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食)의 문제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나를 바쁘게 한다. 알고자 하는 의욕에서 이제는 알아야 하는 의무로…
고교시절 가장 흥미가 있었던 과목은 생물과 화학이었다.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기관들, 신비롭기까지한 가지가지의 기능들이 설명되어지는 생물시간은 전혀 지루함을 몰랐다. 체내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대사작용 호흡작용 효소작용들은 지금까지도 흥미있는 분야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지식은 막연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음식물의 소화는 인체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이것이 활동에너지로 이용된다는 것으로 전부였다. 지극히 피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 한 잔을 마시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우리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한번 상상해 보라. 여기에는 수많은 효소와 금속이온(ion)보효소 등이 수반될 것이다. 또한 체내 대사 과정은 신비하고 오묘하다. 지극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공장의 기계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세밀하고 계획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배우다 보면, 불현듯 조물주의 전능함이 느껴진다. 아울러 앞으로 더 밝혀내야 할 학문적인 과제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흥분과 긴장에 휩싸이게 되고 때로는 조급함을 경험하게 된다.
고교 시절에는 대입이라는 목전의 큰일 때문에 실험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씩 있었던 실험을 무척이나 소중히 여겼다. 지금도 다소 어두웠던 지하 실험실에서 열심히 화학실험에 몰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한 행복했던 시절로 다가 온다.
A와 B를 섞으면, 엄격하게 C와 D가 만들어졌다. 일련의 화학반응식을 통해 이미 예견했던 사실들이 실험을 통해 그대로 입증되곤 했다. 그때의 흥미진진함은 아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러한 정확성과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화학반응식의 매력은 나를 아마추어 화학자로 내몰았다.
나의 관심이 이 분야로 쏠리다 보니, 자연 이과(理科)를 나의 길로 정하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여자가 하기에는 어렵지 않겠느냐' 또 '여자답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말씀도 하시곤 하셨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언의 말씀이 그 당시 나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 화학과 생물에 대한 관심이…
대학이란 곳, 그 곳은 손바닥을 움켜 쥐어야 성취할 수 있었던 고등학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였다. 오히려 손바닥을 쫙 펴서 열린 자세로 임하여야 욕구가 성취되는 곳, 즉 열린 공간이었다. 바라고 있는 어떠한 일들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지는 일종의 특권지역인 셈이다. 이러한 열린 공간 속에서 내가 알고자 열망했던 식품영양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식품영양학과는 고3시절 담임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셨다. 무엇보다 화학과 생물에 관심이 있었던 게 튼튼한 배경이었다. 게다가 담임선생님께서 참고하라고 제공해 주셨던 식품영양학과에 대한 소개는 나의 흥미와 기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점차 식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일상적인 지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실들이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입증되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을 분석, 영양소와 그 기능이 확인되어 질 때의 기쁨은 나에게 이 학문에 대한 매력을 한 층 높여 주었다.
식품영양학 분야에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나를 들뜨게 했다. 내가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방대한 학문 영역을 짐작케 했다.
예컨대 효소는 그 실체가 단백질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량의 식사를 제공하는 단체급식시 좀 더 다양하고 위생적인 급식메뉴는 무엇인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어떠한 식이요법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A라는 미지의 식품은 어떤 영양소로 구성돼 있으며 성분들의 특성규명은 어떻게 하는가? 또 각각의 작용은 무엇인가? 이 모든 의문들이 나의 학문의 영역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나의 소망을 털어 놓는다. 혹시나 잘못 인식했을지도 모를 식품영양학과에 대한 생각에 수정을 바라면서, 한마디로 식품영양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궁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학문이지, 결코 영양사나 조리사를 양성하는 학문이 아니다.
특히 나의 관심은 인류의 제한된 식량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개발하는데 집중된다. 즉 인간을 위한 유용한 식량을 미생물 동물 식물내의 단백질 등으로부터 추출, 새롭게 제조하자는 것이다. 물론 지속적이고 정책적인 보조고 뒤따라야할 문제다. 아무튼 앞으로의 식량정책은 새로운 대체식품의 개발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전공과목에 정성을
대학문화는 변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나도 나의 촉각들을 그러한 변화들로부터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나만의 생활도 소중하다. 이처럼 양자(兩者)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나 나름대로의 계획과 생활의 절제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다지 치밀하거나 단단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를 미리 계획한대로 생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전공 과목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느끼는 것처럼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과 태도에 따라 그 결과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때문에 항상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그리고 그후에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나의 경우 계획표의 역할이 고교 시절보다 오히려 지금의 대학 생활에서 훨씬 크다. 일주일 동안 몇 편씩 작성해야 하는 리포트와 실습준비, 이따금 발표해야 하는 세미나의 부담은 결코 적지 않다. 그래서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우리 대학 가정대에서 운정관(도서관)까지의 발걸음을 늘 성급히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분명 이것은 계획이 없는 무방비한 상태에서는 제대로 실행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늘상 건강한 긴강과 생각의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려고 애쓴다.
여기저기 줄을 그어가며 노력을 해보아도, 연습장을 몇 장씩 넘겨가며 끄적끄적 해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회로(cycle)는 좀처럼 이해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친구들의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띈다. 빽빽이 앉은 친구들 사이에서 나도 그들의 일부라는 생각에 잠긴다. 이때는 묘한 용기와 정을 느끼게 된다. 이들 모두가 한 시대의 미래를 창조해 갈 동료들이기 때문이리라.
하나의 회로(cycle)와 반응기전(mechanism)을 마침내 이해하게 됐을 때, 손바닥에는 끈끈한 땀이 베어 있다. 그 손으로 집어들고 마신 커피 맛은… 이제 식품영학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나만의 고집이다.
순수한 학문적 욕심이 오늘 나를 살찌운다. 알고자 하는 의욕에서 이제는 알아야 하는 의무로 변해간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실생활에 활용함으로써 인류의 생존에 작으나마 어떤 보탬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갖는다.
공부를 하다가 지친 눈을 들어 내려다 본 캠퍼스에 어김없이 밤이 찾아든다. 이미 내려앉은 어둠이 다시 내일을 약속하듯이, 이러한 마음으로 나의 학문과 미래에 대한 열정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