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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만드는데 매혹 조선공학 개척에 평생을 바치다

일제는 군함의 구조와 설계를 배울 수 있는 조선과에 한국인의 입학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김재근(金在謹·68)서울대명예교수는 1920년 평남용강에서 태어나 경성대 예과 이과와동 이공학부 기계과를 졸업, 서울대교수, 미MIT연구원, 한국선급협회회장, 조선학회장을 지냈다. 현재 학술원부회장이며 저서로는 '선박기본설계' '기계제도' '조선왕조군선연구'등이 있다.

●- 조선학을 배울 수 없었던 한국인

필자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으므로 당시의 사정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는 끝내 우리 자신의 대학을 갖지 못했다. 지금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가 고작이었다.

대학설립의 의지와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 직후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이 요원의 불처럼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월남 이상재선생과 남강 이승훈 선생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앞장을 섰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서둘러 창립함으로써 그런 움직임을 탄압·말살해버렸다. 그렇다고 경성제국대학은 한국인을 위하여 세워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초부터 일본인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땅에 세워진 이상 마지 못해 한국학생을 일정한 비율로 제한해서 입학시켰다.

경성제대의 학과와 정원은 법문학부(法文部)와 의학부가 각각 80명, 일제말기에 설치된 이공학부(理工部)가 40명 등 3개학부에 한 학년 총 입학정원이 2백명이었다. 그중 한국학생은 학부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30% 내외였다.

가령 나는 1938년 처음으로 모집된 이공학부 제1기생으로 합격하고 예과 3년과 본과 2년반을 거쳐 1943년 9월에 졸업을 하였는데, 우리반 40명 중 한국학생은 12명뿐으로서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본땅 안의 여러 대학이 한국학생의 입학을 극도로 억제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어쩌다 한 클라스에 한명, 쌀에 뉘섞이듯 끼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처럼 일제는 한국인의 고등교육을 억제·제한하는 가운데, 또한가지 불변의 철칙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대학과 어떤 학과에는 절대로 한국인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규칙이다. 전형적인 데가 해군병학교(오늘날의 해군사관학교)와 동경·대판·구주(東京·大坂·九州)의 여러 대학중의 조선공학과였다. 이들 학교와 학과에서는 일제 36년간 단 한명의 한국인도 입학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해군과 군함에 관한 기밀은 한국사람들에게는 가르치지도 않고 군에 참여시킬 수도 없다는 방침이었다. 구한말로부터 일제말기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이는 더러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이청천장군, 성남고등학교의 설립자인 김석원장군, 고 박정희대통령 등 얼마든지 예를 들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해군병학교를 나온 이는 단 한명도 없다. 한명도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 실정이므로 일제시대에 일본육군의 장교를 지낸 이는 많아도 해군장교로 복무한 이는 단 한명이 있을 따름이다. 그는 우리나라 제2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용운(李龍雲)장군이다. 그렇다고 그가 해군병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본래 동경고등상선학교(東京高等商船学校-우리나라의 海洋大에 해당함)출신의 선장인데 일제말기에 일본해군장교로 임명됐었다.

일본 각 대학의 조선과(造船科)에서도 절대로 한국인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과의 학과목 중에는 군함의 구조와 설계 등에 관한 것이 있었는데 이를 극비에 붙였기 때문이었다.

금세기 전반기에 대학에서 조선공학을 배운 한국인은 단 한명뿐이다. 그분은 안중근의사의 생질인 안진생(安珍生)씨이다. 그는 중국에서 망명 생활중 이탈리아의 제노아대학에 유학하여 조선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해방후 환국하여 해군공창장, 대한조선공사 부사장, 외무부 대사 등을 역임했는데 지금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 잠수함 설계하며 조선학 독학

필자는 본래부터 대학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다. 1938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일제시대에 대학을 다닌 만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과에 입학할래야 할 수도 없었거니와 당시 경성제대 이공학부에 조선공학과는 없었다. 이공학부에는 이학계통으로서 물리와 화학의 두 학과, 공학계통으로서 기계·전기·토목·응용화학·광산야금 등 5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중 기계과를 택했던 것이다.

내가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인데, 그 사연은 좀 길고 복잡하다. 필자가 쓴 책 '배의 歷史'(1980)와 '牛岩隨想集 등잔불'의 권말에 '나는 어떻게 조선을 하게 되었는가'라는 글이 부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줄이기로 한다.

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나는 조선기계제작소에 취직을 했다. 그회사는 지근 인천에 있는 대우중공업이지만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기계공장이었다.

