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하고 즐겁게 지내오던 우리 가정에 감격적인 해방의 종소리는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리던 해방의 종소리는 우리 재일교포들에게도 들려왔다. 교포들은 해방이 마치 모든 삶의 터전을 주는양 착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연락선을 타고 한국으로 속속 귀향하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우리 가족도 모든 것을 버리고 탑선하여 고향부근 농촌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후에 유행했던 전염병(콜레라)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우리 가족도 그중의 하나로 병든 사람이 병든 사람을 간호해야하는 처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때 의학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고 연이어 막내 동생도 유명을 달리했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막내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 살아 남으신 어머니 그리고 나이어린 우리 5남매는 끼니조차 이어가기가 곤란한 상태에서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2년 후에 발발한 6·25동란으로 주위의 모든 빈터가 피난민의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또 학교 교정은 연병장으로 바뀌었다. 살기 위하여 노력했다기보다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던 나의 국민학교 2~3학년 시절이었다.
이런 혼란중에서 어떻게 대학까지 진학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은 생각이 든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 가까이 있는 중학교와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읍내소재 중학교에 응시, 두 학교 다 학격이 되었다.
결국 읍내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미 형님이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형제가 동시에 다니면 등록금이 감면되었다.
●- 낙동강의 홍수를 보면서
학교와 우리집 사이에는 낙동강이 있어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장마비로 인하여 보통 때는 50m 정도이던 강폭이 때로는 1km이상이나 되었다. 게다가 강한 급류를 헤치며 나룻배로 건너야 했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홍수때는 더욱 가관이었다. 가축 원두막지붕 사과 목재 등이 떠내려와 강을 메우기도 했다. 이 때 마을 주민들은 이 물건들을 건져내곤 했는데 나는 이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나의 학문'과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부산과 마산을 연결하는 철도 연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따금식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수업중인 학생들의 정신을 바짝 들게 해주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마음을 산란하게 하기도 했다. 검은 연기를 내면서 사라져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시리 마음이 들뜨기도 했던 것이다. 나도 그 기차를 타고 미지의 대도시로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며 이러한 무의식적인 생각이 부산고등학교를 택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시골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다 끝마치지 못한채 졸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도시의 소위 일류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산고는 시골 중학교 수학선생님이 권장하여 주셨는데 선생님의 격려의 말씀에 힘입어 원서를 제출하고 입학시험을 치뤘다.
그런데 그렇게도 자신있던 수학시험에서 문제를 다 풀지 못한 채 빈칸을 남기고 시험지를 제출해야만 했다. 순간 나의 지식의 천박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요행히도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1학년 1학기 성적이 전례없이 나쁘게 나와 중학교 시절의 '땡땡이 박사'란 별명을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땡땡이'라는 별명은 중학교 한문선생님의 별명인데 키가 작고 체구가 땅땅하여 학생들이 그렇게 불렀었다. 그런데 내가 '땡땡이 박사'란 별명을 이어 받은 까닭은 체구가 한문선생님과 같고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었다.
아뭏든 고교시절 초반의 저조한 성적은 이내 만회되었다. 끈기와 인내, 노력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고교졸업반에 이르러서는 서울대의 무슨 학과라 할지라도 흔쾌히 지원서를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 사라호를 직접 겪으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태풍 '사라'호가 부산지방을 강타한 적이있었다. 부산지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당시 나는 부산 수정동 산중턱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앞바다를 굽어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산더미와 같은 파도가 부두와 방파제 그리고 앞바다 섬을 마구 뒤덮는 모습을 목격했다. 시내에서 양철지붕이 바람에 날려다녔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집밖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낙동강의 홍수, 부산지방을 강타한 태풍 사라호를 통해 본 자연의 위력에 대한 신비가 후일 내가 기상학을 전공하게 된 잠재적인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동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고등학교 때는 의사가 될 것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 발을 내리자마자 아무런 처방도 써 보지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동생의 최후의 모습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서울대 의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낙방의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2지망으로 천문기상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과대학에 미련이 남아 당시 후기대학이던 가톨릭의과대학을 지원하여 합격을 하게 되었다.
