즉 자연에서 스스로 분해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됐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물속에서 실험을 하던 중 용매인 물이 완전히 한 덩어리로 굳어 반응기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조사한 연구팀은 이러한 흡수·팽윤현상은 밥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일어난다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쌀은 주성분이 전분이므로 물과 함께 끓이면, 물이 전분을 구성하고 있는 친수성(親水性) 기인 수산기(-OH)들 사이로 침투해 100% 이상 흡수 팽윤 겔화 된다.

그리고 미농무부 실험에서 이 놀라운 현상을 일으킨 주역은 전분이 아니다. 전분보다 물과의 친화력이 훨씬 큰 합성고분자가 '요술'을 부린 것이다. 후에 이 고분자가 전분과 결합돼 있었기 때문에 흡수능력이 매우 커져서 반응기가 굳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개발된 전분계 고흡수성고분자는 그후 10년간 실용화 연구를 거쳤다. 그 결실로 지금부터 10년전에 반응물의 찌꺼기에서 최초의 상품 '슈퍼 슬러퍼'가 추출됐다.

그러나 원료인 전분이 천연물이라는 점이 '슈퍼 슬러퍼'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생산지의 기후 토양에 따라 구성성분이 달라져 제품의 균일성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제조공정이 복잡해 5년도 못돼 생산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제품의 질이 균일하고, 제조공정이 간단한 석유화학 물질로부터 추출된 합성고분자가 개발돼 고흡수성고분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흡수성고분자의 구조를 살펴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골격을 이루는 소수성(疏水性, 물을 싫어하는) 사슬과 친수성(親水性, 물과 친한) 기능기로 대별되는 것이다.

두부같은 상태로

고흡수성 고분자의 흡수능력은 피(被)흡수체인 수용액의 pH와 수용액 내의 염(鹽)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쉽게 말하면 순수한 물을 더 많이 빨아 들인다. 예를 들면 체액(피 오줌 등)의 흡수능은 순수한 물의 흡수능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고흡수성고분자의 흡수능은 그 원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천연물인 변성 셀룰로스계는 1백~3백배, 전분계는 1천배 이상 그리고 합성고분자는 1백~1천배의 순수 흡수능을 갖는다.

반면 흡수속도나 보수력 등은 원료보다는 제조방법 및 제품의 형태(분말상 섬유상 필름상)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고흡수성고분자의 흡수능은 이름 그대로다. 적어도 종이 면 펄프 등과 같은 기존의 흡수재료(흡수능 50배 이하) 보다는 월등한 흡수능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종래의 흡수재료는 섬유 사이의 모세관현상에 의한 물리적 흡수이기 때문에 약간의 압력만 받아도 흡수된 물이 방출된다.

고흡수성고분자는 화학적 결합에 의한 흡수이므로 일단 흡수된 물은 압력을 받아도 거의 방출하지 않는, 높은 보수력을 갖는다.

우리는 간단히 고흡수성고분자의 높은 흡수능과 보수력을 실험해 볼 수 있다(사진 1). 황색으로 염색한 순수한 물 약 1백cc가 들어있는 비커에 고흡수성고분자 0.1g을 가한 다음, 잠시 후 비커를 거꾸로 뒤집어 놓아도 물이 쏟아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고흡수성고분자가 물을 흡수해 팽윤된 후 두부와 같은 겔(gel)상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특성 때문에 고흡수성 고분자의 용도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현재도 아기용 기저귀와 같은 위생재료로부터 농업용 토양개량제, 산업용 패킹제, 완구제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사진 1) 일단 흡수되면…^흡수전흡수후
 

사막을 녹지로

고흡수성고분자의 여러 용도중 우리가 가장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기용 기저귀와 여성용 생리용품 등과 같은 위생재료다. 사실 위생재료는 고흡수성고분자의 최대 시장이다. 현재 위생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기존의 펄프나 면 대신 고흡수성고분자를 일부 대체하거나 혼용하면 제품의 부피와 무게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최근에는 의료분야로의 응용도 활발하다. 예컨대 수술용 매트, 흡수시트, 수술용 붕대가 개발돼 있다. 또 혈액투석센터 수술실 산부인과 병원 등에서는 1회용 흡수재료를 많이 찾고 있다. 고흡수성 고분자로 만든 1회용 흡수재들은 기존의 것보다 흡수능과 보수능이 뛰어나 환부의 청결성을 높여준다. 아울러 자주 교체해야 했던 종전 제품의 번잡성을 피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농업 및 원예용으로도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토양개량제로의 전망이 밝다. 예를 들면 야채재배 나무심기 사막 및 야산 녹화 등에 기여할 것이다. 또 가정원예 작물재배 표목재배에 이르기까지 활용의 폭이 넓다. 예컨대 고흡수성고분자를 토양에 소량 첨가해 혼합한 뒤 물을 흡수시키면 많은 득을 볼 수 있다. 높은 보수력을 무기로 물의 증발과 방출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방법을 잘만 활용하면 식물의 싹트기와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