내가 취직한 일제 말기 1943년에 그공장에서는 본래의 사명대로 기계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배를 건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배라는 것이 여느 배가 아니고 군부에서 주문을 받은 잠수함이었다. 처음에 나는 기계과에서 일을 했지만 곧 그 잠수함 만드는 것이 하도 신기하고 마음이 끌려서 자진해서 그곳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조기부 기계과 공정계(造機部 機械課 工程係)에서 조병부 설계과 선각계(造兵部 設計課 船殼係)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것이 내가 평생 기계를 떠나서 조선분야에서 일하는 계기가 될 줄은 당시에는 미처 생각치 못했다.

잠수함 설계에 참여하는 일이 어찌나 재미 있는지 나는 곧 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1943년까지 일제말기 2년간은 일본의 패전을 앞두고 몸부림을 치며 갖은 수단방법을 다하여 사람을 볶아대던 때다. 그런데도 나는 잠수함을 설계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2년간을 지냈다.

그때 나는 조선학을 독학했다. 남들이 퇴근을 한 텅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회사에 비치되어 있는 책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으며 한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본시 조선공학은 기계공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고체역학·유체역학·열역학 등 기초과목이 공통될 뿐만 아니라 설계나 선체시공 등도 기계와 유사한 데가 많다. 그런 만큼 나는 비교적 쉽게 조선에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 해방후 조선공학과를 창설

1945년 일본이 패퇴하고 광복이 되자 조선기계제작소의 잠수함 건조도 저절로 중지되고 나의 조선학 독학도 끝이 나는듯 싶었다.

우리들 자신의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만큼 모든 것은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때 나는 그대로 계속해서 조선분야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기계분야로 돌아서느냐, 또한 현장에 그대로 있으면서 생산에 종사하느냐 아니면 교편을 잡느냐 하는 등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여러가지로 고민을 했다.

일년 남짓 망설인 끝에 역시 조선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일을 하려 해도 마땅한 조선공장이 없고, 조선을 배우고 가르치려 해도 조선학과를 둔 학교가 없었지만, 그거야, 어떻게 되지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닥쳐올 고생은 각오해야 했다. 해방의 환희는 잠시이고 그 뒤에 다기온 사회적 혼란에 누군들 고충을 겪지 않은 이가 없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새길을 개척해 보려는데는 남모른 애로들도 매우 많았다.

어느 학교에서 조선학을 가르칠 것인가. 해방된 다음해 1946년 가을에 인천에서 발족한 인천해양대학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조선을 가르치며 나래를 펴볼 셈이었다. 내가 조선학을 가르치다니 하고 감격도 하고 다음해에는 조선학과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국립으로 발족은 하였지만 여러가지 혼란된 사정으로 진해해양대학과 합병을 하고 또 후원을 약속한 군산으로 이전을 하는 등 제대로 조선과가 발전하지 못했다.

나는 1949년 봄 군산에 있는 국립해양대학을 사직하고 서울대학교로 전임했다. 마침 조선담당 전임교수가 한명도 없는 서울공대 조선항공학과(造船航空科)에서 초청을 해서 서울로 온 것인데, 내가 부임함으로써 조선학 교육이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다. 그로부터 1985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나는 36년간 조선을 가르치고 그후로는 명예교수로 있지만, 그간에 조선의 사정은 교육이나 공업에 있어서 크게 변했다. 정말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는 조선공학과나 조선공업은 전혀 없었다. 대학에서 조선학을 가르치는 학과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귀속재산으로 일본인이 내놓고 간 조선소가 있기는 했으나 해변의 공지나 다름이 없었고 그나마 운영할 기술과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조선을 해야 한다는 국가사회의 여망만은 대단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첨단과학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은 것처럼 그 당시에는 조선공업을 일으켜 바다로 진출해야 한다는 사조가 매우 강했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격려가 힘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한 학과를 개척해나가는데 따른 크고 작은 애로는 많았다.

우선 교수요원을 구할 수 없는 고충이 컸다. 일제가 조선학과의 문호를 굳게 잠그고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인재가 있을 리 없었다. 전과목을 나혼자 담당하며 꾸려 나가자니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50년에 제1회로 졸업한 제자들이 몇년후부터 학교에 돌아와 주기까지 문자 그대로 고군분투했다.