의사가 되느냐, 자연과학자가 되느냐하는 기로에 서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경제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기상학을 택하게 되었다. 의과대학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학비조달, 생활비 부담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2지망학과 선택으로 인하여 대학 4년을 어떠한 긍지도 갖지 못한 채 보냈다. 나름대로의 계획도 없이 밤이면 과외수업 강사로 일하면서 보낸 것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당시는 천문기상학과가 창설된지 몇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5·16혁명 등 사회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수업에 열중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전공과목에 대한 참고서적이 원서 1~2권이 있었을 뿐이었다. 강의노트 이외에는 공부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던 시기였다.
●- 교도소에 가는 기분으로
졸업과 동시에 공군기상장교로 입대하게 되었다. 여기서 학교에서 배운 전공을 실무에 응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 4년동안 배운것이 너무나 빈약, 복잡 다단한 일기현상을 예보하기란 나에게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아침 일과 시작과 동시에 브리핑판을 들고 비행대대 앞에서 일기예보를 하여야 했다. 그런데 이때 웃지 못할 일들이 간혹 발생했다. 날씨가 좋을 것이라 예보하고 돌아온지 불과 몇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린 적도 있었다. 그러면 다음 날 비행대대에 브리핑하러 들어가기가 정말 싫었다. 마치 죄인이 감옥소에 들어가는 기분과 같았다.
때로는 일기예보가 잘 맞아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의 대기상태를 예측하는 일은 항상 조마조마한 심경이 뒤따랐다. 이 때 확고한 지식의 부족을 통감하게 되었다.
내가 유학의 길을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공군장교로 김포기상대에 근무할 때였다. 출퇴근길에 국제선 항공기가 요란스럽게 이착륙하는 것을 무수히 보았다. 김포공항을 떠나 하늘 높이 어디론지 사라지는 비행기에 내마음을 함께 보낸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미지의 나라로 막연히 떠나고 싶은 심정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은 김포기상대에서 전대본부 연구평가과로 이동 발령되면서부터였다.
이곳에서는 기상학의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후임 신참장교들에게 기상학에 대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특히 미국대학의 기상학과나 대기과학과에 대한 소개 책자를 풍부하게 접하게 돼, 유학의 꿈은 여물어 갔다.
제대후에 여기서 본 자료들을 토대로 미국 여러 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 장학금과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제대한지 1년만에 마침내 김포공항의 국제선에 몸을 싣게 되었다. 이때 내 손에는 비행기표와 환전액 3백달러가 쥐어 있었다.
●- 휴식과 두통
돌이켜 보면 유학 첫해는 언어의 장벽과 싸운 시기였다. 또 만약 공부를 잘 못해 장학금을 지급받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책과 씨름했다. 이로 인하여 전공에 대한 지식도 많이 넓혀졌다.
분명 노력은 한국에서보다 2~3배 더 많이 하였지만 결과는 그 만큼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대학의 교육체제와 한국대학의 교육방법이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논리적인 사고를 토대로 하는 단답형 응용문제가 주로 출제되었는데, "XX에 관하여 논하라"라는 식의 당시 한국의 대학 시험문제와는 너무나 판이하였다.
그리고 각 교과목 강의 첫 시간에 배포하여 준 강의계획서에 따라서 한시간도 빠짐없이 철두철미하게 강의해가는 미국의 조직적인 강의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몇 사람이 제의하면 휴강이 어렵지 않았던 한국의 대학강의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학기가 시작되면 항상 숙제와 시험으로 동분서주하여야 했고 그러다 보면 한 학기가 언제 지나가버렸는지도 알지 못한 채 기말시험에 이르게 되었다. 기말시험을 치른 후에는 늘 두통으로 시달려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해야했던 시질이 바로 나의 유학시절이었다.
내가 석사학위를 취득한 위스콘신대학의 기상학과는 대학원 학생수만 해도 1백명이 넘었고 세계 각국에서 많은 학생이 찾아 왔다. 이곳에서 나는 기상위성자료를 이용, 구름의 두께를 예측하는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나는 대기오염확산을 연구하기 위해 오레곤 주립대학교로 진학했다. 이곳에서는 연구조원과 조교로서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았는데, 이 대학 대기과학과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동시에 험란한 학위과정도 끝이 났다.
