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수상자 중에서 상을 받았을 때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사람은 프란시스 페이턴 라우스(미국)이었다. 발암성 바이러스를 발견한 공적으로 1966년도 노벨의학·생리학상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87세였다.
노벨사상 일곱번째의 여성수상자로서 1983년도 노벨의학·생리학상을 받은 바바라 맥클린토크는 이 부문의 첫번째 단독여성수상자였을 뿐 아니라 가장 고령의 여성수상자라는 기록도 세웠다.
32년만에 인정받은 업적
1983년 10월 10일 스웨덴의 가톨린스카연구소가 옥수수의 전이(転移)유전자를 발견한 공적으로 맥클린토크에게 노벨상을 준다고 발표하던 날 그녀의 연구실전화통은 불똥이 튀었으나 맥클린토크는 벨이 울릴 때마다 수화기를 잠깐 들었다가는 다시 놓곤했다. 그녀에게는 축하전화도 받을 여유가 없었다. 연구조수도 없는 그녀는 한순간도 연구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60여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이런 생활을 보내온 그녀가 이날 라디오에서 노벨상수상소식을 들었을때 "어마나!"라는 외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32년만에 업적이 인정되었다는 감동을 감출수가 없었다.
맥클린토크가 전이유전자를 발견한 것은 1951년이었다. 그녀는 유전자가 실로 꿰맨 염주알처럼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염색체위로 이리저리 뛰어다닐 수 있고 이 전이유전자는 어떤 유전자의 기능을 멈추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발표했을 때 그의 논문이 발췌인쇄를 요청해 온 것은 3건뿐이었다. 그녀의 연구는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을뿐 아니라 관심을 가진 과학자도 거의 없었다. 오랜세월이 흐린 뒤 생물학자들은 박테리아와 다른 생명체에서도 이런 유전자를 발견하고 비로소 그녀의 업적이 유전자의 규제메카니즘과 유전학에 중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말괄량이 책벌레 소녀시절
최근 맥클린토크의 전기를 쓴 보스턴의 노스이스턴대학 수학 및 인류학교수 '에벌린 폭스 켈러'는 맥클린토크의 고집은 이단적인 성장과정에서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연구에서 성공하는데는 이바지했으나 전문세계에 적응하는데는 실패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맥클린토크는 1902년 미국 코네티커트주의 수도인 '하트포트'의 의사집안의 네자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들은 학교교육을 '성장과정의 사소한 일부'라고 생각하고 딸이 공원에서 날마다 스케이트를 지치면서 학교를 빼먹는 것을 대수롭지않게 생각하고있었다.그녀의 부친은 처음 뉴잉글랜드지방에서 개업하다가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옮겼는데 학교당국에 대해 자기 딸에게는 숙제를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그래서 바바라 맥클린토크는 말광양이와 책벌레로 자라났다. 그녀의 모친은 대학은 여성이 갈 곳은 못된다고 믿고 있었으나 맥클린토크는 17세되던해에 '코넬'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처음 식물육종을 전공할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숙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학문이라고 생각되어 식물학을 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옥수수와 평생을 건 로망스가 시작된다.
대학에서 그녀는 많은 친구를 가졌고 데이트도 많이 했으나 곧 결혼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매달릴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그녀는 자기 연구에 평생을 매달리게 된 것이다.
1927년 코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맥클린토크는 여성이라는 핸디캡때문에 14년이라는 기나 긴 세월을 이렇다할 직장없이 임시직 강사와 연구조수로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1930년대만해도 미국대학에서는 여성에게 교수직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코넬대학에서 그녀를 지도했던 옥수수 유전학자 R.A. 에머슨 교수는 "옥수수의 유전·세포학에 관한 한 맥클린토크는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연구자"라고 치켜세웠으나 그녀를 받아 들이겠다는 대학이나 연구소는 아무데도 없었다. 1941년 그녀는 완전히 무직자가 되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뻗은 곳은 워싱턴의 카네기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그녀를 롱 아일랜드에 있는 콜드스프링 하버의 산하 유전학연구소로 보냈다. 맥클린토크는 연구실과 도로를 끼고 마주보는 곳의 차고를 개조해 만든 집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연구소에 올 때 맥클린토크는 이미 옥수수에 관한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대학원생시절에 옥수수의 10개의 특이한 염색체를 밝혀내고 이것을 분류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염색체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유전연구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얼마 뒤 그녀는 대학원생 '해리엣 크레이턴'과 함께 유전자가 식물의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정보를 나르고 있다는 것을 실증했는데 종전까지는 다만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쳤었다.