모처럼 졸업을 시켰는데도 취직이 잘안되는 고충도 대단했다. 워낙 조선공업이 낙후되어 대학졸업생을 채용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기계공장이나 화학공장에 취직을 시켜야 했다. 공모를 하는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응모자격이라도 좀 달라고 졸라대기가 일쑤였다.

●- 견문을 크게 넓힌 미국유학

1954년 봄 나는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6·25 변란도 일단락이 되어 서울로 수복을 할 무렵 문교부가 교수 10명을 뽑아 외국에 파견했는데, 이에 선발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공과대학인 MIT 조선공학과에 갔다.

나는 당시 서울대학의 조교수였는데, 그 학교에서도 나를 조교수 대우의 연구원(visiting fellow)으로 대접해주었다. 연구실도 하나 주고 마음대로 수강과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우대해주었다.

대학에서 제대로 조선학을 공부하지 못한 나로서는 우선 여러 선생의 강의를 들어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초과목, 설계과목에서부터 대학원 과목에 이르기까지 되도록 많은 과목을 청강했다. 정말 감개가 무량했다. 일제시대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조선학을 독습하던 일, 조선공학과를 설립하던 일, 서투른 강의를 해온 일, 부산 피난살이에 고생하던 일, 학교로 돌아와서 나를 돕고 있는 제자들에게 과를 맡기고 미국 MIT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마치 꿈과도 같았다.

실험에도 열중하였다. 배의 모형을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선박모형시험수조(ship model towing tank)에서 각종 실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방학중에는 개인 설계사무소 실습도 나가 보았다. 학생들의 조선소 견학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정말 나의 미국유학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마치 우물안 개구리가 큰 바다에 나온듯 많은 것을 견문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좀더 기한을 연장하여 대학원 코스를 밟아볼까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 나는 10명의 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었고, 또 학교도 그렇게 오래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에게는 1년의 유학이면 족했다. 빨리 돌아가서 미국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좀더 좋은 강의를 할 것을 생각하며 1955년 봄 여객선을 타고 귀국했다.

●- 조선학과·조선공업의 약진

고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그해 여름방학에 강습회를 열어 내가 미국에서 들은 강의를 모두 전수하는 일이었다. 기본조선학 선박구조 선박설계 등 조선과에서 중요시되는 모든 과목을 졸업생이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듣게 하였다.

그것은 내 실력이 모자라서 부실하게 가르쳤던 데에 대한 보강의 의미였다. 그래서 한여음 무더위를 무릅쓰고 강행했다. 가능하기만 하면 모든 졸업생에게 새로운 지식을 베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국에서 돌아보고 난 후 강의에 자신이 생긴 것은 물론이다. 그전의 강의내용이란 정말 두고두고 생각해도 몰염치한 내용이었다. 때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일도 있곤 했다. 강의뿐 아니라 학과운영에도 신명이 났다. 10여년 고생을 한 보람이 있어 모든 것이 잘 되어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를 맞이하여 우리 조선공학과는 약진의 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전부터 학교에 돌아와 강의를 담당하고 있던 우수한 졸업생인 황종흘(黃宗屹)흘, 김정훈(金貞勳), 임상전(任尙琠) 등 여러 교수들이 모두 MIT에 유학을 다녀오고, MIT의 것과 유사한 선박모형시험수조도 완공이 되었다.

비로소 조선학과의 4사람이 각자 전공을 정하여 자신있게 강의를 담당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선박설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1968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연안객선에 있어서 대형 구상선수(球狀船首)가 조파저항(造波抵抗) 감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험적 연구'라는 논문을 가지고 공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내가 미국에서 보고 돌아와서 만든 선박모형시험수조에서 우리나라 객선을 가지고 실험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여러가지 여건이 좋았더라면 미국에서 얻을 수 있었던 학위를 뒤늦게 고국에서 얻은 터이지만 후회할 것 없는 값진 영광이었다. 더욱이 논문작성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황종흘선생의 도움이 매우 컸다.

우리 조선공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약진을 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 다음 가는 세계 제2위로 비약을 하여 이제는 일본을 추월하는 단계까지 와 있고 이에 따라 우리 조선공학도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수준에 와있다.

나는 10여년전부터 선박사(船舶史)와 거북선(船) 연구에도 종사하여 현재 '조선왕조군선연구'(1976), '거북선의 신화'(1978), '배의 역사'(1980), '韓國船舶史硏究'(1984), '牛岩隨想集-등잔불'(1985), '한국배의 역사'(1989년초 출간 예정으로 조판 중) 등의 저서를 내놓고, 정년퇴임 후인 현재도 조선공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198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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