학위과정을 통하여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나의 학문'을 하는데 좌절감을 가져본 적은 없다. 다만 우둔할 정도의 인내와 끈기로 노력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 식량증산과도 깊게 관련돼
대기과학은 지구 대기권, 때로는 다른 행성까지 포함하여 그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을 관측하고, 이해하고 나아가 예측과 조절을 하는 학문이다. 동시에 인류사회 복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기초과학이다. 또 연구대상이 지구 전체이므로 국제협력이 어느 분야 학문보다 더 중요시되는 학문인 것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대기과학에 대한 관심도는 간단없이 높아져 왔다. 그 까닭은 "대기오염으로 인하여 지구의 대기환경이 악화일로에 있는데 이를 인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해 대기과학이 답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세계인구 증가추세에 따라 식량증산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후변동의 이해가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첨단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첨단관측기기(원격관측기기)가 등장하여 학문의 가치와 신뢰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따라서 종래에는 관측이 불가능하였던 산악지방이나 넓은 바다에서도 관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형 컴퓨터의 등장으로 전세계의 대기상태를 수분내에 분석하고 예보할 수 있게 되었다.
대기과학은 대기운동의 규모를 기준으로 세분할 수 있다. 전세계의 기후를 이해하는 대기 대순환, 오늘과 내일의 날씨를 파악하는 종관기상학, 각종 악(惡)기상과 관련된 중간기상학, 지표부근 및 대기경계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루는 미기상학 등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단계를 관측 해석 예보 그리고 조절단계로 나눈다면 대기 대순환과 종관기상학은 예보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 중간기상학은 아직 관측및 해석단계에 있으므로 앞으로 많은 유능한 연구자를 필요로 하는 분야이다.
미기상학은 우리의 생활권내의 대기를 다루는 분야이므로 이는 토목 건축 환경 보건위생 농업 원예 등 많은 분야에 응용이 된다. 미기상학분야 중에는 현재 실용화되고 있는 것도 있다. 비행장의 안개소산과 농작물의 온실재배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인공강우는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용화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
대기과학 분야의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가?
새로운 첨단관측장비의 개발로 악기상관측이 용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악기상현상들의 물리적 과정이 밝혀지게 되고 나아가 예측과 조절이 가능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태풍의 진로변경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농작물 재배에 적합한 대기환경을 예측,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한발을 예측하여 식량준비에 차질이 없게 할 것이다.
따라서 대기과학에 의한 정보는 계절적 상품 유통에 유용한 정보가 됨은 물론, 여가선용과 취미생활에 필수적인 정보가 될 것이다. 또한 선박 항공기 육상교통의 안전운항에 중요한 정보가 된다.
●- 개척자 정신을 요구한다.
자연현상은 투철한 관찰력과 항구적인 연구심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는 데서 규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분야를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물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힘이 강해야 한다. 때로는 상상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자연현상의 발생과 변화에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이를 탐구하려는 진취적인 정신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이 분야는 아직 미개척된 분야가 많으므로 개척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요구한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높은 사람이라면 말할나위 없다.
현재 국내에서 대기과학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학부만 마치고 취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선택하기 보다는, 긴 안목을 가지고 이 새로운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는 소신으로 지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다.
현재 대기과학(기상학)을 전공한 졸업생들은 여러 분야 즉 기상대 각 대학교 항공회사 등에서 일하고 있다. 또 졸업생 가운데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학기술원 해양연구소 환경연구소 컴퓨터회사 등에서 종사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또 해외로 유학하여 선진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도 다수 있으며, 개중에는 다른 나라에서 대기과학분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한편 학부, 대학원 졸업 후 군복무겸 실무경험을 얻기 위하여 공군장교로 복무하는 사람이 최근에 증가 추세에 있다. 또 기상대 등의 근대화추세에 따라서 앞으로는 활동영역이 더욱 넓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외에 정부기관이나 개인기업체에서도 대기분야의 지식이 요구되고 있다. 교통부 건설부 환경청 각 공단의 환경관리부 토지개발공사 농진청 한국전력공사 등이 대기과학 전문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현재 이 분야에 일하는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 그 이유는 제도적인 제약으로, 채용에 한계성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