고흡수성고분자의 농업분야 연구는 국토의 대부분을 사막지대인 중동국가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막의 녹지화'(綠地化)라는 거대한 제목의 프로젝트가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사막지역은 대부분 강수량(降水量)이 적을 뿐만 아니라 기온이 매우 높기 때문에 토양 내의 수분증발이 심해 점점 더 황폐해지고 있다. 그런데 고흡수성고분자를 토양보수제로서 사용한다면 사막의 녹지화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올 때 물을 흡수, 보지(保持)하고 있다가 건조기에 물을 서서히 방출함으로써 식물에 항상 수분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2)는 농업용 토양보수제로 응용한 한 예다. 필자가 개발한 고흡수성고분자(K-sorb)를 콩을 심어놓은 모래토양에 뿌렸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K-소브의 사용량을 달리하여 콩재배를 화분실험한 결과, 고흡수성고분자의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줄기와 잎의 성장 및 수확량이 현저히 증가했다. 반면에 사용량이 지나치게 많으면 (0.5%) 성장과 수확량이 오히려 감소했다. 이런 결과는 고흡수성고분자의 토양보수제로서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고흡수성고분자의 가격이 너무 비싸고, 응용연구 기간이 길며, 토양의 종류와 기후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문제가 남는다. 이런 걸림돌 때문에 토양보수제로의 이용은 아직 초보단계에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개발 여하에 따라 농업분야는 고흡수성고분자의 최대 수요시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 2) 토양보수제의 응용 (화분실험)^필자의 연구팀의 K-소브(Sorb)를 콩에 적용한 실험이다.
 

대전환의 계기

산업용·공업용 재료로도 유망한데, 현재 고흡수성고분자는 누수방지용 실링재나 패킹재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지하에 설치된 고전압 전선케이블에 사용되는 수분방지시트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상품이다. 인기의 비결은 고전압 송출시 수분침투로 인한 전력의 손실을 방지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가 하면 폐수처리제, 석유중 수분제거제, 완구용품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고흡수성고분자로 만든 완구는 물을 흡수하면 체적이 수십배로 팽창되는 재미있는 현상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고흡수성고분자의 응용은 단순히 고흡수능과 보수능만을 염두에 두었다. 모든 관심을 '수분의 저장'에만 집중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인 통념은 80년대 초 미국 MIT 교수진에 의해 깨졌다. 고흡수성고분자의 흡수 팽윤 수축의 기본원리가 밝혀짐으로써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다량의 물을 흡수하여 팽윤된 고흡수성고분자 겔(gel)은 온도 전압(電壓) 또는 수용액의 pH 변화와 같은 외부 자극이 있으면 물을 방출한다. 이렇게 물을 내보낸 뒤 겔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형상기억 능력이 있다. 이것은 고흡성고분자 겔의 화학적 구조가 전환되는데 기인한다. 이때 발생한 화학적 에너지는 어떤 물체를 움직이는 기계적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신경조직의 자극으로부터 유발된 전압의 차에 의해 움직이는 모든 생물의 운동 메커니즘과 꼭 같다.

다음은 이들 원리를 이용해 최근 개발된 몇가지 흥미있는 응용 예다.

(사진 3)은 합성고분자로 제조된 고흡수성고분자 겔의 '발작' 광경이다.

조금 더 자세히 그 상황을 지켜보자. 약 22g의 공이 연결된 지렛대의 한쪽 끝에 고흡수성고분자 겔을 연결한 후 두개의 전극을 통해 전압을 걸어 보라. 그러면 공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전기적 자극을 받은 고분자겔의 수축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응용한 인공근육에 대한 연구개발이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액추에이터(actuator, 외부의 신호에 응답해 움직이는 물체)도 고흡수성고분자로 만들 수 있다. 만약 이 액추에이터로 로봇의 손을 만든다면, 지금까지 금속으로 제조한 것과는 달리 달걀과 같은 아주 부드러운 표면의 물체도 들어 올릴 수 있게 된다.

고흡수성고분자 겔은 전압변화에 의한 수축은 물론이고 열변화에 의해서도 동일한 수축·팽윤현상이 가역적(可逆的)으로 일어난다.

예컨대 온도가 50℃까지 올라가면 고분자겔은 수축되지만 온도를 다시 10℃로 내리면 원래의 팽윤상태로 되돌아 온다.

이런 고흡수성고분자 겔은 의약품의 전달체로도 이용될 수 있다. 환자의 몸에 열이 날 때만 약이 투여됨으로써 이상적인 약리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고흡수성고분자의 다양한 특성과 고분자 겔의 독특한 수축 팽창원리를 기계공학과 의학기술에 접합한다면, 그 쓰임새는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인공근육 인공손·발 인공안구 등과 같은 인체 손상기관의 개발도 그리 꿈만은 아니다.
 

(사진 3) 전기적 자극에 의한 고분자의 수축 현상
 

199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영하
  • 한양규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환경학·환경공학
  • 섬유·고분자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