DNA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 시대에서 잡종식물의 물리적인 특징 뿐 아니라 그 세포물질까지 밝힌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맥클린토크는 세포유전학계에서 정상의 자리를 굳혀갔다. 맥클린토크는 또 1941년까지 많은 연구끝에 옥수수에서 유전자의 발현은 이동유전소자로 제어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그녀는 제 9번째의 염색체와 함께 있는 한쌍의 유전자가 옥수수 알맹이의 색소형성에 대한 유전정보를 지정하는 유전자의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정지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활성(Ac)유전자는 절단(Ds)유전자에게 신호를 보내 염색체의 길이방향에 따라 자리를 바꾸거나 또는 '도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녀는 발견했다. 이 Ds 유전자가 도약하면 염색체가 절단된다. 이 절단유전자가 염색체의 가로방향으로 다시 삽입되면 이웃의 유전자들을 불활성화시킨다. 이렇게 유전물질이 뒤섞여 옥수수 알맹이에 다채로운 색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외면당한 역사적인 논문
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흥분한 맥클린토크는 연구결과를 요약하여 우선 미과학아카데미회보에 발표했다. 그녀는 좀 기다렸다가 해마다 열리는 가장 중요한 생물학회의인 유명한 콜드 스프링의 정량 생물학 심포지엄에서 완성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의 논문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 듣는 사람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녀의 논문을 받아 들이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그녀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는 이렇게 집약된 형태의 결론을 유도하는데 필요한 연구를 어떻게 한사람의 힘으로 모두 할 수 있었을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논문의 내용이 너무나 어려웠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었다.
노벨위원회의 한위원의 말을 빌면 그녀의 논문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5명정도의 유전학자들 뿐이었다는 것이다. 실망한 맥클린토크는 이때부터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학원생시절이래 꾸준히 발표해 오던 연구논문도 이때부터 완전히 중단해 버린 것이다.
그녀의 연구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받은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문제는 두가지 면에 있었다고 그녀의 동료들은 생각하고 있다. 첫째, 맥클린토크의 논문은 명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논문은 뻐근할 정도로 농도가 짙어서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현재 맥클린토크의 전이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젊은 식물분자생물학자 '스티븐델라포타'는 "그녀의 논문은 한절이 끝날 때 산더미같이 많은 데이타가 붙어다닌다. 그녀는 한마디의 발표를 뒤받침하기 위해 수백건의 실험을 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더우기 그녀는 자기의 연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료들과는 토론하기를 주저하는 고집이 있다. 그녀의 과묵은 수줍음과 고고한 지성이 뒤석인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의 전기를 쓴 '켈러'교수는 맥클린토크의 연구를 동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그녀의 논문이 "말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켈러교수는 "멕클린토크는 자기의 특수한 관찰 및 인식방법으로 밀고 나가고 있어 이것을 따라갈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맥클린토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남들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감싸고 존경한다. 그녀는 주로 거리를 두고 우정을 나누거나 또는 실험을 하다가 짧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지만 친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지난 60년간을 두고 내내 그녀와 사귀어 온 사람들도 있다. 그녀는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숲에서 주어 모은 까만 호두로 과자를 손수구어서 가까이 지내는 한두사람에게 선물한다. 그녀는 특히 자기의 연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시간과 정력을 바친다.
노벨상후보에도 여러번 올라
맥클린토크는 그동안에도 여러번 노벨상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그녀의 전이유전자에 관한 업적을 인정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의 과학사가인 '오웬 해너웨이'는 맥클린토크의 연구결과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옥수수외의 다른시스템에서도 검증할 수 있게 되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재결합 DNA기술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고 비치고 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첨단 분자생물학자들은 맥클린토크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식의 멘델방법을 통해 밝혀낸 사실들을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맥클린토크의 존재가 그동안 과학계에서 전혀 무시되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1944년에 미과학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된 세번째 여성이 되었다. 그동안 그녀의 이름은 과학계의 주류에서 크게 벗어난 일도 없었다. 그녀의 업적을 이해하고 언제나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 정상급과학자들도 몇사람은 있었다. 그중에는 옥수수유전학의 업적으로 널리 알려진 '마커스 로디즈'와 효소연구로 1958년노벨상을 받은 '조지 비들'이 있다. 맥클린토크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세계 DNA연구의 중심지였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주변에서는 고명한 인사로 통했다. 오랫동안 콜드 스프링하버연구소의 소장으로 지냈고 DNA 나선구조의 발견으로 1962년 노벨상을 탄 '제임스 왓슨'은 "세계 정상급의 유전학자들이 맥클린토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줄지어 콜드 스프링 하버로 찾아 왔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수상의 사태
그러나 1970년대부터 맥클린토크의 유전자연구는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1981년 한해동안 그녀는 무려 8개의 상을 받았다. 그중에는 1만 5천달러의 상금이 달린 권위있는 '알버트 라스커'기초의학연구상과 5만달러 상금의 이스라엘의 '월프'재단상이 포함되어 있다. 또 시카고의 맥아더재단은 그녀를 펠로우로 임명하고 평생동안 해마다 세금이 면제된 7만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물질적인 욕망이라고는 좋은 안경하나면 족했던 그녀는 이렇게 많은 돈을 받게되자 처음에는 당황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참았던 불편은 덜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차(혼다 어코드)도 한대 구입했고 20년간 거처했던 차고위의 두칸짜리방 신세에서 벗어나 좀 넓직한 집도 장만했다. 그녀는 노벨상의 상금이 19만달러나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
외로운 은둔자
노벨상의 수상자로 발표된 뒤 며칠동안은 수많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청했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많은 기자들이 콜드 스프링 하버의 넓은 잔디밭위를 어슬렁어슬렁 거닐면서 그녀의 작은 아파트나 연구실에서 만날 기회를 노렸다 두사람의 아르헨티나 기자는 그녀의 자연스런 모습을 찍으려고 며칠동안 잽싸게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맥클린토크는 이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맥클린토크는 흔히 고독한 사람, 은둔자, 속세를 버린 사람 또는 롱아일랜드에 사는 '희미한 유전학자'등 여러가지 말로 묘사되고 있다. 그녀의 대화는 주로 무생물의 대상과 나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일생은 18세기 영국소설 '파멜라'에서 성의 장애를 극복하고 부와 명성을 얻은 정결한 젊은 여성에서 본딴 것이 아닌가하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인터뷰에 좀체로 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유전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
맥클린토크를 가리켜 '최후의 멘델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유전학은 본시 19세기의 성직자인 그레고리 멘델이 시작한 과학인데 맥클린토크는 어디를 보나 멘델의 진짜 제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멘델이 완두콩시험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듯이 반세기의 세월을 옥수수시험장에서 수도생활과 같은 고독으로 지샜다. 맥클린토크는 과학연구가 대규모의 연구팀으로 수행되는 시대에 연구조수 한사람도 없이 혼자서 수행했다. 그녀는 또 멘델처럼 오랜 세월을 그녀의 연구노력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었다.
맥클린토크의 일과는 지난 30년간 달라진 것이 없다. 일찍 일어나서 에어로빅체조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숲속으로 걸어간다.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도서실에 들어가 논문을 복사하고 최신의 저널을 읽는다. 그곳에서 곧장 연구실로 가서 꼬박 16시간을 보내는데 이따금 간이침대에서 낮잠을 잔다. 봄과 여름에는 약 4백미터 떨어진 시험밭에 나가서 옥수수를 심는다. 본래의 시험밭은 조류보호지역과 이웃해 있었으나 이제 잔디로 덮였다. 그녀는 이곳을 가리켜 '사랑스런 작은 오아시스'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맥클린토크의 연구는 수십명의 분자생물학자들에게 자극을 주어 옥수수연구에 손을 대개 했다. 그녀가 거둬들인 종자는 전세계의 연구소로 전파되고 그녀가 얻은 지식은 유전자의 규칙과 돌연변이과정에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노벨상위원회의 말대로 한때 빛을 보지못했던 그녀의 업적은 오늘날 '제임스 왓슨' '프란시스 클릭'이 1953년 발견한 DNA의 2중나선구조와 함께 "우리 시대의 유전학의 2대발견중의 하나"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전이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제 박테리아가 항생물질에 대한 내구력을 발전시킬 때 전이물질을 통해 이웃의 박테리아에게 이런 특성을 전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또 정상세포가 종양세포로 바뀌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밝혀낼 것으로 보인다.